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상/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2017) 보고 이런저런 잡생각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보고나서 바로 영화가 어쩌고 저쩌네 가벼운 마음으로 별 생각 없이 떠들어대기 어려운 영화였다. '야, 재밌게 잘 봤다~'하며 휴지에 코 풀듯이 일사천리로 키보드 두드려 감상 찍 싸버리고 잊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쉽게 소비되는 것에 저항하는 영화.


인터넷에 있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줄거리 소개는 다음과 같다.


끔찍한 유년기와 전쟁 트라우마로 늘 자살을 꿈꾸는 청부업자 ‘조’.

유력 인사들의 비밀스러운 뒷일을 해결해주며

고통으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날,


상원 의원의 딸 ‘니나’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고

소녀를 찾아내지만 납치사건에 연루된 거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다시 사라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데…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살아있는 유령 같은 인생에

조용히 나를 깨우는 목소리 “Wake up, Joe!”


전설의 망작 클레멘타인의 "아빠, 일어나!" 감성마저 느껴지는 촌스러운 소개다. 구려도 너무 구려.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다.


'케빈에 대하여'의 린 램지 감독,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라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

이쯤 되면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영화가 개봉한 뒤 한동안 미적거리며 게으름을 피운 건 저 촌스러운 줄거리 소개 때문이었다.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본 뒤, 내가 읽은 줄거리 소개와 내가 실제로 본 영화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 대해 가장 많이 얘기되는 건 이 영화가 트라우마를 영화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인간의 내면을 다룬다는 것, 그리고 설명하지 않음으로서 더 깊고 풍부하게 다가온다는 얘기다. 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하다. 뭔가 찝찝하다. 그걸로 끝인가? 이 영화에는 뭔가 더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영화의 줄거리 소개를 보면 이 영화는 아주 단순한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전쟁 경험과 그 밖에 등등 여러 가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남자가 니나라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어둡고 폭력적인 세계로 뛰어든다는 내용이다. 피를 흘리며 테이블 아래 숨어 어린 조에게 조용히 하라는 어머니의 모습, 모래 위의 맨 발로 나타나는 먼 곳에서의 전쟁 경험, 컨테이너 박스 안의 수많은 죽은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이고 니나와 관련된 부패한 정치인들, 그 수하들로 인한 조의 주변인들의 죽음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영화를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느꼈다. 영화 밖의 줄거리 소개도 잊어야 했다. 영화 안에서 감독이 일부러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 조의 트라우마를 영화 밖의 말들이 너무 쉽게 '아버지로 인한 가정 폭력의 경험' 운운하며 섣불리 정리해버리는 건 아닐까? 조의 과거에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리고 '니나'와 얽힌 저 현실성 없는 사건들이 진짜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저 일련의 모험들은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뉴욕 주지사의 사람들은 살인의 뒤처리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총을 쏘며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 조는 한창 캠페인 중인 유력 정치인의 차를 너무나 쉽게 따라가서 가장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을 그의 아동성매매 소굴에 손쉽게 잠입한다.


원작인 조나단 에임즈의 동명 소설로 린 램지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설명하려 드는 건 헛된 시도일 것이다. 훌륭한 영화는 그저 원작 소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니까. 더군다나 린 램지는 마찬가지로 원작 소설이 있는 러블리 본즈를 찍다가 원작을 최대한 그대로 옮기라는 관계자들의 요구에 아예 그 프로젝트에서 뛰쳐나간 적도 있는 사람이다. 원작 소설의 단순한 영상화라는 영혼 없는 영화를 찍느니 그 영화를 포기해버리는 사람.


주연인 호아킨 피닉스도 이것이 그저 동명 소설을 그대로 옮기는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소설의 '조'는 라텍스 장갑부터 온갖 도구들을 쓰는데 와킨 피닉스는 조를 연기하는데 그런 잡다한 도구들은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이 영화는 조가 얼마나 현실감 있게,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나쁜 놈들을 처리하는지가 중요한 영화가 아닌 것이다.


영화 <너는 거기에 없었다>는 정말로 한 사람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 거기서 길어 올린 것들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은 현실을 정확히 옮기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현실을 왜곡시키고 바꾸어 버린다. 그것이 트라우마라면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을 파괴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감춰진다. 트라우마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파병 경험, FBI 시절 목격했던 끔찍한 일들이 나(조)를 상처 입혔다'는 너무 잘 정리된 서술이지 않은가. 트라우마는 잘 설명되고 깔끔하게 서술될 수 있는 매끈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하는 고통에 가까운데. 그리고 감독인 린 램지는 영화 속에서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조의 트라우마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순간순간 조를 사로잡는 잔상들을 보여줄 뿐.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트리비아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린 램지 감독이 호아킨 피닉스에게 조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암시하는 자료로 불꽃놀이와 총성이 뒤섞인 오디오 파일을 주었다는 거였다. 가정 폭력에 관한 언어로 잘 정리된 레포트 같은 게 아니었다. 불꽃놀이와 총성이 뒤섞인 소리. 그것이 조의 머릿속이고 그것이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자세인 것이다.


이 영화가 잘 정리된 이야기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을 그리는 영화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장면을 영화 밖의 말, 저 촌스러운 줄거리 소개에 기대어 쉽게 정리해버리는 순간 큰 오해가 생기는 건 아닐까.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순간순간 나타나는 트라우마의 잔상이 전부 그 모습 그대로 조의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 니나와 관련된 일들이 전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우리는 좀 더 의심해야 한다.


영화를 보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았다. 의문을 자아내는 이상한 장면들.


왜 영화는 하필이면 조의 어머니가 히치콕의 싸이코를 보고 있었다고 말하는가? 그저 끽끽끽 하는 싸이코의 유명한 테마 음악을 따라하며 조가 싸이코의 살인 장면을 흉내 내 칼을 내리치는 시늉을 하는 '웃기는' 장면을 넣기 위해? 사실 싸이코는 영화 역사상 가장 이상한 어머니와 아들의 드라마가 아니었던가? 싸이코의 베이츠 모자 관계로 조와 어머니의 관계를 읽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하필이면 싸이코를 본 어머니가 어두운 침실에서 아들을 붙잡으며 조금만 더 옆에 있다 가라하는 장면. 조는 거기서 왜 누군가에게 변명하는 듯이, 어머니의 요청을 자신이 해명하는 듯 "무서운 영화를 보셨으니까."라고 덧붙일까? 그리고 어두운 화면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이나 조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조의 팔이 조금씩 움직이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영화는 왜 그 장면을 집어넣었는가? 아니, 영화는 왜 그 장면을 관객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볼 수 없게, 화면을 어둡게 만들었을까?


니나를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전 조는 사우나에 간다. 거기서 그는 수건을 얼굴에 덮는다. 그의 트라우마 속에서 아마도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도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 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는 남자들도 다 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연출자가 일부러 그렇게 둔 것처럼 조에게 너무 가까이 있다. 카메라는 관객이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것처럼 남자들의 존재를 프레임 안에 확실히 전시한다. 그리고 그 장면의 이상한 긴장감. 이 장면은 도대체 왜 있는가? 그 남자들은 왜 얼굴을 덮고 거기 그렇게 있어야 했나?


이 영화에는 분명 뭔가 있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남자가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권력을 가진 소아성애자들이랑 싸운다' 정도로 쉽게 정리되는 거 말고 좀 더 얘기되어야 할 무언가가.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무언가 더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것만을 간신히 감지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언어로 매끄럽게 정리할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러 인터넷을 떠돌아다녔다. IMDB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는데 100%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흥미로웠다.


https://www.imdb.com/review/rw3870455/?ref_=tt_urv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보고 린 램지의 다른 영화도 찾아 다녔다. 그 전에 본 건 케빈에 대하여 한 편 밖에 없었다. 장편은 찾지 못했고 유튜브에 있는 단편만 몇 편 볼 수 있었다.


1996년에 찍은 <Small Deaths>와 <Kill the day>, 그리고 2012년에 찍은 <Swimmer>.


Kill the day는 마약 중독자의 현실에 바탕을 둔 채 그의 기억과 내면이 뒤섞여 있고 swimmer에서는 관객에게 뚜렷한 현실을 그려주기 보다는 음향과 어우러져 내면 풍경에 가까운 시적인 흐름에 보다 더 집중하고 있다. 물론 swimmer는 영국의 여러 가지 수로들을 보여주는데 공들이지만 그것이 현실의 수로를 묘사하는 건 아니다. 2017년 작인 너는 여기에 없다는 96년의 kill the day보다는 2012년 swimmer의 태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영화들을 보면서 확실히 린 램지는 딱딱 떨어지는 단순한 선형적 서사를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기 보다는 비선형적이고 인간의 내면을 영화로 구현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진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너무나 훌륭하게 해낸다. 시적인 영상과 연출, 뼛속까지 파고드는 음향.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가 단단하다. 깊이 없는 허세나 알맹이 없이 그럴싸한 기교만 부린다는 식으로 린 램지의 영화를 매도할 수는 없다.


69년생인 린 램지와 비슷한 연배거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다른 감독들 중에는 처음에는 와, 대단한 감독이 나타났다 하며 감탄했다가도 작품이 이어질수록 실망하게 된 경우가 있었다. 이들과 달리 린 램지는 작품을 따라갈수록 신뢰가 간다. 이 사람의 작품은 한 철만 피었다 쉽게 시들거나 어느 순간 맥없이 와르르 허물어져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동시대의 믿을 수 있는 감독 목록에 린 램지의 이름을 올리고 그녀의 다음 작품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 10점
조너선 에임즈 지음, 고유경 옮김/프시케의숲
너는 여기에 없었다 (2017)

You Were Never Really Here

각본 / 감독 : 린 램지

주연 : 와킨 피닉스, 예카테리나 삼소노프

촬영 : 토마스 타운엔드

음악 : 조니 그린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