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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킬링 디어 (2017) - 소년은 말했다. 이게 가장 정의에 가깝다고. 그런데 이게 진짜 정의일까?


영화 <킬링 디어>를 다 보고 나면 이런 물음이 생긴다.

그래서 마틴은 뭘 원했던 걸까?

스티븐의 의료 실수로 죽은 아버지의 복수?


영화는 친절하게도 그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순간을 만들어준다.

스티븐의 잘못에 왜 우리(나-나의 딸-나의 아들)가 희생되어야 하냐는 애나의 질문에 소년은 말한다.

"이게 가장 정의에 가까워요."


마틴은 정의라고 말했다. 그리고 복수와 정의는 서로 섞일 수도 있지만 똑같은 건 아니다. 복수와 정의는 분명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스티븐의 딸 킴이 (왜 나를 거부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그래?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도 마틴은 말한다. 화가 난 게 아니야. 그가 안쓰러운 쪽이지. 그리고 그는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한 킴에게 불쾌감을 표한다. 이해한 줄 알았는데… 짜증나게.


마틴은 스티븐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그저 스티븐에 대한 마틴의 복수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가 대개 복수라고 넘겨짚고 가는 마틴의 영화 속 행위에 대해 마틴은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지 않던가. 이게 가장 정의에 가까워.


그렇다면 또 다른 물음이 생긴다. 이게 정의인가? 이걸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마틴이 한 행동은 무엇인가? 아니, 영화 속에서 그가 한 것처럼 비춰지는 행위는 무엇인가?


먼저 스티븐이 한 짓부터 보자. 의사인 스티븐은 마틴의 아버지를 수술할 때 술에 취해 있었다. 마틴의 아버지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영화에서 마틴의 아버지는 스티븐의 의료 실수로 죽은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스티븐 자신이 죽은 환자의 아들인 마틴을 만나고 용돈을 주고 시계를 선물하고 자기 가정에 초대하기도 한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마치 마틴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가 마틴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그러나 마틴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스티븐이 불편함을 느끼는데도 연락 없이 병원에 찾아가고 스티븐이 자기 엄마의 새로운 남자가 되길 원한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이제 당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듯이.

당신이 파괴한 것을 당신이 채우라는 이 요구를 스티븐은 거부한다. 그는 마틴의 엄마를 밀어내며 자기는 가정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마틴에게 어느 정도 연민과 책임감을 느끼지만 그들이 자기 때문에 잃은 것, 마틴의 아버지, 마틴 어머니의 남편이 되어 줄 생각은 없다.


그런 스티븐을 보고 마틴은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당신이 부순 것을 당신이 채우지 않겠다면 내가 잃은 만큼 당신도 잃어라.


스티븐의 아이들이 하나씩 다리가 마비되고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검사를 해보지만 의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기묘한 상황. 마틴은 시리도록 파란 눈으로 스티븐을 바라보며 설명한다.



"당신도 나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내 가족을 죽였으니 당신 가족도 죽는 거예요."


그리고 소년은 빠르게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마비, 두 번째는 거식증, 세 번째는 안구 출혈.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당신 스스로 당신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 당신이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이다. 오직 당신만 빼고.


스티븐과 그의 가족들은 각자의 방법대로, 각자의 템포대로 이에 발버둥 치며 저항하지만 끝내는 스티븐이 총을 들고 가족들을 한 자리에 앉힌다. 몸을 묶고 입을 막고 얼굴을 가린 채.


스티븐은 스스로 죽일 자를 결정 내리지 못하고 룰렛을 돌리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방향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빙글빙글 돈 다음 총을 쏜다. 두 번의 빗나감 끝에 세 번째에 가족 중 가장 어린 아들 밥이 죽는다.




마틴이 말한 대로 스티븐은 자기 손으로 자기 가족을 죽였다. 그가 그 하얗고 깨끗한 손으로 마틴의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다시 한 번, 이것을 정의라 말할 수 있는가?

마틴이 스티븐에게 한 요구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었다.


첫째, 네가 파괴한 것을 네가 채워라.

둘째, 내가 잃은 것을 너도 잃어라.


첫 번째 단계는 얼핏 정의로운 것처럼 보인다. 손실과 결여를 그것을 일으킨 자가 보상하는 것.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보다 자신이 하는 보상을 크게 생각한다. 스티븐은 아버지를 잃은 마틴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같이 산책을 해주고 시계를 주고 자기 가족에 초대하고 같이 영화를 보는 걸로 보상하려 한다. 그런데 아버지를 잃은 소년에게 그게 진짜 보상이 되는가? 스티븐은 마틴의 요구, 아버지를 대신해 내 어머니의 남자가 되라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마틴의 요구가 불편할 뿐이며 자신이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내가 왜? 내가 왜 내 가정을 잃어가며 그래야 돼? 소년의 가정을 부숴놓고 그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잘못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타인의 슬픔을 정말로 자신의 것처럼 느끼지 못한다. 마틴이 잃은 것을 스티븐이 채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마틴의 정의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덧셈이 안 되면 뺄셈으로. 채울 수 없다면 내가 잃은 것을 너도 잃어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래 전 함무라비 법전처럼.


소년은 내 가족이 죽었으니 너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다고 한다. 이것이 정의에 가깝다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이게 정말 정의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함무라비 법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가. 왜 이 논리적으로 깔끔하고 단순명료한 조항은 이제 현대법에서 찾아보기 힘든가. 그저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어서? 죄인을 징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을 보기 때문에?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오늘날의 인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정의라고 불리는 것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차갑고 명료한 산술이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는 내게 너무 이상한 영화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를 사랑하고 숭배할 수는 없다. 이 영화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냥 쉽게 '난 이 영화 싫어', 하고 넘겨버릴 수 없게 만든다.


만약 킬링 디어에서 마틴이 하는 게 복수였다면, 아버지를 잃은 복수를 한 거였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걸리지 않았을 거다. 복수에는 한계가 없다. 복수인데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아버지를 죽인 스티븐이 자기 손으로 가족을 죽이게 하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복수의 이름에서는 순조롭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마틴이 이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순간 영화를 더 이상 쉽게 흘러 보낼 수 없게 만든다.


저게 정의라고?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거부감을 느끼면서 그렇다면 왜 나는 이것을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왜 마틴의 저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내게 정의란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다. 불의는 인간이 인간성을 잃은 상태에서 생겨나며 이때 정의는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된다. 우리가 괴물이 되었을 때 정의는 괴물을 인간으로 되돌리려 한다. 나에게 정의는 복수나 처벌, 응징 이상의 것이다.


스티븐은 환자의 심장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도 술을 마셨고 결국 그 수술로 마틴의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가 마틴의 가족이 자기 때문에 무엇을 잃었는지 진심으로 이해했다면, 약간의 죄책감과 자신이 귀찮지 않을 정도의 책임감만이 아니라 정말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처럼 느꼈다면 이후 이어진 가족들의 마비와 거식증, 죽음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슬퍼하는 자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븐은 그러지 못했고 이후 마틴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정의에 가까운' 일을 한다. 가족들 중 하나를 네 손으로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는다. 이것이 정말로 가장 정의에 가까운지 아닌지를 논하기 전에 마틴의 이 정의로 스티븐이 인간으로 회복되었는지 보자. 나에게 정의는 괴물을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의 인간성이 회복되었다면 마틴의 정의는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살아남은 가족들, 스티븐과 아내 애나, 딸 킴은 마틴이 자주 가던 식당에 간다. 그들은 왜 거기 있는가?




마틴을 보기 위해, 혹은 그들을 마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그저 '마틴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 장면은 좀 이상하다. 그 식당에 앉아있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보다 안전하게 마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이 가족은 굳이 스티븐과 마틴이 만나던 식당으로 향했고 거기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마틴이 오자 잠시 후에 식당을 떠난다. 이 장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마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식당에 간 것처럼 보인다.


소름이 끼친다.


밥이 죽은 후 가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셋이서 함께 자기들을 마틴에게 보여주러 갔다. 동생이 심장에 총을 맞아 피를 쏟아내고 죽은 후인데 킴은 새빨간 케첩을 흥건하게 뿌려 아무렇지 않게 감자튀김을 집어 먹는다. 셋이서 함께 있는 가족은 깨지지 않았다. 밥이 그렇게 죽었는데, 살기 위해 '나만 빼고' 다른 자를 죽이라는 메세지를 온갖 방법으로 전했던 이들이 여전히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한다. 그리고 마틴에게 보여준다. 우리 가족은 붕괴하지 않았어.


마틴은 내가 잃은 것을 너도 잃으라고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틴의 가족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밥의 죽음으로 스티븐의 가족도 붕괴되었는가? 이 여유롭고 세련된 부유한 가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마틴의 아버지, 어린 밥의 죽음에 가슴깊이 슬퍼하기 보다는 걷고 움직이고 식사를 하며 이제 '마틴의 저주'가 끝났다는 것에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수식적인 계산은 그렇게 끝난다. 너도 가족 하나를 잃었고 나도 가족 하나를 잃었다. 그러니 이제 끝. 결국 괴물은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했고 마틴의 정의는 실패했다.


그렇기에 수식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수식으로 다가가면 결국 수식만이 남는다. 계산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 하기 때문이다. 마틴의 아버지의 죽음과 밥의 죽음이 등가로 교환될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는 순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도나 슬픔은 논리적인 계산의 잉여나 부속물이 되어 버린다.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살아남은 자들끼리 냉혈한 계산으로 끝나버린다.


영화를 곱씹어 볼수록 마음에 걸리는 건 킬링 디어가 관심 있었던 것은 결코 정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애초에 배우들을 인간으로 그릴 생각이 없었다. 란티모스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감정이 거세된 자들처럼 높낮이가 없는 대사를 로봇처럼 수행한다. 그들의 대사는 평범한 것도 아주 이상하게 느껴진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에서 그리스 신화의 에우리피데스 상황을 가져왔는데 그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야심만만하게 찍은 장면은 스티븐의 가족들이 스티븐에게 서로 자기 말고 다른 가족을 죽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특히 킴의 '사랑하는 아버지, 가족들을 위해 나를 죽이세요'(다른 가족들을 죽이고 나를 죽이지 마라)' 간청과 필사적인 탈주를 시간을 섞어 화려하게 편집해놓은 장면을 보면 정말 신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화를 보면 킬링 디어에서 가장 사악하고 악의적으로 그려진 건 마틴의 아버지를 죽인 스티븐이나 스티븐의 가족에게 이상한 저주를 내린 것처럼 보이는 마틴도 아니고 킴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킴이야말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를 이해하는 핵심 인물일 지도 모른다.


보통 '무고한 희생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킴을 감독은 왜 이런 사악한 존재로 만들어야 했는가? 동생이 피를 쏟아내며 죽은 후 피처럼 붉은 케찹을 뿌려 감자튀김을 먹고 뭔가 스산한 표정인 아버지나 어머니와는 달리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마틴을 보며 묘한 미소 아닌 미소를 짓는가.



란티모스가 관심 있었던 것은 인간의 추악한 민낯을 보여주는 장면들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란티모스의 세계에서는 세 명의 제물 후보들이 다른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스티븐이 차마 가족을 죽일 수 없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감독은 그런 인간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그는 인간성을 조작된 신화처럼 생각하며 자신의 인간들을 영화 속에서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것에 몰두하는 것 같다. 이미 첫 장면부터 그는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부분, 마음을 상징하는 심장을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것처럼 서늘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처음부터 정의가 실현되는 게 불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정의를 묻는 영화가 내게는 달갑지가 않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가 란티모스의 영화를 보면 감독이 자신의 냉철함에 취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같은 생각이다.


물론 킬링 디어는 근사한 영화고 란티모스의 새 영화가 나오면 나는 극장 앞에 서 있겠지만 그의 영화를 도무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킬링 디어 (2017)

원제 :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 콜린 파렐, 배리 코건, 니콜 키드먼, 래피 캐시디, 서니 설직

촬영 : 티미오스 바카타키스

음향 : 쟈니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