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수잔 클라크, 이옥용 역, 문학수첩
영드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원작.
드라마는 안 봤고 도서관에 있기에 책만 읽어봤다.
재미가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다. 초반 장벽과 약간의 노잼 구간을 버티면 1300여 페이지에 걸쳐 옅게 깔린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마법의 힘이 사라지고 마법에 대한 이론 연구만 남은 영국에 다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마법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를 이어 두 번째 마법사가 나타나 첫 번째 마법사의 제자가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법에 대한 견해가 달랐고 스승과 제자는 갈라선다.
여기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이라는 실제 역사가 더해지고 아는 이의 소개가 없으면 교류하기 어려운 당시 영국의 사회상도 그려진다. 몇 백 년 만에 등장한 마법사도 제대로 활약하려면 일단 높으신 분들과 연줄부터 만들려 고군분투하는 19c 초 영국...
요정을 인간과 비교해 인간에게서 이성과 광기의 비중이 뒤집어진 존재로 묘사하는 것도 흥미롭고 무작정 만능인 게 아니라 체계가 있으며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법도 재밌다. 이 밖에 예상치 못한 마법의 결과와 예언과 전설이 인물들 사이에 이리저리 얽히는데 떡밥 회수도 잘한다.
세상의 유일한 마법사라면 먼치킨일 것 같은데 이 책은 그런 얄팍한 캐릭터 설정 하나로 밀고 가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세계와 마법의 이론과 실재가 단단하게 깔려있다. 전쟁터에 파견된 마법사가 '존나쎈 공격 마법으로 적들을 다 쓸어버려따' 식으로 활약하는 게 아니라 지친 병사들에게 지금 뭘 바라냐고 묻고 새 신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험한 길을 마법으로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거나 곤란에 처한 배를 마법사가 일케일케 하면 되지 않나? 하면 해군 전문가들이 질색하며 그렇게 하면 배가 ㅇㅇ되어서 ㅁㅁ가 망하고~ 하며 전문 지식+현실적으로 지적하는 장면도 좋았다.
캐릭터의 강렬함이나 이야기 자체의 재미보다는 이 책에서 그리는 마법과 세계관이 흥미로웠다. 주렁주렁 달린 주석도 가끔 피곤할 때도 있지만 매력적이다.
세상의 단 둘 뿐인 마법사라는 관계성도 재미있었다.
두 번째 마법사, 첫 번째 마법사의 제자였던 스트레인지가 결국 스승 노렐의 마법에 대한 견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글을 언론에 발표한 뒤, 두 마법사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 가장 덕후 감성을 자극했다.
스트레인지는 노렐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노렐은 그렇지 않았다. 노렐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글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그리고 첫 번째 마법사는 말한다.
"당신은 나를 위해 그것을 썼소. 오직 나만을 위해서."
스트레인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그 말이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적으로 안 맞고 생각도 다르지만 세상에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상대뿐인 관계라니. 내가 열중하고 홀려 있는 마법을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상대뿐이며 결국 내가 쓰는 모든 글의 (진정한, 그리고 내가 염두에 두는) 독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라는 거 덕후의 심금을 울리지 않나.
결국 두 사람은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갈라서지만 나중에 스트레인지가 낸 책을 노렐이 마법으로 몽땅 없애면서 그 책을 산 사람들에게 어차피 당신들은 스트레인지의 책을 이해하지도 못할 거라고 무례한 편지를 보내는 장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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