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 튜더에 대한 특별한 추억은 없다. 소공녀나 비밀의 화원 같은 책에서 가끔 삽화로 접한 적 있을 뿐. 나중에야 '아, 이게 그 사람 그림이었어?' 했던 게 내가 타샤 튜더에 가진 추억의 전부다. 그림을 그리고 정원을 가꾸며 옛날 생활 방식대로 살아가는 유명한 할머니라는 정도만 알았다.
굳이 먼 상영관까지 찾아가 영화 타샤 튜더를 본 건 한 편의 영화로서 기대가 된다기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정원과 타인의 취향이 묻어나오는 인테리어를 큰 스크린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적으로는 큰 기대 없이 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본 뒤에 살짝 한숨이 나오려 했다.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한 편의 다큐 영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104분짜리 영상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TV에서 해주는 KBS 특집 다큐에 뿌연 화면의 일본 감성을 뿌려놓은 것 같다'였다. KBS 특집 다큐가 별로라는 건 아니고 TV 방영용으로 찍은 영상과 극장 개봉 목적으로 찍은 영화는 다르다는 의미다.
기대했던 정원과 인테리어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보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10년에 걸쳐 찍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홍보하던데 사실 후일담으로 타샤의 손자 부부와 두 명의 증손녀를 보여주는 짧은 영상 말고는 대부분 2008년에 사망한 타샤 튜더 할머니 생전에 찍은 영상이다. 10년도 더 된 영상. 그래서 그런지 영상이... 영상이 아름답지 않다... 오로지 영상 때문에 본 영화인데 영상이 훌륭하지 않아. 솔직히 이런 건 영상 맛으로 보는 작품 아닌가. 그게 충족이 안 되면 좀…….
자세한 자료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2018년의 눈으로 보기에는 화질 자체가 썩 뛰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촬영도 왜 그렇게 찍었는지 '느낌적인 느낌'은 알겠는데 내 취향에는 너무 흰색으로 뿌연 화면이었다. 일본 영상물에서 종종 보이던 그 하얗게 뿌연 화면.
정원은 자주 나오는데 물론 정원 자체는 아름답다. 그런데 그 멋진 정원을 다루는 촬영 방식이 썩 성에 안 찬다. 더 훌륭하게 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평이하고 적당히 관습에 젖어 찍은 TV 다큐 스타일이다. 여기서 꽃 클로즈업하고 저기서 넓은 화면으로 타샤 잡고 뭐 이런 식.
인테리어도 기대했던 만큼 잘 보여주지는 않는다. 실내 장면이 적은 건 아닌데 어두워서 가구나 소품 배치를 제대로 보기 어렵다. 마지막에 타샤의 침실을 보여주는 장면 말고는 인테리어를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는 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이 확고한 타샤를 보는 건 내 삶의 자세와 나의 취향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정확히 '타샤처럼' 살고 싶은 건 아닌데 타샤의 자세가 좋았다.
타샤의 젊은 시절에는 여성들이 이전 시대보다 짧은 머리카락과 짧은 치마를 입는 게 유행이었다고 했다. 그것이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타샤는 그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손수 옷을 지어 자기만의 옷을 입었다. 워낙 옛날 사람이신지라 그걸 가지고 기껏 여자로 태어났으니 (긴 머리카락과 긴 치마를) 누리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던데 여성성을 그런 식으로 정의하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유행에 무작정 순응하기보다는 자기 취향을 밀고나가는 자세가 좋았다. 타샤처럼 긴 머리카락을 천으로 얌전히 감싸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를 입고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미의 기준과 자신의 취향이 충돌할 때 꿋꿋하게 자기 취향을 밀고 나가는 태도가 좋았다.
꼭 옷이 아니라 다른 분야, 삶 전체에서도 타샤는 그런 식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고 그걸 실천했다. 화려한 사교계에 진출하길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동물을 돌보고 사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며 살길 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통해 바로 그 삶을 이루었다. 영화 속에서 타샤는 거듭해서 자신은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데 정말로 행복해 보인다.
영화 타샤 튜더는 분명 이런저런 이유로 완전히 만족스러운 영화는 아니었지만 소재인 '타샤 튜더'라는 사람 자체가 나를 생각하고 움직이게 만든다. 버몬트의 30만 평이 넘는 정원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고 닭과 비둘기와 코기와 함께 차를 마시는 타샤 할머니를 보면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리고 그렇게 살려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도 모른 체 막연히 몽상만 하다 그냥 세상의 관습대로, 정해진 기준대로 사는 게 일반적인 세상에서 그렇지 않았던 타샤 할머니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30만 평의 정원은 아니더라도 방치해두었던 우리 집 조그만 땅부터 정리하고 내가 좋아하는 식물들을 심을 계획을 짜게 되었다. 그 사람의 삶과 취향을 보면서 내 삶의 자세와 취향을 생각하게 되는 힘.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자신의 삶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걸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온 몸으로 보여준 타샤 할머니의 힘이다. 부디 하늘에서 평온하시길.
타샤 튜더 (2017)
Tasha Tudor: A Still Water Story
감독 : 마츠타니 미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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