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있음
이사 준비로 바빠서 날 새고 조조로 본 영화였다. 피곤한 몸으로 극장 시트에 앉았는데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오프닝이 나오는 순간 '이 영화,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이 너무 게으르고, 너무 쉽게 정리해버리는 말이고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 낡고 뻔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이 말이 참 잘 어울린다. '어른'이라는 것에 방점을 둔 표현으로서도, '동화'라는 말에 방점을 둔 표현으로서도.
영화는 마법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며 물에 잠긴 방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방에는 가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잠든 여인도 물속에 떠있다. 마치 마법에 걸려 잠든 공주님처럼.
그리고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이미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는 자의 어투로.
"내가 만약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 시간에 대해서?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기예르모 델 토로의 2017년 작인 <셰이프 오브 워터>는 분명 1960년대 초반 미국의 항구도시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의 세계는 독특한 동화적인 면이 있다. 물에 잠긴 오프닝은 놀라운 솜씨로 관객을 홀려 어딘가 기묘한 이 영화의 세계로 초대하고 끌어당긴다. 오프닝 이후로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기괴괴한 일들이 영화에서는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이 설령 아가미가 달리고 커다란 눈의 녹색 양서류 인간의 등장일지라도.
짧은 순간 안에 세계를 단번에 구축하고 그 안으로 관객을 무리 없이 데려오는 오프닝의 이미지와 음악의 힘이 대단했다. 이 기가 막힌 음악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작품.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음악상에 데스플라를 응원했는데 그가 상을 타서 기뻤다.
그렇게 마술적인 오프닝으로 시작된 영화는 초반에 주인공 일라이자의 생활 정경을 보여주는데 그녀가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면서 달걀을 삶는 것과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가 자위를 하는 모습을 아주 심플하게 묘사한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의 자위 장면이라니. 뭔가 가볍게 찰싹 얻어맞은 것 같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나? 눈을 깜빡이며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저게 '그게' 맞다는 걸 깨달을 때 기분이 뭔가 묘하다. 그래, 이건 정말 '어른'들을 위한 것이군, 하고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의 자위라니. 그것도 여성의 자위를 남성 중심의 성적 판타지에 기댄 볼거리로서가 아니라 달걀을 삶는 아침 준비처럼 주인공의 일상 하나로 스크린에 보여주니까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지는 점도 있었다.
영화의 전반부는 꽤 속도감 있고 전개가 빠르다. 가끔 잘린 손가락이나 실험실에 흥건한 피 웅덩이 같은 잔혹한 장면이 깜짝깜짝 놀라게 하지만 예고편을 보거나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온 관객이 예상 가능한 그 모든 이야기들을 경제적으로 통과하며 늘어지는 것 없이 진행한다.
잘한다, 잘한다 얘기는 듣고 갔지만 샐리 호킨스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정말 마법에 걸린 공주님 같았고 아주 사소한 것 하나, 던지는 눈빛, 건네는 손짓, 배우가 장면의 공기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기가 막혀서 넋을 놓고 봤다. '빼어나다'는 말이 떠오르는 연기였다.
특히 실험실에서 무사히 양서류 인간을 빼낸 뒤 그녀가 홀로 마스터베이션을 하던 욕실에 물을 가득 받고 두 존재가 물속에서 함께 춤을 추듯 사랑을 나누던 장면. 물이 흘러넘쳐 방 아래 영화관까지 뚝뚝 떨어져 집주인의 항의를 받은 자일스가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알몸으로 양서류 인간을 끌어안고 젖은 얼굴로 사랑과 만족으로 가득 차 미소 짓는 그 장면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인간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요정 같았고 스스로 빛을 내는 어떤 신 같았다.
악역을 맡았던 마이클 섀넌의 연기도 좋았다. 캐릭터 자체가 굉장히 강했는데 리처드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이 마이클 섀넌의 육체를 입어서 형상화가 더 효과적으로 잘 된 것 같다.
인간 여인과 인간이 아닌 괴생물체와의 로맨스는 꼭 '순정마초' 식의 과장된 남성성을 표현하는 것 같은 인외의 존재와 그가 욕망하는 인형처럼 예쁜 여인의 대상화된 외양 전시로 흘러가는 경우를 종종 봤는데 <셰이프 오브 워터>는 무엇보다 여성 주인공 일라이자의 사랑과 욕망이 중요하다.
인간 수컷보다 강한 힘을 자랑하고 과장된 남성성을 과시하는 생명체가 중심이 된 괴수영화에서는 아름다운 금발 여인을 자기 소유물처럼 말 그대로 손 안에 거머쥐는 장면은 나올지언정 섹스만큼은 섹스의 'ㅅ' 자만 나와도 죽는 개복치마냥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걸 피한다. 그러면서도 성적 판타지는 지나칠 정도로 치덕치덕 깔아둬서 그 이중성이 웃기기도 한데 이와는 달리 <셰이프 오브 워터>는 직접적으로 인외 존재와의 섹스를 언급한다.
일라이자가 주체적으로 성관계를 원해 양서류 인간이 있는 욕실로 자기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관계를 가진다. 사랑을 나눈 후에도 연인들의 공간에 제3자가 들어왔을 때 여성만이 알몸이라고 꺄악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끌어다 가슴을 가리는 한숨 나오는 전형화된 장면 없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낀 게 분명한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제3자를 바라본다. 그 앞에서 그녀의 친구 자일스는 자신이 연인들의 시간을 방해했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물러난다.
관계를 가진 후에도 혹시라도 못 알아챈 관객이 있을까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처럼 일라이자가 친구 젤다와 이야기를 하며 양서류 인간이 생식기를 가졌다는 걸 손동작을 통해 생체 구조를 표현하면서까지 설명해준다. 둘이 정말로 사랑을 나눴으며 양서류 인간과 인간 여성 사이의 섹스가 가능하다고 쾅쾅 확인 도장 찍어준다.
(남성 중심의) 온갖 성적 판타지를 밑바닥에 깔아놓고 섹스 앞에서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괴수영화와는 달랐다. 이 영화에는 꼭 여드름 난 사춘기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것 같이 한쪽 성의 판타지에 은밀히 호소하는 섹스어필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의 동등한 섹스가 있다.
솔직히 그 장면 없이 아이들의 동화처럼 그래서 양서류 인간과 일라이자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끝났다면 꼭 성관계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래서 둘이 정말 잘 살았을까 뭔가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을 텐데 성관계까지 문제없이 훌륭하게 잘 치러져서 더 마음이 놓이는 것도 있었다. 섹스가 사랑의 전부라는 건 아니지만 사랑의 중요한 한 부분인 만큼 두 연인이 그 문제도 성공적으로 통과한 덕에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음, 그래 둘이 정말 잘 살겠구나 싶어진다.
또 영화는 일라이자와 인간이 아닌 존재인 양서류 인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게이, 흑인 여성, 외국인,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연대와 인종 차별, 성차별을 수시로 일삼는 백인 남성 기득권자의 대립을 묘사하는데도 공들인다.
마이클 섀넌이 연기한 <셰이프 오브 워터>의 악당 스트릭랜드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백인 남성 기득권자가 악당인데 실례일지는 몰라도 사회의 기득권이 아닌 창작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악당이라는 생각이 들어 재밌었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도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멕시코인으로서 뭔가 부당한 권력 구조 같은 걸 느껴 본 적 있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악당 스트릭랜드는 청소부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아서 그들이 있는 화장실에서도 거리낌 없이 바지 버클을 내리고 태연히 오줌을 싸는 인간이다. 심지어 그는 볼일을 본 다음에 손을 닦지도 않는다! '오줌 싸고 손도 안 닦는 악당'이라니. 이만큼 현실성 있으면서 이만큼 진절머리 나게 소름 돋는 악당 얼마 없다. 스트릭랜드가 소변을 보고 닦지 않은 맨손으로 사탕을 까서 먹을 때는 정말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이 인간은 흑인 여성 청소부인 젤다에게 '신은 너보다는 나에 가깝게 생겼을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또 그는 요즘은 누가나 그 밖의 온갖 것들을 넣은 사탕이 나오지만 나는 불순물 하나 없는 이 옛날 녹색 사탕이 최고라며 그것만 먹는다.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주류 사회의 전형이다.
영화 속의 그는 60년대 냉전 시대의 남성이지만 동시에 자신과 다른 피부색, 자신과 다른 생김새, 자신과 다른 문화 등등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악당이기도 하다.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거대한 벽을 세우겠다고 말하고 이민국이 강령서에서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문구를 삭제하는 시점에서 악당 스트릭랜드는 더 깊게 다가온다.
영화 속에서 일라이자는 마침내 어느 순간 청소부를 인간 취급도 안 하고 그녀를 성추행하고 강간까지 하려 한 스트릭랜드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한 글자 한 글자 수어로 'FUCK YOU' 를 던지는데 자막에는 '지랄하지 마세요'라고 번역되어 있다. 수어 한 글자 한 글자 손동작에 맞춰 지, 랄, 하, 지, 마, 세, 요라고 글자 수 일곱 개를 맞춰 표현한 게 좋았지만 존댓말이라는 점은 쪼끔 아쉬웠다. 그 상황에서 일라이자의 말이 꼭 존댓말로 번역되어야만 했을지 살짝 갸우뚱하게 된다. 한국어로 번역된 외국 문학이나 영화 자막을 보면 원문에는 그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말은 반말로, 여자의 말은 존댓말로 번역하는 경우가 잦던데 약간 그런 케이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대사에 나오는 'pussy finger'를 '여자를 녹이는 손가락'으로 번역한 건 좋았다. 기계적인 직역이 아니라 한국어에 있는 표현을 사용하여 한국 관객에게 정확한 뜻을 전달하는 영리한 번역 같다.
아무튼 일라이자가 fuck you를 수어로 할 때 스트릭랜드의 반응이 아주 흥미롭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의 손 언어에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 여자 지금 뭐라 하는 거야!" 그는 거칠게 소리를 지르고 책상을 내리치고, 금방이라도 그녀를 한 대 후려칠 것처럼 사납게 다가간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에 격렬하게 화를 내는 그 모습에 내 나라에 왔으면 여기 말로 하라고 길거리에서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는 이민자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부 백인 꼰대들이 떠올랐다. 그거 굉장히 폭력적인 거 아닌가.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틀을 강요하는 거.
'소련' 스파이인 호프스테틀러 박사 캐릭터도 재미있었다. 러시아인이라는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그는 너무나도 미국적인 이름인 '밥'으로 통한다. 그러나 그는 일라이자에게 정체를 드러낼 때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듯이 자신의 진짜 이름 '디미트리'를 알려준다. 그는 러시아인 윗선이 자신을 '밥'이라고 부를 때도 내 이름은 '디미트리'라고 강조한다. 미국 영화에서 끊임없이 '악의 축'으로 타자화되던 냉전 시대 소련 스파이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자신의 것이 아닌 이름을 말해야 한다는 아픔을 부여한 게 흥미로웠다.
꼭 정체를 감춰야 하는 스파이가 아니더라도 외국에 나갔을 때 내 고유의 이름을 1세계 백인인 '그들'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시카'나 '존' 따위로 바꾸는 경우가 많지 않나. 기예르모 델 토로도 분명 '미국적이지 않은' 이름 때문에 할리우드 생활하면서 고생했던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영화는 쭉쭉 달려 나가고 신은 양서류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으며 또 흑인 여성보다는 백인 남성인 나에 가까울 것이라고 오만하게 말하던 스트릭랜드는 마지막에 자신의 최후를 깨달은 순간 양서류 인간을 보며 말한다.
"넌 정말 신이었군."
누가 감히 신의 모습을 규정지을 수 있을까. 누가 감히 물의 형태는, 사랑의 형태는 바로 이것이라고 힘주어 선언하듯 말할 수 있을까.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게이, 흑인, 여성, 외국인, 장애인이 제대로 된 인간은 나처럼 '사지 멀쩡한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주류 사회의 기득권자에게 맞서 승리하는 영화였으며 인간 여성과 인간이 아닌 양서류 인간의 사랑이 끝내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동화의 결말을 쟁취하는 영화였다.
아가미가 움직이고 온몸이 푸른 물고기 인간과 인간 여성이 섹스하고 사랑을 하는 영화를 보면 동성애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거나 백인과 흑인이, 황인종과 다른 인종이 결합했다고 거북해하는 세상의 시선들이 정말 작고 하잘 것 없게 느껴진다. 동성이건 다른 인종이건 안 될 게 뭐야. 그냥 다 같은 인간인데요.
녹색과 붉은색의 사용법이나 낡은 흑백 TV와 그 TV에 나오는 옛날 프로그램들, 집 아래 있는 오래된 영화관 등 지나간 과거의 것에 대한 향수와 무성 영화적인 연출 등등 세심하게 신경 쓴 것들이 많았다.
이야기 자체가 서두에 자일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면서 '이미 지나간 후'에 그려지는 이야기의 구조를 띄고 있다는 점, 사멸되어가는 종족인 양서류 인간과 옛 프로그램을 즐겨 보며 과거의 사건으로 목소리를 잃은 일라이자, 점점 사라져가는 광고 그림을 그리는 자일스 등 과거에 가까운 인물들과 미래의 색깔인 청록색 차를 타며 우주선 시대를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스트릭랜드의 차이도 흥미로웠다. 이것저것 씹어볼 게 많은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보면서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들지는 못했다. 일반적인 괴수 영화를 뒤집었으며 지금 이 시대에 던지는 시사점도 있고, 배우들의 연기도 빛나며 보석 같은 이미지와 영화적 순간들, 마법 같은 음악이 있었는데도 끝내 '아, 너무 좋아!' 탄성을 내지르며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섬세하더라도 로맨스 영화랑은 안 맞는 걸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 2017)
감독 : 기예르모 델 토로
출연 : 샐리 호킨스, 마이클 섀넌, 더그 존스, 리차드 젠킨스, 옥타비아 스펜서, 마이크 스털버그
촬영 : 댄 라우스트센
음악 :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셰이프 오브 워터 - 기예르모 델 토로.대니얼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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