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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7 )-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홍상수의 신작 제목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 졌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니, 너무 좋잖아.

 

월트 휘트먼의 시 'On the beach at night alone'에서 따온 제목이 주는 마법적인 감각과 정서에 반쯤 홀려 있다가 이어서 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는 그냥 두 손을 들었다.

 

감독이 연필로 직접 쓴 흰 손글씨와 긴 검은 머리가 흐트러진 김민희의 묘한 얼굴, 그 뒤에 비치는 푸르스름한 바다까지.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건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다음에는 슬그머니 이 영화를 피하고 싶어졌다. 영화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 당시 온갖 말이 나오던 감독과 주연 배우의 시끄러운 스캔들에서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알고 싶지 않은 남의 속사정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영화를 보기는 봤지만.

 

홍상수의 열아홉 번째 장편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주인공 영희가 제목 그대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있는 장면은 없다. 독일과 강릉의 해변에 있을 때 그녀의 곁에는 선배 언니가 있고 그녀를 깨워주는 행인이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영희의 물리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심정적인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이 영화에서 말 그대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있는 건 어쩌면 인물이 아니라 카메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에 서 있던 영희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어깨에 들려 실려 간다.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본다. 영희는 점점 더 멀어지고 화면은 어두워진다. 그렇게 1부가 끝나는 것이다. 어쩐지 영희가 사라지고도 카메라는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 같다는, 그러니까 정말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부의 마지막에서는 영희가 누군가에게 들려 가는 게 아니라 행인이 '이러다가 큰일난다'고 깨워준 덕에 일어나 자기 발로 해변을 떠나간다. 이때도 카메라는 떠나는 영희를 그 자리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이제 해변을 떠날 것처럼 보이는데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줌 같은 걸 이용해서 멀어지는 그녀를 어떻게든 잡으려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2부가 끝나고 영화가 끝난다. 또 다시 왠지 모르게 카메라가 여전히 계속 그 자리에서, 영희가 사라진 후에도 밤의 해변에서 혼자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그런 장면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영희가 떠나갔는데도 카메라가 재빨리 주인공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가만히 응시하는 장면들. 그 덕에 관객들은 아무도 없는 화장실 문 앞이나 강릉에 있는 예술 극장 복도의 빈 의자 같은 걸 잠시 보고 있어야 한다. 노란 봉봉 방앗간이 있는 골목 앞에서도 그렇고. 왜 카메라는 빨리 영희를 따라가지 않고 거기에 잠시 남아있어야만 했을까?

 

혼자 궁금해 하는데 문득 이 장면이 생각났다. 강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2부에서 영희는 노란 봉봉 카페 앞에서 혼자 조용조용 노래를 부른다.

 

 

"바람 불어와 어두울 땐, 당신 모습이 그리울 땐, 바람 불어와 외로울 땐, 아름다운 당신 생각. 잘 사시는지, 잘 살고 있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었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었는지."

 

 

 

어쩌면, 영희가 떠나고도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카메라는 어쩌면 영희에게서 흘러나온 마음의 흔적을 응시하는 게 아닐까? 영희에게서 흘러나와 그 자리에 고여 있는 마음을 비추는 건 아닐까? 보이지 않는 마음을 카메라가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담아내는 건 아닐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영화의 주인공인 영희는 카메라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영희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거나 멀어질 때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카메라를 보다보면 카메라가 관객도 아니고 그 어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영희에게 나의 존재를 알아 달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카메라는 그녀가 떠난 빈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영희에게 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오직 카메라의 방법으로 그녀에게 간절히 말하는 건 아닐까.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라고.

 

 

[블루레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 - 10점
홍상수 감독, 송선미 외 출연/에프엔씨애드컬쳐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7)

 

감독 : 홍상수

출연 : 김민희

촬영 : 1부 박홍열 / 2부 김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