불과 시험
강연자 : 김형중 문학 평론가
181012 (금)
저녁 7시 조금 넘어서 시작했다가 8시에 잠시 쉬었다. 다시 이어져 8시 20분에 평론가가 준비해 온 내용은 다 끝나고 질문을 받다가 8시 40분에 마무리되었다.
홍보물에 강연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없었다. 그저 김형중 문학평론가가 '불과 시험'이라는 주제를 정신분석학적으로 강연한다는 것 뿐. 가스통 바슐라르 같은 건가? 생각하며 찾아갔는데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난 불과 시험에서의 '시험'이 삶에서 마주치는 시험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말 그대로 학교 시험이었다. 그것도 수능시험.
김형중 평론가는 가벼운 이야기로 강연을 열었다. 딸이 대학교 1학년인데 그 전에도 한국의 문학 교육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자식을 키워보니 한국의 문학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문학 교육은 정해진 대로 문학을 읽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교과서에 실린 그런 문학 작품들을 최대한 악의적으로 읽어서 현재 한국의 문학 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문학을 얼마나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김형중 평론가의 타겟이 된 시는 안도현의 '연탄' 연작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애송시라는 그 유명한 시.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운운 하는 그 작품을 포함해서 같은 시집인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실린 세 편의 연탄시 「너에게 묻는다」와 「연탄 한 장」, 「반쯤 깨진 연탄」 세 편을 교과서 해설과는 전혀 다른 김형중 평론가의 해석으로 다시 읽었다.
김형중 평론가가 연탄 연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구구절절 옮겨 쓰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 사람의 평론가가 한 해석을 또 다른 문학 교과서의 해설서처럼 정해진 답변마냥 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주입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보라는 태도 자체니까.
까놓고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이 '안도현 시 존나 구려, 이것도 시라고 썼나?' 몇 마디하고 끝날 것을 배운 사람이 까면 이렇게 무섭구나, 싶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비틀린 유머를 담아서, 그야 말로 뼈도 못 추리게 두들겨 패는 내용이었다. 한국 문학 속의 다른 연탄불들, 오정희의 미명과 윤대녕의 빛의 걸음걸이를 동원해 비교하고 불의 기원적인 속성을 끌어오고 소화(消火)와 문명을 연결하고 이드, 자아, 초자아로 세 편의 시를 딱딱 정의 내려 강냉이 하나 안 남기고 털어버린다.
마지막으로 2009년 6월 고1 전국연합학력평가 언어 영역에서 안도현의 연탄을 가지고 실제 출제된 문제를 가져와 문학 교육의 폐해를 되짚어 주는 확실한 결말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강연이 그렇게 흥미롭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내가 안도현의 팬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안도현의 시를 두들겨 패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10년은 늦은 거 같은데.
김형중 평론가는 정전(正典)을 공격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안도현의 시가 한국 문학계의 정전으로 꼽히는 작품인가? 솔직히 팔리기는 얼마나 잘 팔렸을지 몰라도 문학적으로 안도현의 시는 이제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유명하긴 하지만 문학계에서 안도현의 시를 문학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높이 평가하지는 않잖아. 새로 등장하는 시의 독자들이 안도현의 시를 찾아 읽는 것도 아니고.
또 아쉬웠던 건 다음 타겟은 누구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생태시를 언급한 거였다. 생태시는 굳이 때릴 것도 없이 혼자서 죽어가는 영역 아닌가? 요즘 누가 생태시를 읽고 주목받는 생태시 시인이 새롭게 등장하긴 하나?
교과서에 실리면서 문학계 정전인 작품들, 정말로 그 굳건한 벽에 있는 힘껏 한 번 부딪혀 흠집을 내 볼만한 작품은 안도현이나 김용택 같은 사람들의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도현 김용택이 아니라 문학인들이 정말로 정전으로 인정하며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는 작품은 따로 있잖아.
김수영의 시에도 안도현의 연탄만큼이나 형편없고 짜증나는 시들이 있다.
또 강연 후 질문 시간에 어쩌다 보니 무진기행의 남성 판타지적 면모도 얘기 나왔었는데 무진기행 하면 오오오 김승옥 오오오 무진기행 하며 다들 무릎 꿇는 정전 중의 정전 아닌가. 그건 논의해 볼만한 거라고 말하던데 논의해 볼만한 것에 달려드는 게 평론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솔직히 안도현을 누가 못 까. 굳이 평론가가 칼 같은 펜을 야심차게 빼어들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고은 얘기도 나왔는데 솔직히 고은 시도 존나 구리잖아.
안도현 「반쯤 깨진 연탄」의 성적인 뉘앙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음탕함을 배운 사람이 예리한 눈으로 지적하며 조목조목 까는 것도 나름 재밌고 속 시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타겟이 좀 아쉽다. 이 시점에서 정말로 다시 읽기가 필요한 작품들, 구름 저 높은 곳 성전에 모셔져 다른 해석, 다른 관점을 강력한 권위로 거부하는 작품들, 멱살을 잡고 끌어내 평론가의 말마따나 한번 '악의적으로'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 정말 안도현과 생태시일까.
김형중 평론가가 뭔가 이상한 방법으로 정말로 어려운 것, 정말로 평론가로서 부딪혀 볼 만한 것에서 피해간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날 안도현과 생태시를 까는 게 정말로 한국 문학 평론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인간적으로는 이런저런 곤란함이 생길 수는 있겠다. 그러나 평론 자체로는 그 텍스트가 아무리 지성이 넘치고 재기발랄하고 근사한 비틀린 유머가 있어도 태생적으로 안전빵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 때문인지 강연 시간에 나누어 준 불과 시험 텍스트는 진짜 평론가로서 치열하게 끝까지 밀어 붙이며 쓴 평론이라기보다는 글쟁이가 비뚤어진 재미를 느끼며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끌어 모아 콜라주 방식으로 놀아 본 소품에 가까운 것 같았다. 콜라주는 정확성이 좀 떨어지는 표현 같고 조각모음이 더 비슷할 것 같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어떤 큰 줄기처럼 내면에 있고 거기에 자기 독서 경험에서 얻은 잘 들어맞는 텍스트들을 조각모음으로 이리저리 적절히 배치해서 만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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