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만나면 멈출 수가 없다.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편까지 쉬지 않고 달리게 된다.
예전에는 드라마 보는 게 취미였는데 요즘은 본 드라마가 없다. 확 끌리는 작품이 없기도 하지만 밤을 새워가며 뭔가를 보는 열정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
다른 글이 너무 안 써져서 손가락도 풀 겸 예전에 재밌게 봤던 미드 영드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다 본 지 오래된 작품들이라 지금 보면 감상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ROME
미국 HBO, 영국 BBC, 이탈리아 RAI 합작
시즌1 12화 2005. 08. 28~2005. 11. 20
시즌2 10화 2007. 01. 14~2007. 03. 25
출연 : 시어런 힌즈, 제임스 퓨어포이, 폴리 워커, 린지 덩컨, 케빈 매키드, 레이 스티븐슨, 인디라 바마, 맥스 퍼키스, 케리 콘던
시즌 1 1화를 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였다. 이건 내 드라마였다.
ROME은 카이사르 휘하 제13군단의 백인대장 루키우스 보레누스와 보레누스의 부하 티투스 풀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시점에서 격동의 로마를 보여준다.
총 12화인 시즌1에서는 루비콘을 넘어 로마에 들이닥친 시저로 시작해서 로마의 혼란과 영광을 거쳐 원로원에서 벌어진 시저 암살로 막을 내린다.
시즌 2에서는 시저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강력한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시저 사망 이후 주인을 잃은 로마의 패권을 거머쥔다.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옥타비아누스가 '프린켑스(제1시민)'의 자리에 올라 개선 행진을 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공화정 로마의 시대가 끝나고 제정 로마가 시작되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지금껏 내가 함께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 봤을 때는 진짜 이건 미쳤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재밌었다. 시즌1 3화였나 '티투스 풀로가 공화국을 무너뜨린 방법'인가 그런 제목의 에피가 있었는데 가상 인물과 실제 역사의 큰 줄기를 엮어가면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게 기가 막혔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 안 나는데 보면서 와 ㅅㅂ 어떻게 이런 걸 썼지? 감탄했던 게 생생하다.
사실 ROME은 굉장히 지루해질 수도 있는 드라마다. 21세기의 우리는 시저가 암살당한다는 것도 알고 옥타비아누스가 최종 승자라는 것도 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는다는 것도 안다. 시작할 때부터 이미 모두가 이 이야기의 결말을 다 아는 상황인데 그 결말을 이끌어 나가는 스토리텔링이 예상 밖이라 멈출 수가 없었다.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화정 로마 이상의 웅대한 꿈을 꾸었던 시저와 그 꿈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그들의 대적자로 표현되는 전통 질서의 대변자들을 보며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커다란 역사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역사 고증과 기발한 드라마적 상상력, 빨려드는 스토리텔링, 그 시대 로마를 표현한 근사한 미술, 흥미로운 캐릭터가 훌륭하게 어우러지는 것도 만족스러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는데 안토니우스를 연기한 제임스 퓨어포이가 작품 속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BBC 제인 오스틴 영상물에도 종종 나오더라. 옥타비아누스는 시즌1의 야무진 아역 배우의 눈빛이 참 좋아서 시즌2의 창백한 새디스트 성인 옥타비아누스는 낯설었다. 그냥 그 인물이 성장했구나, 가 아니라 캐릭터성 자체가 바뀐 느낌이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도 굉장히 강렬한 캐릭터였다.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지만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를 뽑아냈다. 시즌2의 마지막 화는 마침내 시저도 가보지 못한 프린켑스라는 지위를 거머쥔 옥타비아누스의 승리가 아니라 아티아의 드라마로 기억된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역시 ROME을 생각하면 시저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시저를 연기한 시아란 힌즈는 이 드라마로 확실히 각인이 되어 다른 작품에서 만나면 괜히 반가웠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인공을 맡은 연극 햄릿에서 클로디어스로 다시 만났고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의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ROME이 지금까지 내가 가장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드라마 같다. 다 보고 나서 도저히 이걸 나 혼자 알 수 없어 주변 사람들 붙잡고 제발 이것 좀 보라고 홍보하고 다녔다. 내가 처음 봤을 때도 이미 끝난 지 오래된 옛날 드라마라 별로 호응이 없었다.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놀라고 같이 얘기하고 싶은데 혼자 좋아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드라마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보는 게 재밌는데.
DVD를 사서 재탕에 삼탕을 하고 드라마가 너무 좋아서 그냥 무작정 한글 파일을 열어 대사를 하나씩 받아 적기도 했다. 지금은 뭔가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좋아하는 게 어렵다. 내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덕질을 했다는 게 신기하다. 추억팔이 겸 적다보니 다시 보고 싶어지네.
셜록
BBC One
시즌 1 3화 2010
시즌 2 3화 2012
출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 마틴 프리먼
드라마 셜록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내게 이 문장은 '날카로운'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드라마 셜록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이 딱 저 문장이었다. 굉장히 샤프하고 리듬이 딱딱 맞아 떨어지면서 번뜩이는 드라마. 드라마 전체에 흐르는 팽팽한 텐션이 참 좋았다.
나오자마자 전 세계의 덕후들을 사로잡은 드라마이지만 나는 뒤늦게 접했다. 아마 남들은 시즌 3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첫 화를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덕분에 길게 기다릴 필요 없이 시즌1을 본 뒤 바로 이어서 시즌2를 볼 수 있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는데 배경만 살짝 손질해놓고 그게 '21세기 셜록'이라 말하는 게으른 재해석, 안이한 영상화가 아니라 원작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드라마 셜록만의 창의성이 빛나는 작품이라 좋았다.
택시 운전사가 나오는 시즌1 1화를 참 인상 깊게 봤다. 시즌1만큼은 아니지만 시즌2도 재밌게 봤는데 3시즌은 첫 화를 보다 중간에 멈췄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 시즌에서 느껴지던 날카롭기까지 한 창의성이 맥없이 죽어 있었다. 변화가 너무 확 느껴져서 이상할 정도였다. 뭔가를 만들어 보려 드라마를 비틀어 보기도 하고 뒤집어 보기도 하는 게 느껴지는데 팔딱팔딱 거리는 창작자의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더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즌3 첫 화를 보다 멈췄고 그 후로는 보지 않았다. 시즌 1 처음 봤을 때의 그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만 기억해야지.
트루 디텍티브
HBO
시즌1 8부작 2014
출연 : 매튜 맥커너히, 우디 해럴슨
시즌2도 있고 시즌3도 방영 예정이라는데 1시즌만 봤다. 연출자도 다르고 이어지는 얘기도 아니라 해서……. 시즌1은 90년대에 벌어진 주술적인 연쇄살인 사건이 2010년대에 다시 일어나고 옛날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두 명의 형사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이다. 세세한 건 잊어버렸는데 볼 때는 굉장히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배경인 루이지애나주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널리고 널린 흔한 연쇄살인 형사물로 치부하기에는 자아내는 분위기가 사람을 주술처럼 사로잡는다. 늪지대와 버려진 도시 외곽, 사이비종교 같은 요소가 보고 있으면 뭔가 괜히 공기가 끈적끈적한 것 같고 강렬한 햇빛에 눈앞이 핑 도는 것 같다.
대사나 인물, 분위기가 하드보일드 소설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마지막 엔딩에서 매튜 맥커너히가 어두운 밤과 별에 대한 대사를 말했던 것 같은데 그 문장 그대로 하드보일드 소설에 적혀 있을 것 같았다. 막바지에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은 좀 아쉬웠지만 분위기와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기억에 남는다.
하우스 오브 카드
넷플릭스
시즌 1 13부작 2013
시즌 2 13부작 2014
스포 있음
제발 이것 좀 봐달라고 주변에 사발통문 돌리고 다녔던 드라마.
너무 내 취향이었다.
정치 드라마로는 보다 이전에 나온 웨스트 윙도 재밌게 봤지만 솔직히 웨스트 윙은 너무 옛날 드라마인데다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의 꿈과 희망 뭐 그런 느낌이었다. 현실을 아예 외면하지는 않지만 휴머니즘과 낭만성을 결코 잃지 않는 드라마. 웨스트 윙의 세계가 인간의 이상에 가깝고 기본적으로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세계라면 하오카는 인정사정없는 냉혹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정치 드라마로는 웨스트윙보다는 하오카의 분위기가 더 잘 맞았다. 웨스트윙의 정치인들은 정이 가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이지만 보고 있으면 어째 기만당하는 것 같다. 현실의 백악관은 프렌즈가 아니잖아.
시즌 6이 곧 나온다는데 시즌3 중반까지 보다 건너뛰고 바로 시즌4로 넘어갔다. 그리고 거기까지만 봤다. 시즌1, 2가 제일 좋았다. 시즌3에서는 '나의 클레어는 이렇지 않아!' 울부짖으며 책상을 쾅쾅 내리치는 한 마리 덕후가 된 것 같았다. 러시아에서의 클레어의 모습은 지금까지 하오카에서 내가 사랑했던 냉철한 클레어가 아닌 것 같아 보기 괴로울 정도였다.
하오카를 보면서 두 번 놀랐는데 첫 번째는 시즌2 초반 조이 반즈의 죽음. 조이가 처음부터 비중 있게 나와서 앞으로도 쭉 나올 하오카의 중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초반에 그렇게 죽여 버릴지 몰랐다. 그것도 프랭크 자기 손으로 직접 지하철에서 떠밀어 죽이다니. 얜 진짜 무슨 일이건 하는 캐릭터구나, 인물의 냉혹함에 몸서리쳤다. 그 때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나중에 시즌4에서 프랭크가 조이와 피터, 자기가 죽인 사람들 환영에 시달리는 장면은 좀 심드렁했다. 막 팔짱 끼고 '저거 프랭크 언더우드 캐붕아닌가여;' 하며 혀를 끌끌 차고 싶어진다.
두 번째로 놀랐던 건 프랭크와 부인 클레어, 대통령의 경호원인 미첨 장면. 어째 셋이 분위기가 묘하네, 하고 보고 있었는데 클레어가 미첨의 손에 입을 맞추고 이어서 프랭크와 미첨이 키스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양웹에서는 쓰리썸과 미첨의 이름을 합해서 'threechum'이라고 부르더라.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줘서 놀랐다.
프랭크가 제3의 벽을 깨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시청자에게 얘기하는 연출도 좋았다. 2013년 에미상에서 하오카의 이 부분을 이용한 개그씬도 있었다. 닐 패트릭 해리스가 사회를 보는데 전임자였던 지미 키멜, 제인 린치, 지미 팰런, 코난 오브라이언이 우당탕탕 끼어들어 각각 한 마디씩 훈수를 두며 다툰다. 무대는 이들로 난리법석인데 그때 객석에 앉아 있던 프랭크 언더우드의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뒤돌아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기가 이번 에미 호스트에 거절당해서 저들이 닐을 공격하게 판을 짰다고 하오카의 프랭크 풍으로 연기한다. 시상식의 재미를 더해주는 장면이라 심심할 때 종종 봤었다.
여러 모로 좋아했던 드라마인데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케빈 스페이시의 상습적인 성추행이 드러나면서 넷플릭스는 앞으로 케빈 스페이시와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곧 나올 하오카 파이널 시즌에서도 프랭크 언더우드는 빠진다고 한다. 프랭크가 주인공이고 그의 비중이 너무 큰 드라마라 재밌게 봤던 시즌1, 2도 다시 보기 좀 껄끄럽다. 그냥 이대로 봉인해두는 수밖에.
할로우 크라운 / 텅 빈 왕관
BBC Two
2012
시즌1 4부작
출연 : 벤 위쇼, 로리 키니어, 제레미 아이언스, 톰 히들스턴
시즌2도 있는데 시즌1만 봤다. 생각해 보니 나온 시즌 다 챙겨본 건 롬 밖에 없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리처드 2세를 다룬 첫 화가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시작하자마자 거대한 궁전의 천장에서 왕좌까지 카메라가 천천히 내려오며 벤 위쇼의 목소리로 셰익스피어 원문을 각색한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 순간 이건 내 취향이라고 느꼈다.
Let's talk of graves of worms and epitaphs.
Write sorrow on the bosom of the earth.
Let us sit upon the ground
And tell sad stories of the death of kings.
How some have been deposed
Some slain in war
Some haunted by the ghosts they have deposed
Some poisoned by their wives
Some sleeping killed
All murdered.
너무 아름답지 않나. 이 때 벤 위쇼의 살짝 노래하는 것 같은 발음과 어조까지 어우러져 너무 좋아서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 내레이션을 그대로 폰 메모장에 받아 적고 달달 외울 정도로 좋아했다. 이 낭송의 문장, 분위기, 목소리 다 너무 사랑한다.
인물들의 옷 색깔 하나하나마저 신경 쓴 티가 물씬 나는데다가 성 세바스찬 그림을 이용한 연출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벤 위쇼는 향수 때 비주얼이 강렬했었고 그 후 딱히 그의 작품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없었는데 리처드 2세에서 무릎을 꿇었다. 셰익스피어를 tv 영상물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연기하는 배우라니.
볼링브로크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장면도 정말 너무 좋아서 그 부분 클립만 계속 돌려보기도 했다. 여기 대사도 달달 따라 외웠는데 지금은 많이 까먹었다. 대사 자체도 참 좋지만 벤 위쇼가 대사 치는 그 어조라 해야 되나, 물결이 흐르는 듯한 리듬이 너무 좋다. 지금도 대사를 보면 저절로 벤 위쇼 목소리가 떠오른다.
my care is loss of care, by old care done.
your care is gain of care, by new care won.
God save the king harry
Unkinged richard says
and send him many years of the sunshine days!
리처드 2세가 새로운 왕 앞에 내려놓은 왕관이 데구르르 바닥에 구를 때 그 느낌.
찾아보니 예전에 벤 위쇼가 무대에서 햄릿을 하기도 했다는데 어떤 햄릿이었는지 정말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벤 위쇼의 셰익스피어를 영화나 tv 드라마, 연극 무대, 오디오 북 등등 어떤 매체로도 좋으니 더 만나고 싶어.
이후 에피소드에서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헨리 4세와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헨리 5세가 나온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목소리도 굉장히 근사해서 그의 셰익스피어를 많이 기대했는데 1화의 벤 위쇼에게 너무 사로잡힌 채 봐서인지 크게 인상 깊지 않았다. 아니, 배우들의 연기는 둘째 치고 연출 자체가 1화의 퀄리티랑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각색 자체도 원작에 너무 매여서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만의 매력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 같고.
물론 분위기 자체는 1화와 달라야 하는 게 맞다. 왕은 하늘이 내린다고 강력히 믿었던 리처드 2세가 있던 왕권신수설의 세계와 '왕'을 끌어내린 이후의 세계는 달라야 하는 게 맞으니까. 리처드 2세의 피가 뿌려진 이후의 세계는 달라 질 수밖에 없었고 그걸 잘 살려내는 게 중요한 포인트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히 색감이나 분위기가 다른 게 아니라 갑자기 연출의 질이 수직하락 됐다. 보다가 깜짝 놀라서 왜 이렇게 됐는지 검색해봤는데 1화의 연출자와 다른 화의 연출자가 달랐다. 할로우 크라운 시즌 1 전체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리처드 2세의 1화가 너무너무너무 좋아서 지금도 떠올리면 뭔가 내 안의 소중한 보석 같다. 어지간한 연극보다 더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작품이다.
다운튼 애비
ITV
시즌1 7부작 2010
출연 : 미셸 도커리, 댄 스티븐스, 매기 스미스
이것도 시즌 1만 봤다. 이 정도면 내 끈기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1912년 타이타닉 침몰을 알리는 소식에서부터 시작해서 영국의 근사한 저택 '다운튼 애비'를 중심으로 영국의 계급 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대를 보여준다.
원래 다운튼 애비는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고스포드 파크의 스핀오프로 만들어지던 드라마였다가 한 번 엎어지고 지금의 다운튼 애비가 되었다고 한다. 단순히 재미로만 보면 나는 고스포드 파크보다 다운튼 애비가 더 재미있었다.
고스포드 파크에서도 나왔던 매기 스미스가 여기서도 나오는데 미워할 수 없는 백작 부인을 연기한다. 밥벌이하는 직업을 가지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대귀족이다. 내게는 맥고나걸 교수님으로 기억되는 배우가 정말 의아한 얼굴로 '주말이 뭐니?' 하고 묻는 장면에서 뒤집어 졌다. 이런 개그 너무 좋다.
한 저택 내의 '위층' 사람들과 '아래층' 사람들, 그리고 마을의 중산층들까지 영국 특유의 미묘한 계급 관계가 거미줄처럼 투명하게 잘 짜인 드라마였다.
브로드처치
ITV
1시즌 8부작 2013
출연 : 올리비아 콜먼, 데이비드 테넌트, 조디 휘태커
이것도 시즌1만 봤다. 이상하게 정말 재밌게 봤는데도 드라마 다음 시즌을 챙겨보는 건 쉽지 않다.
나는 유독 드라마는 혼자 보는 것보다 사람들이랑 같이 보는 게 좋다. 주변에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같이 봐줄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 브로드처치도 사람들에게 제발 같이 보자고 매달렸는데 엄마한테 통했다.
명절이었나 방학이었나 집에 엄마랑 같이 있었을 때였는데 IPTV에 브로드처치가 있었다. 전에 혼자 재밌게 본 드라마라 은근히 엄마가 같이 보기를 바라며 1화를 틀었는데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셨다. 한 두 화 보고 쉬는 게 아니라 내가 완전히 드라마 빠졌을 때처럼 엄마가 계속 다음 화 이어보자고 재촉하셔서 시즌1 8화를 앉은 자리에서 둘이 쉬지 않고 몰아서 봤다.
상황 자체는 단순하다. 영국의 작은 해안 마을 브로드처치에서 어린 아이가 죽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면서 평범해 보이던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잘 정돈되었던 표면적인 일상 밑의 어두운 삶이 커다란 사건으로 흔들려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게 흥미롭다. 선명하고 이상하게 차가운 색감과 서늘한 음악, 설명되지 않는 스산함과 우울한 분위기도 좋았다.
1화에서 죽은 아이의 어머니에게 붉은 원피스를 입혔는데 연출이 좋았다. 자식의 죽음을 직감하고 뛰어가 흰 천으로 덮인 해변의 시체를 보는 배우의 모습이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으며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에 쉽게 빨려들게 만든다. 우리 엄마도 그 장면에서 완전히 빠지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배우의 뛰어난 연기와 더불어 단번에 그 세계에 몰입되게 만든다.
피키 블라인더스
BBC Two
1시즌 2013
2시즌 2014
출연 : 킬리언 머피, 헬렌 맥크로리, 폴 앤더슨, 조 콜, 소피 런들, 샘 닐, 애너벨 윌리스, 톰 하디
킬리언 머피가 1920년대의 갱으로 나온다. 모자에 면도날을 붙이고 다니는 '피키 블라인더스'라는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다. 하오카도 그렇고 난 피도 눈물도 없는 머리 좋은 나쁜 놈이 온갖 술수를 써가며 최정상으로 달려가는 이야기가 취향인 것 같다.
작품 자체는 이런저런 아쉬운 점도 있는데 킬리언 머피의 까리함에 취해 시즌 2까지 군소리 없이 봤다. 음악을 쓰는 것도 그렇고 참 스타일리시한 드라마다.
이것도 집에 있을 때 엄마랑 같이 봤는데 엄마가 한 화 끝나면 계속 바로 이어서 다음 화 보자고 하셨다. 은근히 엄마랑 드라마 취향이 맞는다. 다음에도 또 뭔가 같이 보고 싶다.
이런 드라마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나쁜 놈들인데 쉘비 가 사람들이 참 매력적이다. 주인공인 토미는 말할 것도 없고 폴리 고모도 멋지고 아서나 존, 에이다도 좋다. 괜히 잘 하지도 못하는 러브 라인에 힘 빼지 말고 쉘비 패밀리나 집중해서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시즌 2까지만 보고 말았지만 이 드라마의 러브라인은 너무 매력이 없다. 킬리언 머피의 토미 쉘비가 이렇게나 까리하게 나오는데도 러브 라인이 재미없다니.
기묘한 이야기
넷플릭스
시즌1 8부작 2016
출연 : 핀 울프하드, 밀리 바비 브라운, 게이튼 매터래조, 케일럽 맥로린, 노아 슈나프, 위노나 라이더, 데이비드 하버, 찰리 히튼, 나탈리아 다이어
루저 취급 받는 또래 남자 아이들 그룹에서 한 아이가 행방불명되고 남은 친구들이 사라진 친구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미스터리한 초능력 소녀를 만난다는 내용이다. 스티븐 킹 소설 같다.
80년대 미국 배경인데 향수가 가득하다.
어린이 배우들은 귀엽고 성인 배우들의 연기는 안정적이다.
간만에 몰입해서 본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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