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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2017) -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안녕!


스포 있음


예쁜 화면이 보고 싶어서 보러 간 영화였는데 그 점은 만족스러웠다. 촬영 감독은 필리페 르 소어드(Philippe Le Sourd).

남부 특유의 스페인 이끼가 늘어진 울창한 나무.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해가 질 때의 붉은빛과 나무의 검은 실루엣, 장미 정원, 이오니아식 흰 기둥이 늘어선 대저택에 아름다운 여자들의 파스텔 톤 드레스와 진주 귀걸이, 섬세한 장신구, 레이스 커튼,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긴 금발 머리카락이 더해져 눈이 흡족했다. 


가끔 화면이 너무 어둡지 않나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른거리는 촛불처럼 부드럽고 꿈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상이었다. 역시 예쁜 게 최고야.


유머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보는 내내 입 밖으로 웃음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꽤 있었다. 사악하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다소 악의적인 유머 감각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있다. 


특히 팬스워스의 여자들이 맥버니를 처음으로 저녁 식탁에 초대했을 때 장면. 맥버니와 함께 하는 저녁을 위해 여자들은 지금까지 입던 수수한 흰색 계통 면 드레스를 집어 치우고 광택이 도는 화사한 새틴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입술색이 짙어지고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온갖 장신구가 튀어나온다. 이렇게 한껏 차려입고 공들여 치장한 여자들이 맥버니와 한 식탁에 앉아 나누는 '애플파이' 대화가 너무 재밌었다.


맥버니에게 잘 보이려고 "애플파이는 제가 만들었어요.", "내가 가르쳐준 레시피지?" "사과는 제가 땄어요." "저도 (당신처럼) 애플파이를 제일 좋아해요."라며 한없이 투명한 대화들이 연달아 이어지는데 웃음을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짜 너무너무 투명하잖아.


그리고 이 대화가 오가는 식탁에서 맥버니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웃는 게 짧게 지나가는데 그 표정이 참 좋았다. 그 순간에 맥버니가 지을 가장 정확한 표정이 아니었을까. 맥버니 역이 배우로서 크게 주목받으며 영화 전체를 훔치는 역은 아니지만 은근히 까다롭고 조금만 엇나가도 망할 수 있는 역할인데 콜린 파렐은 자신의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했다.


애플파이 대화 말고 끝부분에 마리가 "그는 버섯을 좋아해요." 말할 때도 재미있었다. 앳된 얼굴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에이미가 그를 접대할 버섯을 따러 가는 게 어떨까요."라며 차분하게 말하는데 그 겉으로 드러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과 그 속에 깔린 잔인한 의도의 조화가 킥킥거림이 새어 나올 정도로 재밌었다.


장황하게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대사도 없고 대사 자체가 많지도 않은데 있는 대사들이 참 효과적으로 쓰였다. 말 자체는 허공으로 번지며 사라지지만 그 언어가 품고 있는 화살이 가슴에 정확하게 꽂히는 대사. 인물들이 다들 저격수야. 어쩜 그리 정확하게 계산해서 제대로 조준하고 깔끔하게 날릴까. 꼭 헤엄치는 백조 같은 대사였다. 


<매혹당한 사람들>의 인물들은 여간해서는 다들 자기 욕망이나 속내를 노골적이고 거칠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말 자체는 백조의 수면 위 모습처럼 우아한데 그 아래 깔린 건 정신없이 버둥거리는 백조의 수면 아래 모습처럼 우아하지만은 않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게 볼 만 했다.


여성의 시점과 관련되어 얘기가 많이 나오던데 <매혹당한 사람들>(2017)에서 인물을 성적 대상화하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초반에 상처 입고 정신을 잃은 남자의 벗은 몸을 닦아주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부분에 고인 물, 훤히 드러난 가슴팍, 두터운 허벅지 등을 보여준다. 사실 노골적으로 육체를 전시한 장면은 아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노출만으로도 남성의 성적 대상화가 확 느껴져서 신기했다. 여자들이 성적 대상화되는 건 정말 질릴 정도로 많이 나오는데 대상이 남자가 되자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는데도 뭔가 새삼스러워진다.


맥버니가 다리를 잘렸을 때의 히스테릭한 반응도 흥미로웠다. 남자의 다리는 창작물에서 종종 남근을 상징하는데 다리가 잘린 맥버니가 이제까지의 유혹자로서의 번지르르한 모습을 집어치우고 "이제 내가 남자로도 안 보이지!"하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은 어느 정도 남성의 거세 공포증이 투영된 장면 같았다. 자기 다리가 잘린 걸 '내가 네 방에 안 들어가서'라며 신사적인 얼굴을 집어치우고 순식간에 돌변해 여자들을 '썅년'으로 정의내리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2017년의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가장 좋았던 건 무엇보다 마지막에 에드위나의 시선이 죽은 남자가 아니라 팬스워스 학교의 문 밖을 향해 있다는 점이었다. 맥버니가 서로 힘을 합친 팬스워스 여자들에 의해 독살된 바로 다음 씬이었는데 마사 교장이 학생들의 바느질을 봐달라며 "미스 에드위나", 하고 부른다. 이때 에드위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텀을 둔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에드위나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잡고 있고 그 잠시의 공백 동안 관객들은 맥버니의 죽음을 에드위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를 죽인 동료들을 어떻게 대할지 각자 나름대로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에드위나가 입을 열어 대답한다. "네, 미스 마플."


너무나 깔끔한 이 한 마디가 주는 쾌감이 좋다. 이어서 에드위나가 학생들 바느질을 봐주는 장면이 나오고 이 장면은 맥버니가 나타나기 전과 똑같은 '여학생을 위한 팬스워스 신학교'의 일상이다. 이 장면을 통해 결국 에드위나가 간절히 원했던 건 존 맥버니라는 특정한 남자라기보다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었다는 게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사실 에드위나는 존 맥버니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을 거다. 누구든 그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직접 보지 못했지만 돈 시겔의 1971년 작 <비가일드>는 남자에 대한 사랑에 더 무게가 쏠린 것처럼 나온다는데 이 부분만 보자면 에드위나 자신의 욕망에 방점이 찍힌 코폴라 버전이 더 마음에 든다. 동명 소설과 70년대에 이미 영화화된 작품이 있는 이 영화가 왜 2017년에 다시 나올 만 했는지 설득되는 부분이 아닐까.


'마리'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도 좋았다. 마리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살짝 통통하게 나오는데 사실 많은 작품에서 '사립 여학교의 통통한 여학생' 캐릭터는 대우가 좋지 않다. 캐릭터를 한껏 과장해서 희화화시키며 잘 울고, 멍청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묘하게 겉돌고, 손가락에 잔뜩 생크림을 묻히며 탐욕스럽게 케이크를 집어삼키는 장면 같은 불쾌하고 창작자가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집어넣는 전형적인 장면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피터 위어의 <행잉록에서의 소풍>(1975)도 흥미롭게 본 작품이지만 솔직히 통통한 여학생 캐릭터 이디스를 다루는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형적인 '사립학교의 통통한 여학생'에 대한 불쾌한 묘사 그대로 나온다. 그놈의 지저분한 케이크 먹기 장면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보티첼리의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란다나 다른 친구들의 신비로운 행방불명에도 오직 통통한 이디스만이 끼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볼썽사납게 헐떡이며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뛰어내려오지 않던가.


하지만 <매혹당한 사람들>(2017)의 마리는 수많은 '사립학교 여학생물'에서 관습적으로 희화화되는 전형적인 통통한 캐릭터가 아니다. 초반부터 마리의 캐릭터성은 확실하게 나온다. 맥버니에게 잘 보이려 자기 진주 귀걸이를 가져다 낀 걸 에드위나가 지적하자 주눅 들어 눈물을 글썽거리기는커녕 당돌하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선생님도 평소보다 꾸미셨잖아요, 다들 그러는걸요." 하며 맞받아친다. 


그 장면을 보며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팬스워스 여자들의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는 버섯을 좋아해요." 하는 거 보고 속으로 박수쳤다. 장르적으로 게으르고 불쾌한 전형적인 묘사로 범벅되기 쉬운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그려내지 않는 게 좋았다.


이동진 평론가가 <매혹당한 사람들>에 대해 "공동체를 유기체처럼 다뤄낸다. 그 유기체가 외부로부터의 이물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려낸다."라고 한 줄 평을 남겼던데 공감된다. 


맥버니라는 병균이 침투하자 펜스워스 신학교 유기체는 그에 영향을 받고 에드위나처럼 감염되는 세포도 있었지만 결국은 '버섯'이라는 백신으로 병균을 퇴치한다. 마지막 장면은 학교의 철문 안에 모든 여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모습이다. 이때 여자들은 철문 안에 있고 카메라는 철문 밖에 있다. 이 장면까지 왔을 때는 외부의 시선인 카메라까지 자신들의 공동체 밖으로 쫓아낸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사실 보기 전에는 <미저리> 같은 영화를 기대했었다. 뭔가 격정적이고 자극적이고 강렬하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본 <매혹당한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영화는 아니었다. MSG 없이 잔잔하게, 오로지 미묘한 뉘앙스와 남녀의 은밀한 파워 게임을 투명하게 묘사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소품이었다. 


다소 심심하고 다루고 있는 주제의 풍부함이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서스펜스는 부족하지만 대신 긴장하지 않고 복잡한 생각할 필요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꿈처럼 아름다운 화면을 감상하다 상쾌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올 수 있는 깔끔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영화에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화된 여성의 시선이 느껴지는 게 좋았다. 여전히 여성을 너무 쉽게, 아무런 고민 없이 대상화하거나 아예 여성의 존재를 스크린에서 삭제하고도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영화들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여성의 시선을 가진 작품은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자꾸만 이 영화를 방어하고 싶어지고 냉정한 비평에는 하지만... 하며 자꾸 토를 달고 싶어지는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분명 나에게는 2017년에 극장에서 본 영화중에 가장 마음 편하게 낄낄거리면서 본 영화였다. 소피아 코폴라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매혹당한 사람들 (2017)

감독 : 소피아 코폴라

주연 : 니콜 키드먼, 키얼스틴 던스트, 엘 패닝, 콜린 파렐

촬영 : 필리페 르 소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