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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행복한 라짜로 보고 주절주절

 

볼 때는 재미있었다. 전반부까지 그냥 드라마 보듯이 재미있게 봤고 라짜로의 죽음 이후 후반부는 음악이 성당을 떠나 라짜로 일행을 따라오는 성스러운 장면이 좋았다. 그때 나온 음악이 다윗이 밧세바랑 통간한 뒤 속죄하며 지은 시편 51편을 가지고 바흐가 만든 '오, 주 하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BWV 721)라는데 음악 진짜 좋았다.

 

라짜로의 죽음 자체보다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멀리서 잡아주는 카메라 앵글이 충격이었다. 절벽의 황량한 높이를 한눈에 보여주면서 흰 옷 입은 라짜로가 그 절벽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떨어지는 모습을 피할 수 없이 목도하게 만든다. 사실 라짜로 죽는 거 자체는 이름이 스포라...

 

막 보고난 직후에도 괜찮은 영화 봤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볼 때는 별생각 없다가 보고 나서 계속 생각나는 영화가 있는 반면 볼 때는 재미있지만 보고 나서 생각할수록 뭔가 맘이 뜨는 영화도 있는데 행복한 라짜로는 후자인 것 같다.

 

영화가 나쁘지는 않은데... 뭔가 계속계속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굴릴수록 막 그렇게 엄청나게 좋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작품은 이게 처음인데 이름 기억해두고 다음 작품 나오면 보러 갈 생각이다. 하지만 단단하게 이 감독을 지지한다는 말은 아직 안 나온다. 별로라는 건 아닌데 뭔가 생각할수록 약간의 미심쩍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기라거나 속임수에 당했다는 느낌까지는 아닌데 뭔가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할수록 내 안에서 영화를 완전히 믿고 지지할 수는 없는 묘한 게 있다.

 

알리체 로르와커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다. 새롭게 믿고 지지할 수 있는 감독이면 좋겠다.

 

 

이 밑으로는 행복한 라짜로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 밖의 이야기들 보고 떠오른 뻘 생각.

 

 

이 영화를 계급이라거나 과거의 봉건 제도와 현재의 자본주의, 진보하는 사회라는 환상 등등의 사회적 메시지로'만' 해석하는 건 영화를 너무 앙상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당연히 그 얘기도 맞긴 하는데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정리해버리면 그런 평의 진부함만큼이나 영화까지 좀 납작해 보이는 느낌.

 

영화의 모든 것을 종교에서 끌어와 1:1 대응시키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별로다. 라짜로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 나사로와 같은 것 맞고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영화이며 많은 부분이 종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영화지만...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저건 겟세마네고~ 저건 ㅇㅇㅇ고~ 전부 다 성경의 상징으로 끼워 맞춰 버리는 건 좀...

 

그런 해석은 영화를 풍부하게 만든다기보다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 혹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틀에 맞추는 것 같다. 그런 평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에 대한 평이라기보다는 그냥 영화에 덕지덕지 주석을 달아놓는 것 같다. 그 주석 중의 얼마나 행복한 라짜로의 함의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음.

 

영화를 보고 알리체 로르와커의 인터뷰를 몇 개 찾아봤는데 몇 가지 인상 깊은 것들이 있었다. 알리체 감독이 고등학생 때 읽은 '대사기극' 기사, 소작이 금지되었는데도 고립된 시골 마을 사람들을 소작농으로 착취했다는 신문기사로부터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정치적인 이야기에 라짜로라는 캐릭터가 나중에 나타났고 라짜로가 이 영화를 바꾸어 놓았다고. 사회적 사건인 기사(소재)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캐릭터(인물)가 있었다는 창작 순서가 흥미로웠다. 

 

또 감독의 아버지가 양봉업을 하셨는데 어렸을 적 부모님이랑 밤에 어디를 가는 일이 잦았다 했나? 자세한 건 까먹었는데 아무튼 어린 시절의 경험 중 캄캄한 낯선 곳에 가서 가장 먼저 소리를 들었고 소리를 통해 주변의 세계를 파악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명쾌하게 정리는 안 되지만 뭔가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