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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이언 매큐언, My Purple Scented Novel

 

실패한 소설가가 성공한 작가 친구의 미발표 원고를 읽고 감동에 젖어 그 책을 표절한 걸작을 써내는 게 재미있었다. 확실히 어떤 책은 읽으면 독자를 쓰게 만든다. 어떤 독서 경험은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그냥 와, 이거 재밌네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나도 뭔가 쓰고 싶어! 하며 이상한 열기에 사로잡혀 달려가게 만든다. 정말로 그런 책이 있다.

 

잘 나가는 친구의 미발표 작품을 미리 보고 훔쳐서 내가 먼저 작품을 낸다는 것도 창작자들의 깊은 곳에 숨은 판타지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발표되지 않은 걸작을 아무도 몰래 훔쳐서 내 거로 만든다는 거, 얼마나 유혹적인가.

 

마지막 장면이 좋았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화자가 개새끼인 상황인데 이상하게 묘한 감동을 준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이 단편은 시작부터 친구가 죽은 한참 뒤, 세상에서 친구의 이름마저 잊힌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불가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자신이 당한 배신의 전말을 꿈에도 상상 못 한 채 너무나 순진한, 너무나 낭만적인, 너무나 사랑이 가득 찬 이론을 말하는 친구가 있고 화자가 그와 함께 짠, 하고 잔을 부딪치는 지나간 한 시절이 훅 살아 나온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을 한 순간이나마 글로 되살린다. 철저한 기만의 장면이지만 그렇게만 여기며 휙 넘어갈 수 없는, 잠시 멈춰서 그 장면을 보게 되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