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시의 마법사》, 어슐러 르 귄, 최준영‧이지연 역, 황금가지
여태 어스시가 '어스'라는 이름의 도시인 줄 알았다. 보니까 earthsea였네.
글이 생각보다 간결했다. 반제, 나니아 연대기랑 같이 3대 판타지라고 홍보해서 저런 건 줄 알았는데 문체 느낌이 다르다.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간략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읽다 보니 구구절절 늘리고 쓸데없는 묘사 덕지덕지 처바른 게 아니라 딱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더더기가 없다.
손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몰입하고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주인공에 이입해서 내가 모험하는 느낌으로 읽는 책보다는 하나의 신화를 듣듯 보는 책 같았다. 여러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와 마법에 대한 세계관을 만들어낸 게 놀라웠다. 르 귄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를 만든 사람이다.
슬렁슬렁 읽고 있었는데 진정한 이름이 마법의 정수이며 힘인 세계에서 마지막에 그림자와 대면했을 때 마주본 그림자와 게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상대의 이름, 같은 이름, "게드"를 말하는 장면에서 크으으으 무릎 꿇었다. 너무 완벽한 순간이었다.
캐릭터의 자극적인 매력이나 스토리의 일회적인 재미에 기대 아 재밌었다 하고 휴지처럼 소비하는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단순한 이야기, '스토리'만이 아니라 더 크고 울림이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마주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이면서 완전해지는 인간.
"게드는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며, 다만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를 자기 이름으로 이름 지음으로써 자신을 완전하게 한 것이다. 그로써 그는 한 인간이 되었다."
아주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시리즈를 쭉 읽다 보면 작가의 여성관 변화도 느껴진다 해서 궁금하다. 계속 이어서 읽을 생각.
또 게드가 학교에서 비뚤어진 경쟁심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소환하고,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나타날 때 묘사가 인상 깊었다. "그것은 세계라는 커다란 천을 찢어 벗겨 내고 있었다." '세계라는 커다란 천'. 세계를 한 장의 천으로 묘사하는데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를 다르게 보게 하는, 진실되며 정확한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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