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담

요즘 하는 잡생각들 - 취향이다/아니다의 위험성, 철학의 필요성, 아름답고 슬픈 게 보고 싶음



1. 내 취향 아니야/내 취향이야의 위험성


ㅇㅇ하자, ㅇㅇ 보자, ㅇㅇ 갈래?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거절하는 이유는 언제나 비슷하다. 그거 내 취향 아니야.


취향이 아닌 걸 굳이 돈 쓰고 시간 들여서 하는 게 싫다. 그 돈으로, 혹은 그 시간에 내 취향의 무언가를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많은 걸 접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좋다는 건 알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집구석에 늘어져 있는 게 취향 아닌 걸 억지로 하는 것보다 더 좋을 때도 있다. 취향 아닌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으니까. 그 작품이 정말 나로서는 용서하기 어려운 선까지 넘어버리면 그걸 하자고 제안한 사람마저도 '이런 걸 좋아한단 말이야?' 하며 한동안 심리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아무튼 요즘 본의 아니게 내 취향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는데 문득 '내 취향 아니다'는 말이 너무 쉬워서 위험한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내 취향 아니'라고 하는 순간 더 멀리 뻗어나갈 수도 있는 수많은 얘기들이 단숨에 잘려버리고 너무 쉽고 너무 편하게 끝나버리지 않나. 타인과의 대화도 중단되고 내 생각도 거기서 멈춰서고 만다. 내 취향 아니야, 그리고 끝.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음. 머릿속 텅텅.


그런데 같은 이유로 '이거 내 취향'이라는 말도 위험한 것 같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작품을 만나면 습관처럼 이거 내 취향이라고 하는데 왜 내 취향인지, 어떤 부분이 내 취향인지, 내가 그렇게 흔히 쓰는 '내 취향'이라는 게 정말로 무엇인지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그 작품을 접함으로서 내면에 화학작용처럼 일어난 사랑에 대한 정확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무능함과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게으름의 결과가 '이거 내 취향이야'인 것 같다. 좀 더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난 너무 멍청하고 너무 끈기가 없다. 사랑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는 '내 취향이다'하는 순간적이고 일차원적인 반응만 하고 좋다고 히히 웃고 만다.




2. 철학의 필요성


시간이 흐를수록 철학을 배워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내가 제대로 된 언어로 만들지도 못하고 품고 있는 어떤 질문덩어리들, 뭔가 어렴풋이 감지만 하는 것들의 답이 철학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른 모든 것에 그러하듯이 언제나처럼 노오력을 하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지금 관심이 가는 건 현상학 쪽.


또 어떤 책에서 동양 미학의 심경, 정경, 의경에 대해 언급한 걸 봤는데 의경이 굉장히 흥미롭다. 뭔가 배울 수 있는 게 많고 파고들 가치가 있는 것 같은데 난 안 하겠지.


불교에도 관심이 간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사상적인 면에서.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책은 현암사에서 나온 『화엄경 강의』였다(그토록 찬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사유의 체계를, 그 후 어느 책에서도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그토록 찬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사유의 체계'라는 말에 확 꽂혀서 화엄경 책을 찾아봤는데 소설에 나온 '현암사에서 나온 연와무늬 표지의 『화엄경 강의』'라는 묘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책을 찾지 못했다. 현암사에서 나온 화엄경 책을 검색해 보면 알기 쉬운 불교 시리즈 1권으로 다마키 고시로가 지은 '화엄경'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걸까?


한강 작가는 실제로 젊은 시절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는데 이 사람이 불교를 통해 얻은 게 뭔지 궁금해서라도 불교가 알고 싶다. 불교에 대해 알면 한강의 작품을 더 깊이 볼 수 있을까?




3. 아름답고 슬픈 게 보고 싶다.


책이나 영화, 음악이나 그림, 사진이건 뭔가 아름답고 슬픈 게 보고 싶다.

인간의 삶은 너무 비루하고 너무 비천해서 아름답고 슬픈 것, 그러니까 예술이 없이는 너무 괴롭고 척박하고 가난한 것 같다.


아름다움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내게 아름다움은 결국 어떤 서글픔의 지점에 다다르는 것 같다. 그런 아름답고 슬픈 것에 대해 생각하다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에서 이 부분이 떠올랐다.


아마도 현실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끔찍한 시도만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실에, 세계의 사실적 실상과 인간의 내면적 진실에 성실하기 때문이다. 오직 진실한 것이 아름답다. 그렇듯이 참된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모든 진실은 어찌할 수 없는 것들-한계의 영역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실한 것은 슬플 수밖에 없고, 이 슬픔의 불가항력에 어쩔 도리 없이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슬픈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은 아닌데 '모든 진실은 어찌할 수 없는 것들-한계의 영역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실한 것은 슬플 수밖에 없고, 이 슬픔의 불가항력에 어쩔 도리 없이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이 부분이 참 좋다.


내 생각과 제일 비슷한 건 어느 인터뷰에서 이응준 작가가 한 말인 것 같다. '탐미주의 작가로 불릴 때가 많으신데, 작가님에게 있어 '아름답다'라는 건 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울기 시작해서 슬퍼도 울고, 아파도 울고, 기뻐도 울어요. 어쩌면 인간은 하나의 감정만을 가졌는지도 몰라요. 바로 슬픔이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름다운 노래라고 했을 때 그게 어떤 음악이었는지. 대체로 슬픈 선율 아니었던가요? 저는 문학을 볼 때도 슬픈 문장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물론 그 슬픔은 정확해야 해요. 군더더기 없이 있을 것만 딱 있는 상태요. 한마디로 말해 제게 있어 아름답다는 건 정확한 슬픔인 것 같아요.


저 대답에서 포인트는 '정확한'에 있는 것 같다. 그 슬픔은 정확해야 한다. 그 아름다움은 정확해야 한다. 그리고 정확하려면 대강 뭉개버리거나 슬슬 힘 빠지는 어느 지점에서 대충 마무리해서는 안 된다. 끝까지 가야 한다. 정확하려는 자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