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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소공녀 (2017) - 지금 이 세상에서 한 줌의 취향을 지킨다는 것


스포 있음


주인공 미소는 가사 도우미다. 일당은 많지 않고 집에 쌀이 떨어져서 친구에게 혹시 남는 쌀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새해가 되면서 방값이 오르고 담뱃값도 오른다. 방값은 5만원 더, 담배는 2천원 더.


돈이 부족해진 미소는 이제 지금의 삶에서 무언가를 빼야만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미소는 결코 놀지 않는다. 그녀는 남을 등쳐먹지 않고 착취하지도 않는 건강한 노동을 한다. 지금 이 시대 한국에서는 왜 노동하는 사람이 아주 아주 작고 소박한 삶, 영화의 영제이기도 한 '미미한 서식지(Microhabitat)'를 영위해 나가는 것도 불가능할까?



그러나 영화 속에서도,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이 상황 자체는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열심히 일하는데도, 딱히 엄청나게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무언가를 자꾸만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내 임금만 빼고 다른 모든 것이 오르고 일하는 사람이 작은 자기 공간과 한 줌의 취향을 누릴 수 있는 삶을 꾸리기가 어렵다는 이 흔하디흔한 상황에서 영화 소공녀는 '세상의 기준'과 조금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결단의 순간, 검은 펜을 들어 가계부에서 위스키를 지우려던 미소는 펜을 돌려 방값을 지운다.


이어서 영화는 위스키와 담배를 남기고 방을 버린 미소가 10년 전 같이 밴드 활동을 했던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는 걸 보여준다. 미소의 친구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30대가 된 이들이 어떻게 서울이란 공간에서 생존해나가는지 각기 다른 생활의 면면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소공녀(2017)는 보는 내내 관객이 이 영화가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영화라는 걸 외면하거나 맘 편히 망각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영화는 내 일상에서 먼 곳이 주는 야릇한 낭만이 끼어드는 외국 영화도 아니고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과거의 거대한 역사를 다루는 영화도 아니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환상의 세계로 달아나는 영화도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공간을 보면서 입에서 끊임없이 '나 저거 알아'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정말로 알 것 같았다.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고 집이 아니라 딱 잠만 잘 수 있는 '방'.

밥벌이를 하는 미혼 여성이 자신의 취향으로 꾸며 놓은 공간.

좁고 초라한 부엌이 있는 허름한 연립 주택.

젊은 부부가 신혼살림을 꾸리기 위해 20년의 대출을 안고 산 크지 않은 아파트.

부모님이 오래 전에 마련하신 걸로 보이는, 나이 든 캥거루족 아들이 얹혀사는 칙칙한 색감의 단독 주택.

높은 돌담이 둘러싼 서울에 있는 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널찍한 마당이 있고 처음 가면 머릿속에 쉽게 내부 구조가 그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방과 긴 복도가 있는 집.

그리고 끝없이 계단을 오르고 올라가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게 숨 막히는 방들까지.

언젠가는 내가 살았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었다.


인물도 그랬다.

대기업에 다니며 점심시간을 틈 타 여자 휴게실에서 밥보다 이게 낫다고 링거를 꽂는 사람.

시부모님을 모시고 윤기 없는 삶을 살며 결혼하면 생전 안 보고 싶던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사람.

내 월급이 190인데 집 대출 원금과 이자가 합해서 한 달에 100만원씩 나간다. 20년 동안 매달 100만원, 그렇게 20년이 지나야 이 집이 내 것이 되는데 그때 되면 집이 낡았겠지? 하며 자조적인 넋두리를 내뱉는 사람.

나이 든 아들에게 여자인 친구가 찾아온다고 진수성찬을 차리고 호구조사를 하며 어떻게든 여자를 며느리로 주저앉히려는 늙은 부모.

부자 남자와 결혼해 자신과 친정에 대한 지원이 끊이지 않도록 자기 자신은 지우고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끊임없이 신경 쓰는 사람.

돈 많은 나이 든 남자들에게 스폰서를 받으며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

웹툰 작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번번이 공모전에 떨어지고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며 나도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현실적인' 밥벌이를 위해 꿈을 포기하는 사람.

이 사람들을 알았다.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감독이 미소에게 어떤 결말을 줄 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성 없는 판타지여도 좋으니 미소가 제발 죽지만은 않기를, 정말로 처절하게 찢기고 부서진 모습으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기를 빌게 되었다. 영화의 톤과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익숙하다는 듯이 자동적으로 아주 나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결말을 지켜보았는데 생각보다 단단한 엔딩이었다.


새치가 있던 미소는 머리가 더 이상 하얗게 변하지 않게 도와주던 한약을 끊어 백발이 된 머리로 여전히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새파란 어둠 속에서 붉은 불빛을 빛내며 거인처럼 우뚝 서 있는 수많은 빌딩들과 맞은편에 마치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작은 주홍색 텐트를 보여준다. 그 텐트 안에서는 작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지금까지 영화를 지켜본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비치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 속 미소는 쉽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그녀는 뜨거운 분노와 격렬한 투쟁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그저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세상이 이것이 '정답'이고 '상식'이라고 얘기하는 기준과 달라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뿐이다.


미소는 머리끈을 이마에 질끈 둘러메고 세상이 뭐 이러냐고 거리로 달려가 짱돌을 던지거나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 내내 끝까지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 그녀를 보면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정말 이것이 투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방값이 오르고 담뱃값이 오르면 방을 포기한다.

위스키의 가격이 올라도 위스키는 포기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선택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선택을 무르지 않을 뿐인데, 미소는 가지고 있는 옷을 온통 겹겹이 껴입고 낡은 캐리어와 초라한 짐을 끌고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전전할 뿐인데 점점 그녀가 아주 단단하고 쉽사리 지지 않는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짱돌과 화염병이 아니어도 그녀는 자신의 존재로 세상 전체와 맞서는 것 같다. 남들처럼 방이 없어도, 그럴 나이가 아닌데 너무 일찍 백발이 되더라도. 나는 끝까지 위스키와 담배를 즐길 거야, 하며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


취향을 포기하면 짐승이 되는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벼랑 끝에 밀려서 딱 나 자신이나 피가 섞인 내 가족 이 정도만 생각하며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하는 삶.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 세상을 넓혀주는 것에도 마음의 문을 닫게 되지 않나.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면 괴물이 되어 버리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지닌 한 줌의 취향이 그깟 위스키, 그깟 담배가 될 수 없어진다. 이것들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전선이 되어버린다. 이것들마저 잃으면 정말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인간은 너무 약하고 깨지기 쉬워서 인간의 삶에 오로지 생존만이 남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괴물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미소가 끝까지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 게 단순히 철없는 짓으로 느껴지거나 남들에게 민폐라고 혀를 차게 되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인간을 벼랑까지 몰아붙이며 압박하는 거대한 사회에서 끝까지 무너지지 않으려는 자의 존엄성마저 느껴진다.



자신만의 취향이 있고 그것을 쉽게 내던져 버리지 않는 것 말고도 미소가 '무언가가 되려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좋았다. 새삼 생각해보면 많은 창작품에서 적지 않은 인물들이 꼭 무언가가 되려고 한다. 마치 지금의 자신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무언가가 되지 않는 게 잘못된 거고 이상한 것처럼.


그러나 미소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무언가가 되지 못한' 사람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미소는 결코 안정적이고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한' 사람,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 제대로 된 집을 장만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미소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도 하지 않는가.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낭만적이고 코믹한 장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소공녀(2017)를 그냥 '힐링'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30 흙수저를 다룰 때 마지막에 가서는 '너네 이런 거 기다렸지?' 지레짐작하며 짠! 하고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했답니다!'하고 끝내거나 보는 사람들이 너무 괴롭지 않게 최소한의 안전망을 보장하고 앞으로의 미래가 나쁘지 않을 거라는 가능성을 슬쩍 내비치며 한 줄기 빛 같은 희망을 뿌려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렇지는 않다.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이는 생명수당이 주어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고 미소가 그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스케치북을 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솔이가 새삼 '사우디아라비아 일상툰' 같은 것으로 성공할 거라는 가능성의 장면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마지막의 미소도 흔들리는 백발과 불빛의 실루엣으로 보여줄 뿐 관객이 쟤가 정말 잘 있구나, 안심하고 확신을 내릴 수 있게, 스러지지 않은 존재로서의 미소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게 스크린 가득 미소의 얼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욱 더 인물의 앞날이 너무 차갑지 않기를, 너무 잔인하지 않기를 조용히 바라게 된다. 거대한 빌딩들의 맞은편에 작은 텐트를 친 미소가 부디 앞으로도 위스키와 담배를 누릴 수 있기를, 버티기 힘들만큼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영화 초반, 사랑을 나누려고 겹겹이 껴입은 옷을 하나하나 벗다가 방이 너무 추워서 "우리 봄에 하자"하고 가만히 부둥켜안던 연인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결국 봄이 와 제대로 사랑을 나누기 전에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이 서글펐다.


소공녀는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온 해의 겨울이라며 정확한 시간대를 제시하는데 이 해의 담뱃값 인상 말고도 이 영화가 어느 해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지 영화의 시간대가 개인적으로 확 다가오는 장면이 또 있었다.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는 장면.

바로 그해 2015년 초였던 것 같다. 그 때 치 떨리게 싫었던 대통령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청년 일자리 해법으로 '중동을 가라'고 지금은 수인번호 503이 된 그 당시의 대통령이 했던 말.


어떻게 한 국가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자국의 젊은 세대에게 그걸 실업난에 대한 대답이라고 내놓을 수 있지.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조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숨이 막히고 절망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평생 공모전도 대학도 다 떨어지고 생전 처음으로 뭔가에 지원해서 합격한 게 생명수당이 붙을 정도로 위험하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라는 것이 단지 영화 속 한솔이 개인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 같지 않다. 꼭 한솔이가 아니어도 그때 젊은 세대가 지원해서 거부당하지 않고 붙을 수 있던 유일한 곳이 그 당시의 대통령이 그렇게 소리 높여 말하던 '중동 가라'였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는 아니었지만 보고 나서 <백만엔걸 스즈코>(2008)가 생각났다. 어떤 점이 닮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일본에서는 젊은 여성이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혼자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로 방값을 내고 먹을 걸 사고 그러면서도 따로 '백만 엔'이라는 돈을 모은다는 설정이 가능했지만 소공녀의 미소에게는 그런 설정 자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게 자꾸 떠오른다.


물론 두 영화 사이에는 10년의 시간이 있고 일본에서도 이제 아르바이트로 생계유지가 가능한 프리터족 시대는 끝났다지만, 또 무엇보다 두 영화의 지향점도 달라 여러모로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왜 오늘 날 한국의 미소는 그럴 수 없는지, 왜 스즈코와 달리 '백만 엔'을 쥘 수 없는지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차이가 그 나라의 창작품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미소는 그저 빚 없는 인생, 노동 후의 위스키, 담배, 사랑하는 사람. 딱 이것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하는데 왜 그만큼만 누리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들까.


그래서 미소의 선택이 정말로 '바람직한' 선택이냐고 묻는다면 단숨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영화가 꼭 바람직한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소공녀의 가치는 방과 위스키 중에서 선택하라면 방을 선택하는 사람이 대다수고 그 선택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그게 당연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그 사람의 다른 선택을 보여주는 것에 있는 거 아닌가.


'또 2030 흙수저 독립영화냐'는 냉소적인 말에는 좀 속상하고 왠지 모르게 화도 나지만 쉽게 반박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소공녀는 오랜만에 내가 극장에서 내 돈 내고 보기 잘했다고 생각한 한국 영화였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온 뒤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미소처럼 방을 버리고 짐 가방을 끌며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삶의 최전선에 굳건히 서서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지키는 사람들이 스크린 밖에도 존재한다는 걸 안다.


밥을 한 끼 덜 먹더라도 한 권의 책을 사는 사람, 교통비를 줄여서라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사람, 팍팍한 생활비를 어떻게든 쪼개서라도 전시회를 가고 공연을 보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


내 상상력은 빈곤해서 그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그리기 어렵지만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 다른 무엇보다 한 줌의 취향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마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비록 한 명의 개인으로서는 서로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연결되지 못한 채 밤하늘의 별처럼 각자의 자리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큼은 안다.


영화 속 한솔이의 말은 꼭 미소가 아니더라도 바로 그 사람들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우리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함께 있다고."


그리고 다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공녀 (2017)

제작 광화문시네마

각본/감독 : 전고운

출연 : 이솜, 안재홍, 강진아, 김국희, 이성욱, 최덕문, 김재화, 조수향, 김예은

촬영 : 김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