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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2018) - 상상 속 '욕망의 field' 밀회에서 라크로스 경기장에서의 진짜 키스로


스포 있음


동생 2가 재미있다고 해서 할 일 없는 심심한 날에 봤다.


아시아계 여성이 주인공이며 짝사랑 전문인 주인공은 좋아했던 남자들에게 보내지 않을 러브 레터를 쓰는데 이 편지가 어떤 사건에 의해 남자들에게 배송된다는 기본 설정만 알고 시청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도 되기 전에 놀라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잠깐, 남주가 언니 전남친이야????



이웃집에 살며 가족처럼 지내는 조시, 오랫동안 친구였던 조시, 언니 애인이었지만 이제 막 헤어진 조시가 이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인 줄 알고 내 안의 유교정신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니 아무리 미국 배경이라도 저긴 할리우드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하이틴 애들 얘기 아니야? 아무리 헤어졌다 해도 친언니 전남자친구가 남자 주인공이라고? 선생님, 이건 저세상 쿨함인 할리우드여도 가쉽지 대폭발 시키는 관계 설정 아닙니까?


콩닥거리는 내 작은 유교 심장이 도저히 이 관계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먼저 본 동생에게 메시지로 조시가 남자 주인공이냐고 물었는데 답이 없었다. 이왕 켠 거 계속해서 봤더니 곧바로 조시 말고 다른 남자도 등장했다. 예전에 친한 친구였지만 지금은 적이 된 젠의 남자친구, 어린 시절 병 돌리기 게임으로 풋풋한 키스를 했던 피터였다.


이번엔 예전 베프의 현남친이야????



친언니의 전 남자친구보다는 낫지만 이번에도 좀 한숨 나오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저 학교에는 남자가 그리 없나. 남주 후보가 한 명은 언니 전남친에 다른 쪽은 어릴 적 베프의 현남친이라니.


그래도 주인공 라라진이 쓴 편지는 다섯 개, 그 중 두 장의 카드가 나왔으니 나머지 세 장에 기대를 걸어보았다. 홈커밍 때 함께 춤을 춘 루카스가 세 번째로 등장하는데 등장하자마자 나는 이 영화의 남주 후보가 아니라는 걸 선언하는 듯 자신은 게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루카스는 로맨틱 코미디에 흔히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안전한 게이 친구'의 위치를 차지해 버린다.


모의 유엔에서 만난 사립학교 학생, 캠프장에서 만난 아이에게 보내진 남은 편지 두 장은 적어도 영화 본편에서는 중요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언니의 전남친인 조시와 예전 베프의 현남친이었다가 전남친이 된 피터 중에 영화는 안전하게 피터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흘러간다. 팽팽한 삼각관계 같은 걸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영화는 조시와 주인공 라라진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언니의 전 남자친구와 묘한 기류를 지나치게 형성하지 않는 건 좋았지만 만약 서로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의 묘미를 기대하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본다면 그 부분은 썩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을 것 같다. '내사모남'은 삼각형이 제대로 형성되기도 전에 '우리는 이쪽으로 갈 거야!' 하고 뚜렷하게 방향 제시를 해주는 느낌이다.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의 빠른 템포를 따라 영화는 축축 늘어지는 것 없이 경쾌하게 라라진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 변화를 그린다. 로맨틱 코미디인 만큼 당연히 주로 다루는 건 라라진과 남자(들)의 관계이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라라진과 가족들의 관계 묘사에도 공들인다. 특히 큰 언니 마고, 막내 키티와의 송-코비 세 자매 합이 좋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이 세 자매가 어떻게 단단한 관계성을 쌓아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내 전 남자친구에게 러브 레터를 보냈다고? 분노하다가도 동생이 '섹스 없는 섹스 테이프'가 찍혔다는 얘기에 언니 모드로 돌아가 몰카 상황을 해결해주는 큰언니 마고와 '난 열한 살이지만 금요일 저녁 약속이 있었어, 난 언니가 아무 약속이 없을 것 같아 취소하고 집에 있는 거야'라는 뼈아픈 대사를 날리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언니를 생각하는 키티도 귀여웠다.



다만 라라진과 피터가 핫텁에서 스킨십하는 몰카가 인터넷에 유포되어 라라진이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피터의 대응은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학교 복도에서 "잘 들어! 라라진과 나는 그 날 아무 일도 없었어! 누군가 이 얘기를 꺼내는 놈은 내가 엉덩이를 걷어 차주겠어!"라고 소리치는 건 정말 눈뜨고 봐주기 힘들었다. 아무리 얘네가 아직 미성숙한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너무 생각 없는 행동 아닌가. 저 상황에서 스캔들의 주인공인 남자애가 학교 한 복판에서 다 들으라는 식으로 저렇게 외치는 건 소문에 불을 붙이는 것 밖에 더 돼? 무슨 전설의 일진님도 아니고 그런 말을 하는 놈은 내가 엉덩이를 걷어 차주겠다니.


정색하고 보면 그냥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부분들도 분명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보기 좋은 영화였다. 사랑을 방해하는 악역은 있지만 영화가 불편해질 정도로 비중이 많지도 않고 견디기 힘든 공감성 수치를 일으키는 장면도 크게 없어 슬렁슬렁 귀엽게 볼 수 있는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다. 적당히 달달하고 적재적소에 유머가 있으며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갖춰야 할 미덕대로 이런저런 관계 소동을 통해 마지막에 여성 주인공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까지 놓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할 수 있지만 직접 운전대 앞에 서면 겁이 나는 운전처럼 나에겐 사랑도 그렇다는 라라진, 초반에는 운전에 자신이 없어 가짜 남자친구인 피터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다니던 라라진이 영화의 후반에서는 직접 자기 손으로 차를 운전해 스스로의 감정을 고백하기 위해 피터에게 가는 것도 다소 뻔하지만 흐뭇했다.


무엇보다 영화 첫 장면에 라라진은 금지된 키스라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언니의 남자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인 조시와 욕망의 'field' 한복판에서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영화가 흐르면서 결말에 성장한 라라진은 진짜 사랑인 피터와 라크로스 경기장 한 가운데에서 상상이 아닌 현실의 키스를 한다. 이때 라라진이 '난 언제나 필드에서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했지만 그게 라크로스 경기장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나레이션을 하는 것도 귀여웠다.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짝사랑 상대를 대상으로 오로지 혼자 상상만 하던 소녀, 현실의 관계에서 두려움을 느끼던 주인공이 용기를 내 현실의 사랑을 쟁취하는 건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또 배우들이 귀여웠다. 주인공 라라진을 연기한 라나 콘도르는 정말 작고 소중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사랑스럽고 피터 카빈스키 역의 노아 센티네오는 훌륭한 피지컬과 편안한 매력으로 미국 인터넷을 흔들어놓았다는 게 이해될 만하다. 조시 역의 이즈리얼 브루사드는 언뜻 라미 말렉을 닮았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얼굴만 보면 피터보다는 조시가 취향이었다.


아시아계가 롬콤의 주인공인데 그걸 가지고 '난 피부색이 달라ㅠㅠㅠ(난 백인이 아니야)' 하는 식의 아시안이라서 하는 정체성 고민 같은 거 없이, 그러니까 아시아계라는 게 고민거리가 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뤄지는 게 좋았다. 아시아계 배우에게 '아시아계여야만 하는 역할'이 아니라 백인일 수도 있는 역할이 주어진 게 기쁘다. 


한국계 미국인인 원작자 제니 한에게 여러 영화사들이 영화화를 제의했는데 대부분 라라진 캐릭터를 백인 여성으로 바꾸자고 했다고 한다. 그런 걸 생각하면 아시아계인 라나 콘도르가 연기한 지금의 라라진이 더욱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2018)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감독 : 수전 존슨

출연 : 라나 콘도르, 노아 센티네오, 이즈리얼 브루사드

촬영 : 마이클 피모그나리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