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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쇼스타코비치의 신랄한 유머 감각+회고록 《증언》 읽고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을 읽다가 그의 어둡고 신랄한 유머 감각이 드러나는 장면을 모아 봤다.

 

(온다프레스, 김병화 역)

 

 

 

(지휘자 므라빈스키에 대해)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하자. 참새에게 대포를 쏘는 게 전혀 쓸모없는 낭비라는 건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므라빈스키 졸지에 참새행... 

 

쇼스타코비치와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시원찮은 음악가들의 음악도 많이 듣는다. 수없이 듣는다. 그들도 살 권리가 있는 법이다. 다만 '붉은군대 합창단'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악단만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혹시 내가 갑자기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다면 이런 악단들은 모조리 즉시 해산시켜버릴 작정이다. 그게 내 첫 번째 명령이 될 것이고 나는 당연히 사보타주라는 죄목으로 즉시 체포되겠지. 하지만 일단 흩어진 악단은 절대로 다시 결성되지 못할 것이다.

 

저세상 쏘련 드립... 억압적인 스탈린 체제에서 고통받았던 쇼스타코비치가 치는 드립이라 더욱 만감이 교차한다. 그런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꿀 빠는 21세기의 독자는 이런 대목에서 약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선생님... 웃어도 되나요...

 

쇼스타코비치를 미치게 만든 '붉은군대 합창단'

 

 

즈다노프는 발표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음악에서 아름답고 세련된 것을 요구한다." 그는 덧붙였다. 음악의 목표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음악은 거칠고 야만스럽다. 그런 것을 듣고 있으면 인간 심신의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다. 즈다노프 같은 사람의 심신은 틀림없이 그렇게 되겠지.

 

그에 비해 명성이 조금도 덜하지 않은 버나드 쇼의 경우는 또 어떤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독재자라는 말에 겁먹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 쇼가 겁낼 필요가 있을까? 그가 살던 영국에는 독재자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영국의 마지막 독재자는 크롬웰이었지 싶다.

 

(무소륵스키 얘기하며) 그는 작품 일부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악보에 적어두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고집불통으로 대답했다. "내 머릿속에 확실하게 들어 있으니까 괜찮아."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면 종이에 적어두라. 머리라는 것은 깨지기 쉬운 그릇이니까.

 

(스탈린과 대면했던 일화) 먼저 스탈린은 국가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심오한 발언을 하셨다. 노상 듣는 내용, 전형적인 스탈린식 연설이었다. 하도 재미없는 이야기라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못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조용히 동의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모두 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종교의식에나 어울릴 만한 분위기였고 마치 기적이 막 일어날 듯했다. 예를 들면 스탈린이 출산을 한다든지 하는 기적 말이다.

 

 

 

책 자체는 몸도 아프던 말년의 회고록이라 아무래도 우울하다.

시작부터 "돌이켜 보니 내가 본 것은 폐허와 산처럼 쌓인 시체더미뿐이었다."라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증언》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얘기만 꺼내기보다는 살해당한 메이예르홀트, 투하쳅스키 등 죽은 친구들을 회고하며 망각에 저항하려 한다.

 

"푸시킨이 이런 글을 썼던 것이 기억난다. "망각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당연한 운명이다." 이 말은 끔찍하기는 하지만 진실이다. 누구든 거기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죽기만 하면 곧 잊히니 말이다.

 

이런 일은 너무 부당하다. 사람들은 고통 받으면서도 노력하고 사색했다. 그렇게 지혜롭고 재능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죽기만 하면 곧 잊힌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게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교향곡에 대해 한 말도 인상 깊었다.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 너무 많은 수의 우리 국민들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조차 알지 못한다. 내 친구도 여러 명 그런 일을 당했다. 메이예르홀트나 투하쳅스키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나는 이런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품 하나씩을 바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들 모두에게 내 음악을 바친다.

 

이 책을 두고 진위 논란이 있다는데 그런 걸 다 젖혀두고라도 읽어볼 만하다.

장정일이 복간에 부쳐 쓴 글 중에 '이 회고록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내밀한 기록이며 스탈린 시대에 대한 거대한 벽화이기도 하다.'라는 문장이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읽으면서 창작을 업으로 삼은 자의 작업 태도, 예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러시아적 정신, 스탈린 시대의 소련의 모습, 쇼스타코비치가 말하는 자신의 음악, 그가 생각하는 인간과 삶, 그가 흠모했던 예술가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지인들의 운명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