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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누벨바그 감독들이 남긴 파리에 대한 여섯 가지 시선 - 내가 본 파리 (1965)

영화를 통해 프랑스, 파리를 보는 건 재미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겹겹의 환영을 덧입은 파리라는 환상, 파리라는 광채 나는 유령에 매혹되지 않기는 어렵다.

 

그리고 카메라의 마법 속에서 어쩌면 실제의 파리보다 영화 속의 파리가 더 풍부하고 더 환상적이고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게 꼭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낭만의 극치로서의 파리가 아니라 구질구질하고 사람들이 다투고 배신하고 숨 막히게 우글거리는 모습일지라도.

 

<내가 본 파리>는 누벨바그의 유명 감독 여섯 명이 각각 파리의 거리를 배경으로 만든 여섯 편의 옴니버스 영화다. 요즘 들어 두 시간이 넘어가는 영화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데 호흡이 길지 않은 단편이며 다 합쳐서 1시간 35분 정도라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60년대 영화인데 다들 옷차림이 지금 봐도 세련되어서 옷보는 재미도 있다.

 

 

 

1. 생 제르맹 데 프레

감독 : 장 두셰

 

카메라가 파리의 거리를 부유하듯 돌아다니고 보이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가 내레이터다. 여자의 목소리가 중간중간 끼어들어 파리와 관련 있는 예술가들의 이름이나 유적지의 이름을 내뱉는다.

 

남자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전한다. 카메라에 아직 배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파리의 거리 뿐. 목소리는 이제 막 파리에 온 젊은 미국인 여성이 카페 드 플로르에서 근사한 차를 끌고 다니는 멋진 파리 남자를 만난 이야기를 한다. 여자는 망설이지만 파리라는 예술과 모험의 도시에 취해 그날 밤 처음 본 남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어째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건 아름다운 (관광)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낭만적인 해외여행 자극 로맨스 영화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다음날 아침부터 배우들이 카메라에 나타난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온갖 미사여구와 낭만적인 말을 늘어놓았을 남자는 오늘 멕시코에 가기로 되어 있다며 여자를 빨리 집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여자는 곧 파리를 떠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숨긴 남자에게 분노한다. "그냥 하룻밤 자보려는 거였어!"

 

화가 난 여자는 파리 시내를 걷다 또 다른 파리 남자를 만난다. 첫 번째 남자에 대한 분노와 상처가 아직 생생한 여자는 능숙하게 수작질을 거는 잘생긴 남자를 차갑게 외면한다.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여자가 미술 수업을 듣는 곳까지 따라가는데 거기서 여자는 강의실에서 누드모델을 하고 있는 첫 번째 남자를 본다. 외교관인 아버지 때문에 오늘 멕시코로 가야 한다던 남자를!

 

놀라서 강의실을 뛰쳐나온 여자를 쫓으며 두 번째 남자는 끈질기게 수작을 거는데 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두 번째 남자가 끌고 다니는 차, 그가 데려간 집, 모두 어제 첫 번째 남자가 가지고 있던 것 아닌가?

 

두 번째 남자가 말하는 자신의 프로필, 멕시코에 계시는 외교관인 아버지, 정치학 전공 기타 등등까지 모두 첫 번째 남자와 똑같다. 두 번째 남자는 여자가 전 날 만난 첫 번째 남자, 강의실에서 마주친 누드모델이 자신의 가난한 친구이며 자신이 파리를 떠나 있는 동안 그에게 차와 집을 빌려준다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흉내를 내며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한다.

 

여자는 두 번째 남자의 수작을 거절하고 어제 그녀가 첫 번째 남자와 밤을 보냈던 집을 떠난다. 여자가 떠나자 두 번째 남자는 "재미없는 여자잖아." 투덜거리며 소파에 벌러덩 눕는다.

 

여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첫 번째 남자가 강의실에서 누드모델을 하고 있던 학교. 첫 번째 남자는 여자를 보고 놀라지만 이내 천연덕스럽게 다른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나친다. 남겨진 미국인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영화가 끝난다.

 

60년대에도 파리라는 환상에 취해 뭔가 자유롭게, 삶의 모험과 낭만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된 파리를 찾은 외국인과, 그들이 가진 환상을 이용해 어떻게든 이익을 우려내 보려 노련하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은 한결같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4년 전 영화인데 54년 후의 영화에도 파리라는 배경에서라면 저런 얘기가 자연스럽게 쏟아질 거 같다.

배우들이 존잘존예라 얼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2. 북역

감독 : 장 루슈

 

결혼한 지 몇 년 지나 젊음을 잃어가는 남편, 공사 소리가 들리는 좁은 아파트, 여행도 못 가고 일에 매인 자신,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한 여자가 나온다.

 

아침부터 티격태격하다 남편에게 "나 오늘 집에 안 들어올 거야!" 소리치고 출근하는 길에 차에 치일 뻔한다. 비싼 외제차를 끄는 낯선 남자는 그 길로 여자를 졸졸 따라오며 그녀에게 구애한다. 앞서 그녀가 남편에게 쏟아낸 모든 불만을 이해하는 것 같은 이 남자는 완벽하게 그녀가 원하는 삶을 기꺼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거절하고 계속되는 거절에 남자는 자신은 오늘 아침 자살하려 했는데 그러다 당신을 만났다고까지 말한다. 남자는 열을 셀 테니 자신을 승낙해 달라 한다. 여자가 남편에게 신경질을 내게 만들었던 풍족한 돈과 여행을 떠나는 삶을 줄 수 있는 남자가.

 

여자는 남자를 마지막까지 거절하고 남자는 "안타깝군요." 한 마디 남긴 채 그 길로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안 돼요, 무슈! 무슈!" 하며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시체에 외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남편의 작은 생활 소음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소리 내지 마!" 라고 말하는 위기에 찬 부부 묘사도 나름 재미있고 직전에 본 장 두셰의 영화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거리에서 만난 여자를 꼬시는 남자가 나와 '파리 남자들은 참 입을 잘 털어ㅋㅋㅋ' 하며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남자가 진짜 뛰어내려 자살하는 장면에서 짜게 식었다.

 

죽으려면 가서 혼자 죽을 것이지 여자가 거절하자마자 그 여자 눈앞에서 뛰어내리는 남자라니. 아주 드라마킹이 따로 없네. 아침 출근길부터 시체 본 여자는 무슨 죄야. 자기가 그 남자를 거절했기 때문에 남자가 죽었다는 생각도 들 텐데.

 

옛날 작품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해서 봐야한다는 걸 알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볼 때도 그렇고 뒤에 남겨질 여자 입장은 1도 신경 안 쓰고 지 감정에 취해 "안녕, 세상아!" 하며 자살해버리는 남자들 볼 때마다 짜식는 기분이 여기서도 똑같이 들었다. 저런 남자들 볼 때마다 몸만 어른이고 정신은 애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곁가지로 빠지는데 꼭 북역처럼 깜짝 반전으로 쾅 하고 마지막에 관객을 찰싹 때리는 듯한 효과로 써먹는 게 아니어도 오랫동안 창작물 속에서 차디찬 세상이나 얻지 못할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남자들을 미묘한 숭상이라 해야 하나, 노골적이지 않아도 묘하게 돋우는 것 같은 느낌이 나게 만들어 온 것 같다. 구시대의 비극 취향 정서 때문일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저런 인간상을 비장미 넘치게 그려내는 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도 바뀌었고 사람들의 정서도 달라졌고. 오늘날의 관객들은 아듀 세상아 ㅠㅠ 하며 픽 죽어버리는 남자들을 더 이상 진지하게 봐주지 않을 것 같다.

 

 

 

3. 생 드니 가

감독 : 장 다니엘 폴레

 

집창촌으로 유명한 생 드니 가의 원숙한 매춘부와 자기는 동정 아니라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처음인 게 보이는 어리숙한 남자가 남자의 낡고 좁은 자취방에서 벌이는 소극이다.

 

노련한 매춘부는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고프다며 남자가 저녁을 차려오게 만들고 후식에 와인에 신문까지 대령하게 한다. "이건 수제 치즈네!"

 

두 사람은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눈다. 바캉스를 이 세상 다시없을 중대사로 여기는 파리 사람답게 여자는 근사한 휴양지가 아니라 친척이 있는 시골 촌동네 리모주로 휴가 갔다는 남자를 낄낄거리며 가볍게 놀리기도 한다. "리모주? 거기 도자기 말고 뭐가 있어?"

 

남자는 라디오에서 들은 재밌는 농담도 꺼내 보려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고 결국 남자가 꺼낸 은근한 회심의 농담은 매춘부가 마무리해준다.

 

안달은 나지만 차마 여자에게 대놓고 요구하지는 못하는 남자를 곁에 두고 침대에서 한가로이 신문까지 읽던 여자는 마침내 신문을 접고 본론에 들어가려 한다. 그때 불이 꺼지고 남자는 정전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여자는 자기는 어둠에 익숙하다고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경험도 숫기도 없는 남자와 경험 많고 능숙한 여자 사이의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파워 게임, 관계의 미묘한 뉘앙스들을 세심하게 잘 살렸다.

 

 

 

4. 에투알 광장

감독 : 에릭 로메르

 

초반에 개선문에 대해 관광객은 득실거리지만 파리지앵은 얼씬도 하지 않으며, 파리 사람은 옛 추억을 되새기는 늙은 참전 용사나 대통령이나 갈 뿐이라고 말하는 게 웃겼다. 관광 도시는 꼭 저런 게 있는 것 같다. 토박이들이 "거기? 거긴 관광객들이나 가는 곳이지!" 하고 미묘한 표정과 말투로 말하는 그런 장소.

 

양장점에서 일하는 남자가 나오는데 어느 모로 보나 소시민의 전형이다. 

지하철에서 여자 구두 굽에 밟혀 구두가 찌그러졌지만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남자다.

 

파리의 악몽 같은 혼잡한 거리와 끔찍한 출근길에 시달리는 이 소시민은 어깨를 부딪혀놓고 화를 내는 남자에게 결국 쌓였던 분노가 터져 한 바탕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 시비를 건 남자가 쓰러지는데 이 소시민 남자는 화들짝 놀라 꽁지 빠지게 달리며 그 자리를 벗어난다. 남자가 쉬지 않고 파리 거리를 횡단하며 달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길게 잡힌다.

 

그 후로 남자는 상대 남자가 죽지는 않았는지, 신문에 살인 사건이라 나지는 않았을지 두려워하며 신문을 읽는다. 겁이 나서 실랑이를 벌였던 개선문 근처도 가지 못하고 손님의 주문에도 그 부근을 피해 빙 돌아서 다닐 정도다.

 

그렇게 한두 달을 숨도 못 쉬고 지내다 혼잡한 지하철에서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그때 그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확인한 이 소시민은 안도하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소시민의 행동이나 심리 묘사나 옛날 한국 단편 소설을 보는 느낌이었다.

 

 

 

5. 몽파르나스-르발루아

감독 : 장 뤽 고다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는 캐나다 여자가 있다. 남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아뿔싸, 봉투와 편지를 바꿔서 붙인 것 같다.

초조해진 여자는 전보가 오기 전에 남자를 만나러 간다. 나를 사랑하냐고 묻고, 내가 잘못해도 용서해줄 거냐고 묻는다. 남자는 그렇다고 하고 여자는 사실을 실토한다. 그러자 남자는 화를 내며 여자를 쫓아낸다.

 

여자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두 번째 남자를 찾아간다. 전보는 이미 도착했고 남자도 읽었지만 괜찮아 보인다. 안심한 여자는 사실 다른 남자에게 보낸 편지는 만나서 헤어지자고 하려던 거였다고 말하며 침대로 가자하는데 남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알고 보니 봉투와 편지를 바꿔서 보냈다는 건 여자의 착각이었다. 각각의 남자들에게 제대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편지가 도착했는데 여자가 괜히 발이 저려 모든 일이 어긋난 것이었다. 결국 여자는 두 번째 남자에게도 쫓겨난다.

 

"이 가벼운 미국 여자야!"

"난 캐나다인이거든?"

"그게 그거지!"

"완전 다르다고!"

 

낄낄거리며 보게 되는 소동극이었다.

 

 

 

6. 라 뮈에트

감독 : 클로드 샤브롤

 

사실 <내가 본 파리>는 클로드 샤브롤 때문에 본 작품이었다. 샤브롤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어서 마침 보이는 이 단편부터 보려고 봤는데……. 보고 나서 뭔가 묘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꼴랑 단편 하나 보고 이런 말 하는 게 웃기기도 한데 적어도 이 작품 <라 뮈에트>를 보고 든 생각은 조심스럽지만 이 감독은 미묘하게 여성에 대한 가학성이 내재된 사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집에서 하녀랑 바람피우는 아버지, 전화기만 붙잡고 있는 어머니, 툭하면 벌어지는 부모님의 싸움. 그 모든 것에 진력이 난 부르주아 가정의 10대 소년이 소음을 듣지 않게 해준다는 귀마개를 사서 끼고 다닌다. 그러다 마지막에 아버지랑 다투던 어머니가 혼자서 계단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치고 피 흘리며 죽어 가는데 소년은 귀마개를 끼고 있어서 어머니가 죽어가는 걸 알지 못하고 집을 나온다는 내용이다.

 

가정 내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 받는고통받는 10대 소년이라는 주제는 별 생각 안 들었는데 나를 계속 찜찜하게 붙잡는 건 이 주제에 대한 상상력이 뻗어나간 곳이 피 흘리면서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어머니라는 거였다. 가족 내에서 고통받는 소년에 대한 상상력이 눈 부릅뜨고 머리에서 피 철철 흘리며 괴로운 소리 내며 죽어가는 어머니로 이어지는 이 상상력의 경향, 창작자의 생각이 뻗어나가는 방향이 나를 이 사람 영화를 계속 봐도 되나 고민하게 만든다.

 

가아암히이 어머니를 저런 식으로 죽였다! 하는 걸 문제 삼는 건 아니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예 처음부터 어머니가 저렇게 죽은 뒤의 이야기를 했으면 이 기묘한 찝찝함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가정 내에서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예민한 10대 소년이라는 작품의 발단, 창작의 씨앗이 상상력을 통해 전개되어 도달한 곳이 어머니의 끔찍한 죽음이라는 것, 그 상상력이 기울어져간 방향과 그 씬을 인간을 다루는 게 아니라 어느 고깃덩어리가 피 흘리며 괴성을 내지르는 듯 냉정한 시선으로 전시한 카메라가 신경 쓰인다.

 

어떤 소재를 택하느냐도 창작자 고유의 정서와 맞닿아 있지만 (소재를 택한다는 건 그 창작자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냐를 보여주니까) 정말로 창작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건 그렇게 마음에 뿌리 내린 소재의 씨앗에서 출발해서 상상력이 점차 뻗어나가는 경향,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그 상상력의 궤적이 한 사람의 창작자를 독창적으로 만들어준다. 같은 소재를 택해도 창작자들이 다른 작품을 내놓는 건 뻗어나가는 상상력이 다르기 때문이니까.

 

그 사람의 상상력이 흘러가는 경향, 그게 바로 수많은 창작자마다 다른 한 예술가 고유의 것이고 그의 창의성, 예술성이 달린 곳인데 그 방향이 나랑 안 맞아 보이면, 그리고 거기서 다른 성에 대한 몰이해나 스스로 인지 하지 못한 가학성의 가능성이 엿보이면 선뜻 그 사람의 다른 작품들에 손을 뻗기 어렵다.

 

 

내가 본 파리 (1965)

Paris Vu Par

Six in Paris

감독 : 장 두셰, 장 루쉬, 장 다니엘 폴레, 에릭 로메르,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사브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