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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애니 홀 (1977) - "우리에겐 계란이 필요하니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다소 왜소한 남자가 카메라를 보고 말한다.


"오래된 농담이 있어요. 두 할머니가 휴양지에 있죠. 한 사람이 말했어요. "여기 음식은 정말 끔찍해".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죠. "맞아, 그리고 양도 너무 적어". 이게 바로 내가 삶에 대해 느끼는 본질입니다. 외로움, 비참함, 고통, 불행으로 가득 차 있죠. 그리고 모든 게 너무 빨리 끝나요."


삶에 대한 부조리한 농담으로 시작한 영화는 40대 코미디언인 유대계 남자 앨비 싱어가 애니 홀과 헤어진 후 그녀와의 관계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내용이다.


신경증적인 유머와 프로이트적인 실언과 꿈(wife와 life, 앨비 '싱어'와 '가수' 앨비스 프레슬리), 두 사람이 함께했던 삶의 눈부신 순간, 다채로운 연출, 남녀 관계의 시작과 절정, 위기와 재회, 결별이 마음에 스며드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7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깔끔하게 어우러져 있다.


제목은 '애니 홀'이지만 영화의 주인은 우디 앨런이 연기한 '앨비 싱어'다. 앨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카메라는 시종 일관 앨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애니 홀은 결국 앨비의 눈으로 보는 애니, 앨비라는 사람의 렌즈를 통과한 애니인 셈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애니는 영화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앨비의 시선에 포착되면서 등장한다. 꼭 그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앨비 싱어 시야 밖의 애니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앨비가 곁에 없을 때 애니의 모습, 애니의 학교생활 같은 것도 오로지 앨비의 말을 통해 앨비의 관점으로만 접할 수 있다.


결국 영화 <애니 홀>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자신의 시선과 관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자기가 만난 여자를 자기 시선으로 보여주며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 나름의 교훈을 얻는 영화다. 솔직히 이런 구조 자체가 일부 남자 문청들이 습작기에 큰 고민 없이 너무 많이 쓰는 구조라 좋아하기는 좀 어려웠다. 대개 의식 없이 여성을 타자화하며 과장된 자기 연민이나 얄팍한 자아 과시로 점철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애니 홀은 그런 설익은 습작 소설들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샤프하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는데 하나만 꼽자면 랍스터 소동 장면 이후 앨비와 애니가 같이 바닷가를 걸으며 애니의 전 남자들을 회상할 때 삽입된 짧은 장면이 좋았다. 두 사람은 함께 애니의 기억 속을 돌아다니며 전 남자친구들과 있는 애니의 모습을 보는데 <이터널 선샤인>(2004)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기억 속을 돌아다니다 다시 현실의 저물어가는 해가 있는 바다 풍경이 나타나는 부분. 이 때 화면에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만 들린다.


"저 남자 별로지?"

"그래. 당신은 운이 좋아. 내가 와 줬잖아."

"오, 정말? 글쎄, 라디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저물어가는 붉은 해가 보이고 바다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다. 그리고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걸어가며 이것들을 담는 카메라도 흔들린다.


이 장면에서 다이앤 키튼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라-디-다'가 정말 음악적으로 들린다. 다른 근사한 장면들도 많지만 이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보려던 영화가 시작한지 2분 되었다는 말에 영화를 처음부터 볼 수 없다면 차라리 극장에 들어가는 걸 포기하는 앨비의 모습도 공감되었다. 암, 그렇고말고. 영화를 중간부터 보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설령 제목을 포함한 초반 2분뿐일지라도.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칠 수 없으니까.


또 영화관에서 큰 소리로 침을 튀겨가며 펠리니의 영화에 대해 설파하고 마샬 맥루한을 끌어들이며 잘난 척 떠드는 남자를 견디다 못한 앨비가 당신은 남이 쓴 평만 늘어놓는다며 마샬 맥루한에 대해 뭘 아냐고 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콜롬비아 대학에서 'tv와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라고 응수한다. 이때 앨비는 주눅 들지 않고 갑자기 화면 바깥에 있던 진짜 마샬 맥루한을 데려온다. 마샬은 남자에게 당신은 내 연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며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치는지 이해 못하겠다고 한 방 날린다. 그 광경을 보며 앨비는 "인생이 이렇기만 한다면야!" 하며 즐거워한다.


이 장면이 굉장히 유쾌했는데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렇게 잘난 척 떠들어대는 사람 때문에 말도 못하고 괴로웠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 없고 진짜 자기 머리로 한 생각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을 늘어놓으며 '내가 이런 걸 안다'를 과시하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그들이 들먹이는 권위자들을 데려와 넌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야! 라고 날려주는 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꿨을까.


IMDB 트리비아를 보니까 원래 우디 앨런은 마샬 맥루한이 아니라 영화감독인 페데리코 펠리니나 루이스 부뉴엘을 등장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케줄이 맞지 않아 마샬 맥루한이 영화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쩐지 영화에 대해 잘난 척 떠들어대는 사람에게 창작자인 감독이 직접 나타나 넌 내 영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떠들고 있어! 하며 속 시원하게 눌러주는 게 아니라 이론가인 마샬 맥루한이 나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했다. 영화에 대해 혼자 잘난 척 떠드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은 상황에서 그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이 아니라 곁가지로 동원된 학자 마샬 맥루한은 아무래도 제대로 펀치를 날리는 게 아니라 살짝 돌아가는 느낌이 있으니까. 


영화 <애니 홀>은 배우가 카메라를 보며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지나가는 엑스트라가 마치 상황을 다 아는 것처럼 주인공에게 대사를 던지며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고 이중 노출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앨비와 애니의 관계를 묘사하다 마지막 장면에 이른다.


결별한 뒤 시간이 흐르고 친구로 만난 두 사람이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각자의 길을 간다. 이 때 애니의 노랫소리가 깔리며 앨비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앨비는 말한다.


"한 남자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말했죠. "형이 미쳤어요.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물었죠. "왜 형을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남자가 말했어요. "그러면 계란을 못 낳잖아요."

남녀 관계도 그런 것 같아요. 비이성적이고 광적이고 부조리하죠. 하지만 어쨌든 계속 사랑을 할 거예요. 우리에겐 계란이 필요하니까."


농담으로 시작한 영화는 너무나 근사한 농담으로 스스로를 마무리 짓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보다 더 적확한 농담이 있을까.

솔직히 <애니 홀>은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는데 이 마무리 때문에 내 안의 평가가 조금 더 높아졌다.


앨비가 누구인가. 그는 삶은 외로움, 비참함, 고통,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데다 너무 빨리 끝난다고 부조리한 농담을 내뱉는 사람이다. 끔찍하게 맛없는데 양이 적은 음식이 자신이 바라보는 인생이라며 영화를 열었던 사람이다. 


또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 때문에 어머니 손에 잡혀 병원에 갔다. 어린 앨비는 의사에게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우주는 팽창하고 언젠가는 터질 것이니까. 엄마는 그건 아주아주 먼 미래의 일이고 너와는 조금도 상관없으니 숙제나 하라고 답답해한다. 엄마는 브루클린은 절대 터지지 않아! 라고 고함을 지르고 의사는 사는 동안에는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지만 앨비에게는 둘 다 그다지 통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그는 여전히 세상에는 오직 끔찍한 부류와 비참한 부류가 있을 뿐이라 믿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직 '죽음'과 관련된 책들만 선물한다. 그랬던 인물이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의 만남과 이별의 긴 여정을 거치고 영화에 끝에 다다랐을 때 말한다. 

그래도 계속 사랑을 할 거라고.


앨비가 갑자기 세상을 꽃밭으로 보기 시작했다거나 180도 확 돌아 긍정적인 낙관주의자로 변모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마지막 농담이 말해주지 않는가. 자신이 닭이라고 믿는 미친 형과 그 형이 낳을 달걀을 기다리는 동생. 물론 형은 닭이 아니니 동생은 자기가 바라는 계란을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앨비는 남녀 관계가 이처럼 비이성적이며 광적이고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그는 자신과 애니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데 그 연극의 결말은 두 사람이 다시 재결합하는 '해피엔딩'이다. 실제 앨비와 애니의 이야기와는 다른 결말이다. 그는 그런 동화 같은 결말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 완벽하기만 한 연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앨비에게 삶의 온갖 달콤한 환상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 같은 것은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하는 미치광이가 낳을 계란 같은 것인 셈이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계란.


하지만 그런 게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아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앨비는 한 발 더 나아간다. 한층 성숙해진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알면서도 담담히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을 할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꿈꾸는 계란, 완벽하게 이상적인 것들이 삶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주어지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앨비는 계란을 꿈꾼다. 이건 그런 계란을 진짜로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계란을 바라는 것이나 계란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아예 모르는 진짜 미치광이처럼 불가능한 계란을 믿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란을 꿈꾸는 것이 더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꿈꾸는 것.


왜 우리는 계란을 꿈꾸는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삶의 달콤한 약속들을?


왜냐면 우리에겐 계란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



애니 홀 (1977)


감독 : 우디 앨런

주연 : 우디 앨런, 다이앤 키튼

촬영 : 고든 윌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