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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프랑스 영화처럼 (2016) 보고 이런저런 잡담


타임 투 리브, 맥주 파는 아가씨, 리메이닝 타임, 프랑스 영화처럼이라는 네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시간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는 게 네 편을 아우르는 접점이라고 한다. 네 편의 영화를 보다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간다.



타임 투 리브


타임 투 리브는 암에 걸린 어머니가 네 딸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앞으로 3일만 살다가 평화롭게 죽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이들이 앞으로 어떤 3일을 보내게 될 것인지 그러면서 서로의 관계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가 궁금했는데 그냥 필터를 잔뜩 씌운 것처럼 화사한 색깔의 시골을 다섯이서 함께 걸을 뿐 영화는 '엄마가 죽기 전에 모녀가 함께 보내는 3일'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인물들끼리의 대화를 통해 엄마가 장애아동 교육에 헌신하느라 자기 딸들은 챙기지 못하고 딸들에게 상처를 줬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남편들의 사업 문제로 갈등이 있다, 셋째 딸은 넷째 딸인 막내 동생을 유학 보내려 했는데 막내가 가지 않았다, 등등의 전사가 툭툭 튀어나온다.


물론 앞으로의 시간인 '3일'을 다루면서 이 과거들이 튀어나오는 건데 결과적으로는 이 3일을 제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엄마와 네 딸들의 관계(과거)와 암에 걸린 엄마가 존엄사를 결정하고 마지막 3일 동안 딸들과 함께 펜션에서 묵으며 시간을 보내려 한다는 상황 설정만 남는 것 같았다. 단편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그 이상을 다루지 못하고 설정만 늘어놓다 끝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이 설정을 듣고 내가 보고 싶고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재미있었던 장면은 엄마가 앞으로 3일만 살다 가겠다는 결심을 얘기했을 때 딸들 중 하나가 "엄마 권사잖아."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기독교인이니까 자살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건데 그냥 '엄마 권사잖아'라는 이 함축적인 대사가 너무 한국적으로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네 자매의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대화할 때는 괜찮았다.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 하는 대사는 자매들끼리 충분히 있을 법하고 할 만한 말을 현실감 있게 하는데 이상하게 대사가 없을 때 자매들의 모습은 뭔가 자매라고 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이상하게 들어온 장면은 막내와 다른 언니들의 모습이었다.

사실 막내 혼자 고기 구울 때 얄미운 셋째 언니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앞에서 깐죽거리기만 하는 건 있을 만한 장면이라 생각했다. 그건 분명 그들의 성격을 보여주고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엄마, 큰 언니, 둘째 언니, 셋째 언니 다 같이 있는 장면에서 또 막내 혼자만 서서 수박을 자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태평하게 앉아 있는 건 이상해 보였다.


물론 다른 딸이 수박을 챙겨서 엄마에게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막내가 바로 앞에서 혼자 서서 일하고 있는데 언니들이 자기 일은 아닌 양 내버려두고 자기들은 그냥 그 주변에서 편하게 자리 잡고 앉아 있기만 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보여서 이상했다. 그 장면은 그들의 관계성이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도 아니었고 그냥 3일 중의 한 순간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보통 자매끼리는 저런 게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지 않나?


또 이상해 보였던 건 첫째 딸만 엄마와 함께 침대에서 자고 다른 딸들은 남은 방에 모여 바닥에 요 깔고 주르륵 누워 자는 모습이었다. 자리가 부족해서 한 명만 엄마랑 침대에서 잘 수 있는 거라면 돌아가면서 자던가 할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곧 돌아가실 엄마와 함께 잘 수 있는 이틀 밤을 다 큰 언니가 독차지한다. 꼭 침대는 당연히 큰 언니 자리인 것처럼.


나이 서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이라면 저 집 가풍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는데 막상 재산 분할하는 걸 보면 장녀라고 더 받거나 막내라고 덜 받는 거 없이 똑같이 나눠 받는다.


뭐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현실 자매인 나랑 동생2 관계를 생각해 보면 타임 투 리브의 네 자매들 모습은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어딘가 이상해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대사를 할 때는 괜찮다. 대사를 할 때는 현실의 자매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매들끼리 대사하는 장면이 아니라 그냥 영화의 배경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처럼 깔려 있는 장면들은 이상하게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장면들은 진짜 자매보다는 왠지 모르게 서열 잡힌 군대 문화 느낌에 가깝게 느껴진다.




맥주 파는 아가씨


밤새 영업하고 아침에 문 닫는 조그만 맥줏집에서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영업시간 동안 두 명의 구애남들에게 시달리는 내용이다. 고통 받는 아르바이트생은 씨스타의 다솜이 연기했다.


술집에서 나누는 남자들의 대화는 너무나 투명하고 현실감 넘치는데 알바생인 다솜의 모습은 다소 작위적이다. 다솜의 연기가 작위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녀에게 주어진 대사와 설정이 작위적이라는 뜻이다.


저 상황에서 이런 일에 이골이 난 프로 알바생이 저렇게 곧이곧대로 남자들 말에 대답 다 해주고 옆에 앉으란다고 앉으면서 받아주고 있을까. 말도 섞기 싫고 내 에너지를 털끝만큼이라도 저쪽에 투자하기 싫을 텐데.


저런 상황에서 장사에 방해는 안 되게 아, 예 하며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자기만의 스킬도 쌓였을 텐데 영화의 알바생은 이 모든 것이 지겹고 한심하다는 얼굴이면서도 대사를 주고받고 극을 진행시키기 위함인지 남자들과 이래저래 말을 섞는다. 진짜 현실의 여자였다면 심지어 손님도 아닌 구애남2가 가게 들어와서 질척거리며 말 하고 싶은 말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의도였든 과연 네, 해보세요 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현실적인 남자들의 치근거림과 일방적인 구애, 술을 잔뜩 마신 아저씨들의 징그러운 대화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알바생에게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관객에게도 고통스러운 밤의 시간이 지나간다.


마지막에 다솜이 "자기 진심은 알아달라면서 왜 내 진심은 보지 않냐"고 구애남2에게 뺨을 날리기는 하는데 그냥 이런 내용의 영화 찍어서 관객한테 보여줄 거면 적어도 알바생이 맥주잔으로 대가리 내리치는 장면 정도는 보여줬으면 좋겠다.


도대체 이건 뭘 위한 영화야? 보다보면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내가 이렇게 날카롭고 예리한 눈으로 현실을 투명하게 잘 포착해낸다는 증명? 같은 하룻밤이지만 당신이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보내는 시간과 그곳이 일터인 사람이 보내는 시간은 다르다고? 당신 구애가 상대에게는 진상이라는 걸 알라고? 어차피 아는 사람은 이런 거 안 봐도 알고 모르는 놈은 이런 거 봐도 '아 거참 아가씨가 까칠하네~' 이런 속 터지는 소리나 늘어놓고 있을 텐데.


마지막에 뺨 한 번 치는 걸로는 앞의 장면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수두룩 빽빽하게 겪고 주변에서 흔하게 보는 일인데 왜 이걸 영화에서까지 이런 식으로 봐야 돼. 알바 했을 때 꼭 저런 식으로 번호 달라고 껄떡거리던 유부남이랑 그 외 기타 등등이 떠올라서 보는 게 너무 짜증났다.


생각 없는 쌈마이 B급 영화를 너무 싫어하는데 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훌륭한 예술적 의도로든 여자들 고통 받는 거 구구절절 자세하게 늘어놓는 영화보다는 그냥 뇌가 없는 B급이어도 여자들이 맥주잔으로 무례한 인간들 대가리 깨부수는 영화가 관객1인 내 정신 건강에는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진심 보다가 화병 날 뻔.




리메이닝 타임


네 편 중 제일 재밌게 봤다.

워킹데드 글렌으로 유명한 스티븐 연이 나오는데 사전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봐서 얼굴 나왔을 때 좀 놀랐다.


3년간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 여자 부모의 반대에 부딪치고 설상가상으로 점쟁이에게는 둘이 붙어있으면 둘 다 죽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점쟁이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둘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100일 뿐.


남자와 여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대화를 나누고, 다투고, 또 대화를 나눈다. 100일 간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같이 죽을까, 아니면 일 년에 두 번씩 시간을 쪼개서 그렇게 몇 십 년을 만날까.


재미있는 건 남자가 교포라는 설정이라 둘이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이 대화가 너무너무 재미있다. 두 가지 언어를 왔다 갔다 하며 말하고 한 문장에도 영어와 한국어가 마구 섞이는데 서로 다른 두 가지 언어가 뒤섞이며 나오는 맛이 있고 리듬이 있다.


감탄했던 건 자칫하면 굉장히 작위적이고 안 좋은 의미로 '아, 연기하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대사인데 스티븐 연과 소이 둘 다 이걸 죽은 대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로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찾아보니 소이의 말에 따르면 대본은 있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애드립이었다고 한다.


리메이닝 타임은 네 편의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봐서 끝날 때는 아쉬울 정도였다. 다른 단편들과 달리 이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연인은 2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데 신연식 감독은 '실제로 배우들과 2년 후에 연결해서 찍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세월이 흘러 장편으로 만들고 싶었다는데 보이후드(2014)가 나와서 그 기획은 포기한 것처럼 말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도 재밌게 봤지만 그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이 이야기와 저 연인들이 앞으로 어떻게 뻗어나갈까, 어떻게 발전할까 궁금한데. 무척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프랑스 영화처럼


흔히 '호구'라는 한 단어로 쉽게 정리하고 넘길 수 있는 인물에게 그 사람만의 목소리와 생각, 시선을 주는 영화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 쉽게 인간을 한 단어로 정리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좋았다.


새벽 3시에 비가 오니까 네가 보고 싶다고, 빨리 오라는 여자의 말에 밤새 서울 거리를 뛰어서 그녀의 집까지 가는 시간 동안 남자는 그녀와의 첫 만남,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국의 밤풍경을 흑백으로 담은 장면들이 참 좋았다. 내가 아는 거리들의 모습이 해가 지고 사람들도 사라진 밤에 너무나 아름답게 담긴 것 같았다. 그 장면들을 보며 장면에 정서가 담겨 있다는 게 뭔지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 영화처럼

각본/감독 : 신연식

출연

a time to leave : 이영란, 신지수, 이새별, 이도아, 전지윤, 후지이 미나, 정한비

+포미닛의 전지윤이 막내딸로 나오는데 영화 볼 때는 못 알아봤다! 나중에 출연진 이름 찾다가 포미닛 지윤인 걸 알았다.

맥주 파는 아가씨 : 다솜, 정준원, 이광훈

a remaining time : 스티븐 연(연상엽), 소이, 전경수

프랑스 영화처럼 : 신민철, 다솜

촬영 : 최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