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이 생각났다.
나치즘이 세를 떨치던 시대를 다룬다는 것,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우정이 나온다는 것, 책이 얇고 두껍지 않다는 것,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였다는 것 같은 공통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급생이 비극적인 시대 두 소년의 우정을 중심을 다루며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해 마지막 한 줄의 강렬한 문장으로 끝맺는 강력한 서사의 힘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라면 안 리즈 그로베티의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은 나치즘의 광기가 휘몰아치던 시대를 언어로서 명료하게 정의내리는 통찰이 두드러지는 작품이었다.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에는 2대에 걸친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우정이 나온다. '나'와 오스카는 둘도 없는 단짝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오스카의 아버지인 안톤 아저씨 역시 아주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의 아버지와 안톤 아저씨는 둘 다 시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언어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들은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된다. 대신 그들은 아주 낮은 소리로 말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높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나치즘이 득세하면서 점점 변해가던 사회를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 그리고 동시에 끔찍한 말들이 아주 '높은 소리로 얘기되던 시간'으로 대비시켜 묘사한다. 시집이 불태워진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창문 너머에서, 허공에서, 광장에서, 카페, 극장 등 사방에서는 쩌렁쩌렁한 연설이 쏟아져 나오고 군중은 미친 듯이 발을 구르며 환호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 변화는 아직 아이인 '나'의 눈과 입을 통해 묘사된다. 더 이상 사람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지 않게 되고 어떤 이는 아버지의 가게에 들어와 아버지의 정치적 성향을 묻기도 한다. 학교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 틈에 들어가 버렸는데 오스카를 교실에서 모욕한다. 오스카의 아버지는 직장을 떠나야 했고 오스카는 축구부에서 쫓겨나더니 결국 등교도 금지된다. 그리고 가족 전체가 집을 떠나 '전용 구역'에서 살게 된다. 어린 나와 오스카는 왜 선생님이 갑자기 오스카에게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나중에야 알게 된다. 오스카의 가족이 유대인이라서.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나'의 아버지는 오스카 가족을 자기 집에 몰래 숨기려 한다. 하지만 오스카의 아버지는 그렇게 하면 친구의 가족들까지 위험해진다며 거부한다. 마지막 순간에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어린 내가 듣는다. 아버지들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건 오래 전부터 우리 모두가 갖고 있던 일상의 사소한 비겁함 때문이었다 말한다. 처음 증오와 폭력의 얘기가 나올 때 그저 무시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나는 난폭한 말은 결국에는 오직 폭력으로만 말하게 된다는 걸 깨닫는다. 전쟁이 일어나고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이가 든 '나'는 악의를 품은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언제나 인간의 가치가 담긴 아름다운 말을 사랑하려고 한다.
이 책은 안 리즈 그로베티가 청소년을 위해 쓴 책이라는데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도 5.18 같은 역사를 이런 식으로 청소년에게 전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제대로 정의내리는 시대를 해석하는 통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적이고 정확하고 어렵지 않게 전하는 책.
사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홀로코스트나 전쟁 같은 걸 이런 식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하는 책을 아주 사랑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아름다운 문장은 그냥 미문을 말하는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데 뭔가 이상한 낭만이 들어 있는 것 같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어쩐지 감상주의의 향취가 슬쩍 나는 문장을 얘기하고 싶다. 되게 아름답고 비극적인 어떤 '이야기' 한 편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 그걸 다루려면 이야기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
잘 읽었고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미묘한 설탕 과자 같은 문장을 믿기 어렵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 그리고 이 책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같은 책들. 앞의 두 권은 그래도 좋다/싫다 중에 어느 한 쪽을 고르라면 '좋다'를 택하겠지만 숨그네는 처음 읽었을 때 뭔가 이상한 분노 같은 게 일었다. 정말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
모 대학 문예창작과에서 황정은 작가와 학생들이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었는데 그 때 한 학생이 황 작가에게 작가님의 아름다운 문장을 사랑한다고 작가님의 문장은 헤르타 뮐러의 문장 같다고 했나 뭐 그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때 황 작가는 웃지도 않으면서 저는 헤르타 뮐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 문장은 헤르타 뮐러의 문장과 달라요. 그녀의 문장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했다는 얘기를 모 작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현장에서 있었던 정확한 대화는 아니겠지만 이 얘기가 되게 인상적이었다. 황정은 작가를 원래도 좋아했지만 이 일화를 듣고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나도 황정은과 헤르타 뮐러의 문장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황정은의 작품은 믿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 헤르타 뮐러의 문장은 믿기 어렵다.
어떤 특정한 것들,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들, 정말로 그 일을 겪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그걸 말하지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있다. 그리고 문학으로서 그런 걸 다루려면 이전까지 썼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써야 하는 것 같다. 부딪히고 마구 부서지면서 막을 뚫고 자신이 지금까지 썼던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해야 한다. 다른 언어로.
내가 관심이 가는 건 진짜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으로서의 문학과는 다르다. 자기 안에 이미 산산조각 나 부서진 언어를 피로 긁어모은 게 아니라 아예 자기 안에 그게 없는데, 텅 비어 있을 때 어떻게 언어로 붙잡을 것인가에 눈길이 간다.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 아예 그 시대를 겪어 보지 못한 이후 세대의 문학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그 일을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쓸 것인가, 에 대한 문학적인 응답들.
어떤 소설가들에게 각각 다른 자리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다. 물론 그 분들에게는 그 분들의 뜻이 있을 테고 그런 자리에서의 간단한 몇 마디 말로는 그 뜻을 제대로 알기도 어렵겠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말해야 한다.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런데 이때 그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너무너무 중요한 것 같다. 설탕 과자 같은 문장이 아니라, 뭔가 신비로운 연기를 마구 뿜어내는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부서지면서 막을 뚫고 간신히 닿은 피투성이의 다른 언어로. 어떻게 다른 언어에 닿을 것인가, 어떤 것이 다른 언어인가를 누가 이거다! 하면서 떠먹여 줬으면 좋겠는데.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
안 리즈 그로베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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