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 본 영화중에 제일 웃기네
1월에 에릭 로메르의 가을 이야기(1998)를 보면서 그 미묘한 엇갈림과 투명한 사랑 소동에 킥킥거렸는데 사프디 형제의 세 번째 장편 연출작인 굿타임을 보면서는 계속 폭소했다. 좀 비뚤어지고 다소 신경질적인 유머 감각을 자극한다.
결코 건강한 웃음은 아니고 보통 때라면 웃어도 되나? 싶을 장면인데 빠른 속도감과 핸드 헬드 카메라의 박진감에 실려서인지 이상하게 마구 흔든 탄산음료의 거품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코니와 레이가 놀이공원의 야간 경비원을 때려눕히고 레이가 "깨어나도 기억 못할 걸"하며 경비 입에 페트병의 LSD를 콸콸 부어주는 장면, 나중에 깨어난 경비원이 경찰에게 놀이공원에 침입한 부랑자로 오인 받지만 약에 취해서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는 장면 같은 것에서 미친 듯이 웃게 된다.
그러다 그 좌충우돌 기괴한 하룻밤의 모든 소동이 일단락되고 코니가 그렇게 되찾으려 했던 동생 닉의 얼굴이 다시 화면에 나타날 때는 나도 모르게 조용해진다.
지적 장애가 있는 닉이 '그에게 맞는 곳'이라며 시설로 인도되어 '방 건너가기' 놀이를 하는 엔딩 크레딧씬에서는 더 이상 웃음이 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웃기다고 깔깔거리던 게 무색해지며 숨죽여 그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2. 돈, '그들'의 시스템에서는 백전백패
나중에 교도소에 갇힌 닉은 할머니와의 전화 통화에서 형제가 은행 강도를 한 건 동부 해안에 자신들이 함께 살 농장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닉은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형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코니와 닉 형제는 저 현기증 나고 냉혹한 뉴욕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돈'을 택한 건데 이들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자본주의 시스템과 돈을 두고 겨루어서 좋은 꼴을 볼 리 없다.
형제는 실리콘 가면을 쓰고 은행에 가 창구 직원에게 '총을 가지고 있다, 가방에 6만 5천 불을 넣어라'라고 적힌 종이쪽지를 내민다. 직원은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자신이 담당하는 창구에서 보관하고 있는 돈을 전부 가방에 넣는다. 그 돈은 6만 5천 불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항의하는 얼치기 강도에게 은행 직원은 침착하게 쪽지에 적는다. '그게 다예요. 규정이라.'
은행가들은 한 바구니에 많은 달걀을 넣지 않는 것처럼 한 창구에 많은 돈을 보관하지 않는 것이다. 코니는 그렇다면 안에 있는 금고에서 더 많은 돈을 꺼내 오라고 한다. 그 결과 은행 직원은 강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금고 안으로 들어가고 가방에 돈을 담아 나온다.
형제는 그 가방을 받아 은행을 나온다.
해냈다고 좋아하는 와중 돈 가방에서 붉은 색소탄이 터진다.
결국 여차여차 동생 닉은 경찰에 잡히고 코니는 이제 훔친 돈으로 뉴욕을 떠날 수 있는 농장을 사기는커녕 닉을 감옥에서 꺼낼 보석금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붉은 색소에 물든 돈은 더 이상 돈이 아니다. 보석보증인은 그 지폐를 '쓰레기'라 일축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돈을 다른 놈에게 빼앗기느니 그 누구도 쓰지 못할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만큼 강하고 인정사정없다.
이 차갑고 피도 눈물도 없는 시스템 속에서 코니는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보려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모두 헛수고로 끝나며 설상가상으로 상황은 그가 처음 있던 곳에서 점점 더 악화되기만 한다. 꼭 세상이 '안녕, 움직일수록 넌 더 나빠질 거야!'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움직일수록 나빠지는 세상. 그게 이들이 사는 세상이고 동시에 스크린 밖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 않을까. 그런데 더 끔찍한 건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다는 거고.
가장 먼저 코니는 부족한 보증금을 모으기 위해 성인임에도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여자 친구 코리를 꼬시는데 그녀는 부자 어머니의 경제력에 의존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르고 달래고 화도 내는 설득 끝에 코리가 어머니의 신용 카드로 부족한 보증금을 내려하나 결제가 되지 않는다. 코리의 어머니가 카드를 정지시킨 거다. 코리는 어머니와 통화하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다. "나도 좋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코니는 보석보증인에게 부족한 돈을 구해오겠다고 먼저 낸 돈이라도 일단 돌려받으려 하지만 보석보증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내 돈이고 내 금고에 있을 거야."
코니가 아무리 임기응변에 능하고 폭주하는 것 같은 에너지로 쉬지 않고 맹렬히 움직여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몇 수 아래다. 시스템은 그가 갈 수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계산에 둔 것 같다. 그러니까 일탈마저도.
질주하던 그 밤이 거의 끝나갈 무렵 동생을 물건 훔치듯 빼오는 것도 실패하고 다른 사람이 놀이공원에 숨긴 검은 돈을 찾는 것도 실패한 코니는 이제 페트병에 담긴 LSD를 팔려고 한다. 레이의 소개로 약을 사러 온 남자에게 1만 5천 달러를 요구하지만 그는 이 시간에 1만 5천 달러를 어디서 구하냐고 한다. 범죄를 막는다는 미명 하에 현금 인출기에서 한 번에 1천 달러 이상 꺼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 돈을 꺼내는 건데도 이들은 은행이 문을 여는 9시 30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남자는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만 코니는 기다릴 수 없다. 그는 다른 판로를 찾아 떠나려다 레이와 다투게 되고 결국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잡힌다. 코니가 경찰에게 잡혀 차로 호송되는 동안 경찰을 피해 고층 아파트 외벽으로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던 레이는 끝내 추락한다. 그리고 퍽, 하고 뭔가 으깨지는 소리.
3. 코니, 넌 누구야?
굿타임의 오프닝은 백발의 상담사와 닉의 대화를 보여준다. 상담사는 닉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알에서 부화하기 전에 닭을 세지 마라는 무슨 뜻이지?" "고양이와 쥐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지?" "소금과 물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나지?"
닉은 상담사가 자기의 대답을 듣고 종이에 글을 적는 게 신경 쓰인다. 그는 뭘 쓰냐고 상담사에게 묻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싫다고 한다. 그는 소금과 물이라는 질문에 '해변'이라 답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윽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닉의 형 코니가 거칠게 등장하고 그는 상담사에게 벌컥 화를 낸다. "왜 내 동생 울려? 너도 울고 싶어?"
코니는 상담사가 말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닉을 데리고 시설을 빠져나간다. 그는 동생을 껴안고 다짐하듯 말한다. "세상엔 너랑 나 둘 뿐이야."
그 후로 은행 강도 씬이 이어지고 닉이 경찰에게 잡혀간 뒤로는 닉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한 코니의 한밤의 소동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그런데 영화가 전개될수록 문득 이상한 의문이 떠오른다.
코니는 누구지?
코니는 영화 내내 현란하게 얼굴을 갈아 끼운다.
지적 장애 동생을 시설에서 허락도 없이 데리고 나가는 깡패 같은 형에서 다음 장면에는 둔탁한 이목구비의 실리콘 가면을 쓴 은행 강도가 된다. 이어서 빨간 색소탄 때문에 새빨갛게 물든 얼굴이 되고 자신보다 신체 나이는 많아 보이지만 정신 연령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 여자 친구를 어르고 화내 돈을 우려내는 기둥서방처럼 등장한다. 닉을 병원에서 빼내기 위해 간 병원에서는 병실 앞을 지키는 경찰에게 죽어가는 아버지와 병실에서 악몽 같은 밤을 보내는 아들로 나타나고 휠체어를 탄 남편과 함께 있는 여자에게는 아픈 동생을 돌보고 밤새 야간 근무 중인 어머니를 기다리는 짠한 형으로 다가간다. 수배를 피해 짙은 머리를 밝은 금발로 염색하고 TV에 나온 자기 얼굴을 못 보게 하기 위해 열여섯 살 여자애의 유혹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밤의 모험 내내 그는 끊임없이 변신한다. 경찰을 속이기 위해 놀이공원 야간 경비원의 유니폼을 훔쳐 입고 커다란 개에게 개 주인의 코트 냄새를 맡게 해 주인 시늉을 하기도 하며 나중에는 마약 딜러까지 된다.
이 휙휙 바뀌는 변신을 홀린 듯 지켜보다 어느 순간 코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저 사람은 누구지?
이상하게 영화 내내 코니의 얼굴을 봐왔는데도 저 사람이 형으로서 동생 닉을 나름대로 아낀다는 것 밖에 모른다. 이상한 허깨비 같기도 하다.
닉은 다르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했다가 카메라가 코니 위주로 붙으면서는 슬며시 사라진 닉은 허깨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특히 오프닝에 닉이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뭔가 마음 깊이 스며들어 그의 존재를 어떤 환상이나 환영 같은 걸로 쉽게 오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코니의 경우는 좀 이상하다.
카메라 가득 담긴 그의 얼굴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데도 뭔가 허상 같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코니의 진짜 욕망, 그가 정말로 바라는 것, 아무리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그가 왜 저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는지 인간으로서의 그를 알 수 있는 게 없다. 관객에게 보이는 건 그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쉬지 않고 변신한다는 것뿐. 변덕스러운 파도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과 상황을 헤쳐 나가는 저 분주한 움직임과 저 쉴 새 없이 갈아 끼우는 가면 아래 뭐가 있는지, 아니, 뭐가 정말로 있긴 한 건지 혼란스럽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코니의 저 요란한 밤이 일종의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꿈에서는 변신이 자유롭다. 어떤 이상한 상황도 꿈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머릿속에 붕붕 떠다니는 생각이 언어로 잘 정리되지 않아 딱 잘라 코니의 밤이 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 아닐까?' 하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의심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코니는 정말 누구일까.
4. 그들에게 맞는 자리
오프닝에서 코니는 닉을 울리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시설에서 닉을 빼낸다. 그는 동생에게 넌 저기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은행 강도짓이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때 코니는 강조하듯 힘을 주어 동생에게 말한다. "봐, 네가 없이 내가 이걸 성공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현란한 네온사인의 밤이 지나고 밝은 대낮처럼 보이는 어느 시점의 엔딩에서 닉은 다시 지적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있다. 그는 '형은 나를 사랑하지만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할머니와 함께 있다. 상담사에게서 닉을 빼냈던 코니와 달리 할머니는 닉을 상담사에게 넘긴다. 백발의 상담사는 닉에게 '코니는 코니에게 맞는 곳으로 갔으며 너도 너에게 맞는 곳에 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곳이 닉에게 좋고 닉을 모두 반갑게 맞아줄 거라고 한다. 상담사가 닉을 안내한 곳은 지적 장애인들이 다 같이 모여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하는 교실이다. 닉은 거기서 질문에 따라 방을 건너가는 '방 건너가기' 게임을 한다.
자세한 전사가 나오지 않아도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형제에게 저 뉴욕이라는 도시가 잘 맞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닉의 말대로 그들은 은행을 털어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그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농장을 사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훔친 돈으로 가고자 했던 곳이 어디든 질서 정연한 세상은 코니는 (아마도) 감옥으로, 닉은 지적 장애인을 위한 시설로 보내 버리고 그들이 모두 '자기에게 맞는 곳'으로 갔다고 단언한다.
이 명쾌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처사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원하는 자리에 가려고 그렇게 온갖 발버둥을 쳤는데 움직일수록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는 세상이라니. 그리고 결말의 감옥과 시설은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일종의 격리가 아닌가. 세상에서 자기들이 붙인 라벨대로 분리시켜 버린 게 아닌가. 둘을 그렇게 감옥과 시설로 보내 버리고 '맞는 자리'에 갔다고 말하는 그 깔끔함이 칼날처럼 서늘하게 마음을 벤다.
굿타임 (2017)
감독 : 조슈아 사프디, 베니 사프디
출연 : 로버트 패티슨, 베니 사프디
촬영 : 션 프라이스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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