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상/영화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 - 2016년 수상작

 

 

오버하우젠 월드 투어로 ACC에서 해주는 2016~2018 수상작, 2017, 2018 국제경쟁 섹션 다 챙겨 보고 싶었는데 2016, 2017 수상작 밖에 못 봤다. 본 지 일주일 지나서 기억이 흐릿한데 남은 기억이라도 적어둬야지.

 

 

<2016년 수상작>

 

 

전화 교환기 / 사라 드라스, 독일 / 7분 30초

Telefon Santrali / Sarah Drath, Germany

 

젊은 여자가 전화 교환대 앞에 앉아 있다. 그녀는 다른 곳과의 연결을 원하는 사람, 병원을 찾는 사람, 터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의 전화도 받는데 잔소리에 교환 콜이 온다는 핑계를 대며 끊는다. 그녀는 식물이 가득 한 창가로 가서 차를 끓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차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 교환기의 존재나 전화의 내용이나 과거에 속하는 것 같은 이 시공간에 갑자기 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여자는 문을 열고 택배기사는 '인터넷으로 시킨 바클라바'라며 여자에게 상자를 내민다. 여자는 묻는다. "인터넷이 뭐죠?"

 

기사는 농담할 시간 없다며 상자를 주고 돌아간다. 여자는 다시 전화 교환대 앞에 앉아 상자를 열고 바클라바를 베어 문다.

 

제목인 telefon santrali부터 터키어고 터키 디저트 바클라바도 나오고 전화상으로 터키 얘기도 나오는 게 분명 터키와 관련된 무슨 함의가 있는 것 같은데 아는 게 없어서 맥락을 파악할 수 없었다.

 

영화 설명은 '이 작품은 2015년의 조건 하에 그것의 이야기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전화 교환대 안에 있다."이니 2015년의 상황을 알아야 할 텐데 난 몰라...

 

 

 

All Days / 안드레아스 호프슈테터, Andreas Hofstetter, 독일 / 4분

 

역사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한 <전화 교환기>와 달리 이 작품은 그냥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아주 어린 여자애가 있다. 어머니가 침대에 누운 아이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 떠나자 아이는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밤새 인터넷의 수많은 밈과 채팅창과 이상한 것들 사이로 뛰어든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인터넷 창과 요상한 이미지들, 강렬한 음악이 번쩍이는 빛과 함께 아이를 감싼다. 광란의 밤이 끝나고 화면은 낮이다. 밤새 인터넷과 함께 날뛰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 그림처럼 앉아있다. 아이는 어머니가 신경 써서 입혀준 듯한 얌전한 흰색 원피스와 흰색 머리띠를 하고 리코더를 차분하게 연습한다.

 

 

 

489년 / 권하윤, 프랑스, 11분 30초

489 Years, Hayoun Kown, France

 

남한의 전직 군인이 DMZ와 관련한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한다. 검은 화면에 흰 선으로 DMZ가 그냥 단순한 선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걸 설명하는 심플한 화면 다음에는 군인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1인칭 3D 게임 영상 같은 화면이 이어진다. 지뢰가 가득한 땅, 그러나 인간의 발길이 드문 채로 남은 아름다운 자연.

 

마지막에 1인칭 시점 카메라는 허공으로 떠오르고 산의 능선 하나하나가 폭발로 뒤덮인다. 왠지 모르게 그 장면에서 폭발은 밤풍경을 수놓는 불꽃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이상하게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어느 군인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 관객이 3D로 재현된 DMZ 속에 들어간 것처럼 보여주는 화면 구성부터 뭔가 선뜻 동조할 수 없었는데 마지막에 DMZ의 추억을 회상하는 군인의 목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마치 초월한 것처럼 지상을 떠나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공중에서 DMZ의 폭발을 아름답게 지켜보게 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런저런 생각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이 결말의 해법, 이런 방식의 영상화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부터 든다.

 

이 단편은 마치 게임처럼 플레이어-관객이 DMZ의 군인이 되어 DMZ를 3D 영상으로 체험하게 하는데 그런 식의 체험의 형식으로 영상을 구성한 것도 의도를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마지막에 허공으로 날아가 폭발을 아름답게 감상하게 만드는 것도 내레이터인 기억의 주인, DMZ를 경험했던 군인은 지나간 과거를 그렇게 회상할 수 있을지 몰라도 관객까지 그렇게 쉽게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붕 떠올라 초월해버려도 되는지 의문이다. 관객이 카메라에 녹아드는 1인칭 카메라 시점은 함부로 써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고. 그 자리는 윤리의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 아닐까.

 

생각이 곁다리로 빠지는데 난 특히 전쟁 영화에서 카메라를 1인칭 시점으로 쓰는 게 싫다. 그런 식의 구성에서 관객인 나는 미군이나 영국군이나 아무튼 자동적으로 그 영화를 만든 국가의 군인 1이 되어 버리고 우리가 아닌 그들은 나의 적이 되고 그들에게 총을 갈겨 사살해야 한다. 1인칭은 너무 무서워.

 

 

 

씻은 손 / 루이스 보트케이, 브라질 / 8분 30초

Washed Hands / Louise Botkay

 

난민을 카메라로 찍는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섣부른 비난이나 노골적인 메시지 강요 그런 건 없는데 그냥 저 자리에서 카메라를 아기들과 어머니들에게 바짝 들이대고 찰칵찰칵 찍고 있는 백인 남자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우리를 찌른다. 보통의 미디어에서는 오직 비쩍 마른 채 배만 이상하게 땅땅 부어오른 아기, 그 아기를 껴안고 있는 가엾은 어머니만 등장하고 카메라 너머는 생각하지 않게 되는데 이 작품은 카메라 너머,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무심하게 찍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종말의 전날 / 라브 디아즈, 필리핀 / 16분 30초

The day before the end / Lav Diaz

 

거리가 물로 가득 찬 폭우의 배경이 좋았다. 난 폭우, 폭설, 장마, 엄청난 화재. 이런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이 인간을 덮칠 때, 그런 배경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쉽게 함락된다.

 

흑백의 밤거리를 거닐며 햄릿, 줄리어스 시저 등의 셰익스피어 희곡을 읊는 사람들이 나온다. 거리에서 그들은 민중들 앞에서 시저의 죽음을 말하며 브루투스는 고귀하다고 거듭 반복하는 안토니우스가 되고 to be or not to be를 고뇌하는 햄릿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한 팔을 등 뒤로 가린 채 뒤따르는 수상한 남자가 있다. 남자의 모습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마지막에 세 사람의 시인들을 카메라를 보며 자기의 대사를 동시에 읊는다. 모두의 말이 겹쳐진다.

 

머리로 저건 저거고 이건 이런 내용이야, 하며 정연하게 논리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영상과 분위기에 빠져들게 되는 작품이었다. 취향이었다는 말이다.

 

이 감독의 영화를 더 보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나만 몰랐지 원래 유명한 감독이었다. 라브 디아즈(Lav Diaz), 이 사람의 작품을 더 보고 싶다.

 

 

 

나의 속옷에서 응고된 피를 흘린 그녀 / 비카 커쉔바우어, 독일 / 3분 30초

SHE WHOSE BLOOD IS CLOTTING IN MY UNDERWEAR / Vika Kirchenbauer

 

섹스 중인 남녀를 적외선 촬영으로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의 목을 조르고 얼굴에 싼다. 보는 내내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쩔. 이 생각뿐.

 

 

 

 

베누시아 / 루이즈 카린 , 스위스 / 34분

Venusia / Louise Carrin

 

제법 규모가 큰 윤락업소 베누시아의 지배인인 리사와 그녀에게 고용된 매춘부이자 친구인 레나의 대화가 파편적으로 계속 나온다. 이 대화의 조각조각들을 통해 관객들은 천천히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이 앉아 있는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그들의 관계와 역할이 무엇인지, 인물의 성격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 등을 차차 알게 된다. 오로지 대화 조각들만으로 세계와 인간을 서서히 쌓아가며 드러내는 게 좋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꼭 영화일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연극도 될 것 같은데. 왜 꼭 반드시 영화여만 했나? 문학이나 미술이나 영화나 기타 등등 아무튼 훌륭한 작품은 그 작품은 반드시 그 매체여야만 하는 필연성이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데 이 작품은 <베누시아>가 반드시 영화여야만 했다는 게 설득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