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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M (1931) - 군중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태도


오락적 재미를 기대한 작품이 아니었는데 예상 밖으로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구조적으로 단단하게 잘 쌓아올린 영화라는 인상도 들었는데 실제로 프리츠 랑 감독은 건축을 공부했었다고 한다.


<M>에서는 아이들만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이 나온다. 시민들은 공포와 마녀사냥의 집단 광기에 휩쓸리고 경찰은 살인마를 잡기 위해 도시 전체를 이 잡듯이 수색한다. 경찰들의 이런 물 샐 틈 없는 수사에 범죄조직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조직의 내로라하는 보스들이 모이고 자신들의 손으로 범인을 잡기로 결심한다.


어느 정도의 악이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구조가 선을 넘는 존재로 인해 깨지고 다시 원래의 구조로 돌아가기 위해 악당들이 힘을 합치는 건 <다크 나이트>(2008)에서 기존의 공권력을 뛰어넘어 움직이는 초월적 자경단원 배트맨 때문에 고담의 (어두운) 질서가 무너져 고담 시 갱단 보스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다.


거지들을 동원한 촘촘한 감시망에 마침내 범인이 걸려들고 범인은 조직원들에게 쫓겨 어떤 건물에 몸을 숨긴다. 조직원들은 우르르 몰려가 건물을 수색하고 마침내 범인을 잡아낸다. 여기까지 도시를 점령하고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광기에 대한 묘사가 볼만하다.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을 휘파람으로 흥얼거리는 연쇄 살인마의 광기, 빗발치는 고발과 서로에 대한 의심, 마녀사냥으로 드러나는 시민들의 광기, 정연한 논리를 설파하며 악이 악을 잡기로 결정하고 한 건물을 미친 듯이 수색하는 악당들의 광기.


이 광기 속에서 범죄자들은 폐공장에 모여 자신들의 손으로 아동 살해범을 심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제각각의 광기들이 인물의 입을 빌려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광기의 논리성이라니. 그러면서 이 영화가 단순히 연쇄 살인마와 그것을 추적하는 자들을 다룬 스릴 넘치는 볼거리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커다란 목표를 가진 작품이라는 게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을씨년스러운 폐공장 지하에 우글우글 모인 수많은 범죄자들은 한목소리로 범인을 죽여야 한다고 외친다. 죄인들은 어린아이들을 죽인 살인마 앞에서 집단으로 뭉쳐 심판자가 되려 한다. 자신들의 검은 손으로 악을 심판하고 말겠다는 욕망이 들끓는다.


이 도시의 범죄 조직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고 뛰어나다 인정받는 악당 슈랭커는 검사처럼 냉엄하게 말한다. 범인은 너무 위험한 존재다. 전체 사회를 위해 그의 위험함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나 법의 손에 맡기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신병원에 있다 나았다는 보증을 받고 풀려나거나 탈출할 것이고 그럼 다시 아이들을 죽이기 시작할 것이다. 번들거리는 긴 가죽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우아하게 낀 슈랭커는 말한다. 그러니 저 자는 죽어야만 한다.


범인도 항변한다. 그는 자신을 심판하려는 악당들을 가리키며 너희의 악은 너희 스스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만 내 안의 악마성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울부짖는다. 자기 안의 악마를 견디지 못해 정신이 부서진 그는 어느 순간 마치 대자연처럼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거대한 악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린 일종의 희생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재판의 형식을 취하기 위해 마련된 살인마의 변호사도 나선다. 그는 범인을 몰아붙이는 슈랭커가 네 명의 사람을 죽이고 도망 중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런 당신도 있는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행동 때문에 자격도 없는 범죄자인 우리가 한 인간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행위를 책임질 수 없는 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변호사는 주장한다. 이 자는 법의 손에 맡겨야 하며 그가 가야 할 곳은 정신병원이라고.


폐공장 지하에 모여든 악당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른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봤냐고, 저 자는 죽어야만 한다고. 죽이자! 곳곳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잔뜩 흥분한 악당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동 살해범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행동이 일제히 멈춘다. 터질 것처럼 뛰쳐나오던 악당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그들은 항복하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올리고 긴 테이블의 한가운데 앉아있던 슈랭커조차도 체념한 듯 마지막으로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악당들을 바라보던 살인마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얻는다. 공권력이 도착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공권력을 형상화하여 전시하지 않고 악당들의 모습으로만 공권력의 존재를 그려내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굳이 수많은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강력계의 덩치 좋은 로만 형사가 파이프를 물고 나타나는 모습 같은 걸 보여주지 않아도 악의 반응만으로도 관객은 충분히 공권력을 실감할 수 있다.


<M>을 보며 이렇게 장면을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효과를 거두는 훌륭한 장면이 많다고 느꼈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느끼게 하는 장면들. 특히 첫 부분은 주술적인 감각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도끼를 든 남자가 아이들을 살해하는 내용의 노래가 영화를 연다. 동그랗게 모여 끔찍한 노래를 부르며 손가락으로 한 명씩 지목하며 살해당할 순서를 정하는 아이들. 엄마는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기다리고 뻐꾸기시계는 아이가 돌아올 시간을 알린다. 그러나 아이는 오지 않는다.


그때 아이는 살인마에 대해 알리는 벽보에 공을 튀기며 놀고 있었고 벽보 위로 범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범인은 아직 얼굴 없이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집에 있는 엄마는 점점 더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 온몸을 속속들이 죄여드는 불안감. 시간은 계속 흐르고 엄마는 마침내 바깥을 향해 목 놓아 아이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한다. "엘시! 엘시!"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들. 아무도 없는 계단, 흰 빨래가 걸린 텅 빈 다락방, 아이가 결코 먹지 못할 점심, 풀밭 위로 굴러 나오는 아이가 가지고 있던 작은 공, 전봇대 전선에 걸렸다 날아가는 범인이 아이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사준 기괴한 모양의 풍선.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어린 엘시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장면이 적나라하게 나오지 않아도 오직 저 장면만으로도 관객은 아이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애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불필요한 폭력의 전시 없이도 더 깊게 마음에 와 닿는다.


또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 내내 등장하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첫 장면에 동그랗게 모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부감이고 또다시 아이가 살해되었다는 호외를 알리는 신문팔이에게 빽빽하게 모여드는 군중의 모습도 부감,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살인범에 대한 기사를 읽는 사람들, 마녀사냥을 하는 군중들, 밤거리를 수색하는 경찰들 등등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찍혔다. 왜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반복되는 내려다보는 장면들을 보며 어느 순간 카메라가 군중을 내려다보는 게 개미 떼를 내려다보는 인간의 시선처럼 느껴졌다.


<M>은 관객을 영화 속 세계로 빨려들게 하려는 목표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악당들이 옥상을 하나하나 뒤지는 장면을 추격자인 악당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대신 어둠 속에 숨은 범인의 모습을 집요하게 잡으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상황에 더욱더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처럼 서스펜스와 스펙터클을 자아내는 장면들은 있다. 그러나 관객이 이 도시의 광기에 동화되게 만들지는 않는다.


<M>의 카메라는 관찰하듯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관객은 카메라와 함께 이 도시를 내려다보며 개미 떼처럼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이들의 광기에 완전히 동화되어 거기에 같이 휩쓸리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광기를 지켜보게 하는 지점이 있다. 한 발짝 떨어져 집단의 광기를 지켜보는 시선. 이 관찰하듯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는 도시를 통해 프리츠 랑은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을까? 관객이 자신의 영화 속 군중들을 관찰하며 무엇을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모든 일이 지난 후에 영화를 보는 미래의 관객은 그 시대의 역사와 영화를 결부시키려 한다.

프리츠 랑이 이 영화 <M>을 만들던 그해 1930년 9월 14일, 히틀러의 나치 정당은 투표에 의해 독일의 제2야당이 되었다. 감독은 다가오는 거대한 전체주의의 불온한 공기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군복을 입고 하나의 상징이 새겨져 휘날리는 깃발과 광장에 가득 찬 수많은 군중들의 뜨거운 환호성으로 가득 찰 악을.


나치가 태동하던 시기, 파시즘의 전조가 어른거리는 시대. 프리츠 랑의 영화에서 모여 있는 군중들은 결코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못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들 속에 섞여 그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걸 거부하고 거리를 두고 떨어진다. 그들 밖에서 그들을 지켜본다. 카메라의 이런 태도를 자꾸만 곱씹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범인은 법에 의해 선고를 받지만 그 선고가 사형인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법의 판단이 내려진 후에 상복을 입은 세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이런다고 아이가 돌아오지는 않아. 우리는 아이를 잘 지켜야 했어."라고 말하며 끝날 뿐이다.


잃어버린 아이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복을 입은 부인이 기어이 울음을 뚫고 그 말을 하지 않던가. 우리는 잃기 전에 아이를 잘 지켜야만 한다고. 그러나 독일은 그들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M (1931)

감독 : 프리츠 랑

출연 : 페터 로레, 오토 베르니케, 구스타프 그륀트겐스

촬영 : 프리츠 아르노 바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