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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1991) - 나와 연결된, 나 아닌 나에 대한 감각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위아래가 뒤집어진 저녁 풍경이 보이고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기, 저 별이 나왔으니까 이제 크리스마스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안개가 보이지?"

카메라가 옆으로 흐르며 밤하늘이 더 넓게 보인다.

여자가 말한다.

"저건 안개가 아니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함께 있어서 안개처럼 보이는 거야."


그리고 화면은 바뀌어서 이제 어머니의 품에 안겨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맨 처음 나온 뒤집어진 세상은 이 아이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던 셈이다.


잠시 화면이 암전 되었다가 돋보기에 비친 커다란 갈색 눈과 초록색 잎사귀가 나온다. 새소리가 쉼 없이 들리고 여자가 말한다.

"첫 잎사귀가 나왔네. 이제 봄이니, 나무들은 모두 이런 잎사귀로 덮일 거야."

아이는 아마도 어머니일 여자의 말을 듣는다. 어머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이것 볼래. 여기 밝은 쪽에는 가느다란 줄기들이 있어."


그리고 비로소 주연 배우의 이름과 타이틀이 나타난다.

이 짧은 세 장면을 보자마자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나서도 정말 좋았다.


키에슬로프스키의 1991년 작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서 똑같은 얼굴과 재능, 비슷한 습관, 같은 건강 문제를 가진 폴란드 소녀 베로니카와 프랑스 소녀 베로니끄를 다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지만 세상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막연한 느낌을 감지한다. 그러다 우연히 광장에서 프랑스의 베로니끄를 본 베로니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약한 심장이 문제를 일으켜 죽는다. 베로니끄는 자신과 같은 얼굴을 가진 폴란드 베로니카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베로니카가 죽는 순간 알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저며 눈물을 흘린다. 그 후로 베로니끄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세상에 혼자 있다고 느낀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영화 두 편이 생각났다.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 (1973)과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 (2016).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전체에 걸쳐 있는 노란색 필터의 아름다운 영상과 그 영상이 만들어내는 공간과 이미지의 시적인 느낌이 벌집의 정령의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과 시적인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벌집의 정령을 이끌어나가는 어린 소녀, 갈색 머리에 똘망똘망한 눈을 한 아나 토렌트의 사랑스럽고 어딘가 서글프기도 한 얼굴과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1인 2역을 맡아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갈색 머리 이렌느 야곱의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이 무의식적으로 겹쳐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벌집의 정령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가진 시각적 특징과 영상 분위기가 비슷해서 떠올랐다면 퍼스널 쇼퍼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주제와의 연관 때문에 생각났다.


퍼스널 쇼퍼가 주인공 모린이 나를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영화라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폴란드의 베로니카를 잃은 베로니끄 부분은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영화이다. 퍼스널 쇼퍼가 나를 이끌고 호명하는 것의 시원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프랑스의 베로니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여진을 온몸으로 앓는다.


영화의 끝에서 퍼스널 쇼퍼의 모린은 자신을 부르던 것이 먼저 죽은 쌍둥이가 죽은 뒤의 세상에서 보내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 베로니끄는 자신이 잃은 것이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가졌던 폴란드의 소녀라는 걸 알게 된다.


'나와 연결된 나 아닌 나'에 대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상실을 온몸으로 앓는 것을 시적인 영상으로 만들어 낸 영화가 정말 좋았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서글펐다.


감독 키에슬로프스키와 음악가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콤비가 만들어 낸 가상의 작곡가인 '반 부덴 메이어'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불길한 초록색 불빛의 무대, 투명한 유리구슬을 통해 보는 뒤집힌 세상, 캄캄한 강당에서 펼쳐지는 지극히 섬세한 인형극, 거울에 반사된 빛 조각, 그리고 단순한 반사 빛만이 아닌 빛무리, 한순간 카메라의 작은 떨림으로 표현해내는 죽은 자의 시선 등등 언어로 쉽게 잡히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며 다른 세상으로 초대해주는 것 같은 영화였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 영화를 사랑하지만 보면서 주인공 베로니카/베로니끄를 맡은 배우 이렌느 야곱의 벗은 몸을 조금은 불필요하게 과시적으로 카메라에 담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노출이 필요하다 해도 영화에서 그걸 어떻게 보여주냐는 다른 문제인데 가만 보고 있으면 다소 과하게 육체를 전시한 느낌이다. 벗은 몸이 영화에서 자연스럽고 영화에 어떤 의미나 시적인 이미지, 내적 완성, 어떤 정서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꼭 저렇게까지 보여줘야 했나 의아해지는 연출이다.


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후 줄리엣 비노쉬와 <세 가지색 블루>를 찍었다. 줄리엣 비노쉬의 인터뷰에 따르면 키에슬로프스키는 세 가지색 블루를 찍을 때 줄리엣이 남자를 기다리며 알몸으로 방 안을 걷는 씬을 찍고 싶어 했다고 한다. 


줄리엣 비노쉬는 그 장면에서 인물의 노출 필요성을 이해할 수 없어 감독에게 물었고 키에슬로프스키는 그냥 그러면 좋을 것 같다는 식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줄리엣 비노쉬는 키에슬로프스키에게 당신은 당신이 그 장면을 찍음으로써 어떤 질문들을 받을 것인지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고 결국 그 장면은 영화에 포함되지 않았다. 창작자가 배우의 벗은 몸을 영화에 집어넣으려 할 때는 그 장면이 반드시 필요한지, 영화에서 어떤 효과를 의도한 것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영화에 나오는 짧은 인형극 장면.

영화의 한 부분으로서만 아니라 이 인형극 자체만으로도 참 아름답다. 특히 '반 부덴 메이어'의 음악이 흘러나올 땐 머리카락이 오싹해질 정도로 좋다.



+ 보르헤스의 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축복의 시의 한 대목이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이 구절 앞에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떠올랐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a double vie de Veronique) 1991

감독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배우 : 이렌느 야곱

작곡 :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촬영 : 슬라보미르 이드지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