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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피버 드림-'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는 것

 

"이 작품의 천재성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다."는 뉴요커의 평에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는데 운 좋게 창비 서평단이 되어 가제본으로 미리 접했다.

 

피버 드림은 첫 문장부터 다짜고짜 시작된다. '벌레 같은 거예요.'라고.

 

 

—벌레 같은 거예요.

—무슨 벌레인데?

—벌레 같은 거요, 어디에나 다 있는.

 

 

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독자는 벌써 흐르고 있는 물에 휘말리듯 작품에 진입하게 된다. 이들이 무슨 관계인지,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대체 이건 어떤 이야기인 건지. 이미 시작된 대화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알아내야 한다.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저절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읽으면서 어느 시점부터는 병상에서 죽어가며 딸 니나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는 아만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며 끊임없이 벌레가 생기는 정확한 순간에 집중하며 대화를 이끌어가는 다비드가 작가로 보이기도 했다. 디테일을 중요시하고 어떤 이야기를 요구하고 이야기가 가야 할 방향을 디렉팅 하는 편집자 겸 작가. 그러나 더 읽어가며 그런 다비드가 독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반부터 나름 역전이 일어나는 것도 흥미로웠다. 대화 내내 다비드에게 끌려 다니던 아만다가 "이제 무슨 얘기에 집중할지 정하는 사람은 나야.", "이제 이게 중요한 얘기가 될 거야." 하는 모습들.

 

다비드가 파고드는 '벌레가 생기는 정확한 순간'은 어쩌면 우리 삶에 균열이 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인수공통전염병이나 환경 문제로 읽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일반적인 개념의 병이나 확실히 지시할 수 있는 어떤 뚜렷한 문제를 가리키기보다는 '풀밭의 이슬 아닌 이슬'처럼 언제 어느 때고 너무나 쉽게 우리 삶을 부술 수 있는 무언가를 작가가 세련된 솜씨로 분위기를 구축하고 신경을 조여드는 감각으로 서술한다. 이런 작품을 어떤 밋밋하고 평평한 말로 일반화하거나 납작한 메시지로 만드는 건 이 소설의 신경 가닥을 건드리는 매력을 휙 불어 끄는 일일 것이다.

 

책을 다 덮은 후에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속에 달라붙듯 오래 기억나는 것은 이 작품이 자아내는 어떤 뉘앙스, 분위기, 신경적인 것, 그리고 이미지들이었다. 28개의 무덤, 아직 어두운 새벽길을 건너는 수많은 '이상한' 아이들, 벌레를 품은 아이들의 이미지들. 그리고 엄마인 아만다가 끊임없이 어린 딸 니나를 보며 가늠하는 '구조 거리'의 감각, 실로 이어져서 팽팽하게 배를 조이는 그 감각이 백지를 건너 독자에게 가하는 환상통.

 

이 책이 건드리는 모성 불안의 측면도 흥미로웠다. 아만다는 끊임없이 딸 니나와의 구조 거리를 살피는데 부모의 공포에도 여러 결이 있는 것 같다. 내 아이가 어느 날 사라진다면, 이라는 존재하는 아이가 부재되는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손가락 발가락 개수를 확인하는 것처럼 내 아이가 혹시 '정상'이 아니거나 다친다면, 이라는 아이 존재의 훼손에 대한 두려움.

 

피버 드림에서는 아이의 실종이나 훼손도 아니고 아이가 존재하는데 더 이상 내 아이가 아닐 때의 불안과 공포를 그린다. 이런 내 아이 아닌 아이의 존재는 부모가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재는 구조 거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비드는 끊임없이 지금 니나가 어디 있냐는 아만다의 물음에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영상화된다는데 영상물이 되면 원작과는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영상에서는 좀 더 '개연성'있게, 그러니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원인과 결과 같은 게 보다 자명해지고 몇 십 분 정도 영상을 보고 끝에 도착한 시청자가 나름대로 손에 어떤 해답을 쥘 수 있는 퍼즐 맞추기 형 미스터리가 되지 않을까.

 

 

피버 드림 - 8점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