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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김빠진 결혼 생활이 살아나려면 살인 사건이 필요해 - 맨하탄 살인 사건 (1993)

최근 본 영화 중에 제일 웃겼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낄낄거리며 본 영화는 오랜만이었다. 같이 본 M이랑 둘 다 완전 취향 저격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미쳤닼ㅋㅋㅋㅋㅋ' 하며 봤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제대로 만나기 전에 그의 스캔들을 먼저 접했고 어쩌다 몇 편 정도 그의 영화를 보긴 했지만 작품을 부러 찾아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맨하탄 살인 사건을 보고 아, 우디 앨런이 이래서 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부부를 생생하고 예리하게 그리면서 이웃집에 일어난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효과적으로 맞물리고 히치콕이나 흑백 시대 느와르의 그림자도 어른거리게 버무려 놨다.

 

히치콕 이창 본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봐서 더 겹쳐 보였다. 이웃집을 관찰하며 '어쩌면 저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지도 몰라!' 하는 인물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을 다시 보는 거나 서로 닮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용한 트릭은 현기증도 생각나고.

 

옆집 노부인이 죽자 캐롤은 옆집 남자 폴이 자기 부인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별 거 없다. 아내가 죽었는데도 남자가 너무 여유로워 보인다나? 캐롤의 남편 래리는 캐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일축하지만 캐롤은 자신의 미스터리에 완전히 빠진다. 자식도 다 키워놨겠다 딱히 지금 하는 일도 없고 난 요리 잘하니까 식당이나 열어볼까, 하는 상황인 캐롤에게 옆집에서 일어난 이 미스터리 아닌 미스터리는 둘도 없는 삶의 활력소다.

 

 

급기야 캐롤은 한밤중에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집을 나가는 옆집 소음을 엿듣고 (덩달아 잠을 못 이루게 된 래리는 제발 잠 좀 자자며 탄식한다) 용감무쌍하게 옆집 남자가 집을 나간 사이에 무단침입을 하기도 한다. 그런 부인 때문에 다소 소심한 남편 래리는 미치고 팔짝 뛴다. "미친 짓은 폐경기를 위해 아껴두면 안 돼? 제발!"

 

그러나 캐롤의 호기심은 멈추지 않고 여유로운 중산층으로 이루어진 부부의 친구들은 이 (어쩌면) 살인 미스터리에 흠뻑 빠진다. 남의 죽음, 그것도 그들의 공상대로라면 살인사건이 일지도 모르는 사건을 거리낌 없이 자기들 모임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주는 소재쯤으로 소비하는 뉴욕 중산층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실제 내 이웃에게 일어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살인 사건이 신문의 가십처럼 여겨지는 대도시의 모습이 얼핏 드러난다.

 

 

남편 래리는 한결같이 "맙소사, 살인이 아니라 심장 마비야, 심장 마비!" 라고 일축하지만 최근 부인과 이혼하고 혼자가 된 부부의 오랜 친구 테드는 캐롤과 짝이 잘 맞는다. 캐롤과 테드 두 사람은 늦은 시간에도 열을 올리며 전화를 해 옆집 남자가 어떻게 부인을 죽였을지 살해 방법을 추측해 보기도 하고 아마추어 형사 콤비가 된 것처럼 차를 타고 폴을 미행하기도 한다.

 

 

래리는 캐롤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테드가 아내 옆에 얼쩡거리는 게 신경 쓰인다. 테드가 아직 부인과 이혼하지 않았을 때 이 두 쌍의 부부는 동반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한 사고로 짝이 바뀐 채 떨어져 밤을 보낸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테드와 캐롤은 같이 자지는 않았지만 그날 밤 야릇한 기류가 있었고 캐롤의 남편 래리는 그걸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내 옆의 테드가 신경 쓰인 래리는 혼자가 된 테드에게 업무상 만난 작가 마샤를 소개해 주고 여태 헛소리라 일축하던 캐롤의 살인 사건 미스터리에 투덜거리면서도 동참하기도 한다. "당신은 나보다 테드랑 있는 게 더 재밌겠지?" 묻기도 하면서.

 

그리고 관계의 위기에 빠진 부부가 정말 죽은 줄 알았던 노부인 릴리안 하우스가 살아있는 걸 목격하고 그녀를 뒤쫓아 들어간 모텔 방에서 또다시 릴리안의 시체를 발견하는 순간 공상으로 여겨졌던 살인사건은 본격적으로 실제가 된다.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시시콜콜한 수다에 질린 K는 드립이 너무 올드하다며 싫어했지만 나랑 M은 진짜 너무 재밌게 봤다. 각 잡고 따지면 별 거 아닌데 그냥 보고 있으면 너무 웃기다.

 

또 <맨하탄 살인 사건> 보면서 새삼 느낀 건데 난 소수성을 가진 소수자만이 할 수 있는 개그에 꼼짝 못 하는 것 같다.

유대인인 우디 앨런이 다이앤 키튼 손에 끌려 취미에도 없는 오페라 관람을 하러 갔다가 끝내 중간에 나오면서 "바그너를 더 들으면 당장이라도 폴란드로 진격할 것 같단 말이야!" 할 때는 진짜 함락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이 하는 유대인 개그, 동양인이 하는 동양인 개그, 동성애자가 하는 동성애자 개그, 그 소수성을 가지지 못한 자는 할 수 없는 폐부를 찌르면서도 미친 듯이 웃기는 그런 개그가 취향이다. 그런 개그는 일단 존나 웃기면서도 그 속에 주류가 소수성에 씌운 전형적인 허울을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얼핏 보면 주류가 옭아맨 전형성에 고스란히 기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때로는 무례하고 파고들면 비인간적인 편견을 편견의 당사자가 손에 올려 쥐고 유머로 뒤집을 때는 슬쩍 전복성이 드러난다.

 

아무튼 영화는 말도 안 된다고 무시했던 허무맹랑한 음모론이 진실로 드러나고 추리 소설에서 본 트릭을 실제 삶에서 써먹고 오손 웰즈의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 펼쳐지는 거울로 가득한 극장에서의 마지막 총격 씬까지 도달한다. 이쯤 되자 래리는 말한다. "다시는 인생과 예술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 모든 소동 끝에 마침내 래리는 폴에게 납치된 캐롤을 구하고 중년의 위기를 겪던 부부는 서로를 끌어안고 잃어버린 삶의 활기와 매너리즘에 빠졌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이 정도면 이웃집의 살인 사건이 이 부부에게는 관계 회복의 기회가 된 셈이다.

 

 

다시 서로에 대한 사랑에 흠뻑 젖은 것 같은 나이 든 부부의 마지막 모습에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옆집의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 저렇게 뻔한 일상에 예상치 못하게 닥친 흥분되는 사건과 모험이 없다면 오래된 관계를 팽팽하게 유지하는 건 무척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김 빠지고 식어 버리고 지루하다 못해 일상적이 되어 버린 관계를, 혹은 삶을 활기 넘치게 되살릴 동력으로 옆집에서 수상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게 되는 건 아닐까.

 

 

+ 우디 앨런이 자신의 작품 중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라고 한다. 원래는 미아 패로와 찍으려 했는데 그녀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면서 다이앤 키튼이 찍게 되었다고. 우디는 다이앤이 더 코믹한 면을 잘 살린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 왓챠 플레이로 봤는데 래리는 하대하고 캐롤은 래리한테 공대하는 말투로 번역해 놔서 초반에 신경 쓰이고 짜증 났다. 아 제발 부부 사이에서 남자는 하대하고 여자만 공대하는 번역 좀 그만 하면 안 될까. 두 사람 다 그냥 편하게 말하는데 왜 한국어로 번역만 하면 여자만 남편한테 존댓말 쓰는 걸로 바뀌나. 역자들이 의식 좀 했으면 좋겠다.

 

 

 

맨하탄 살인 사건 Manhattan murder mystery (1993)

감독 : 우디 앨런

출연 : 우디 앨런, 다이앤 키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