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의 방문>은 처음 읽었을 때 진짜 강렬했던 희곡이었다. 미친듯한 전개에 빨려 들어 와씨; 천재네ㄷㄷ 하며 읽었던 게 기억나는데 다시 봐도 좋았다.
엄청나게 부유한 노부인이 파산 직전의 옛 고향에 찾아와 과거 자신과 뱃속의 아이를 버린 옛 연인 일을 죽인다면 시에 수천억, 시민들에게 수천억을 주겠다며 정의를 돈으로 사겠다는 설정부터 시쳇말로 '쩐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냐며 거부하지만 점점 대책 없이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는 걸 지켜보며 일이 느끼는 공포의 묘사도 근사하다. 다들 노란 새 구두를 신고 있다고 발작하고 도망치려 역에 갔다가 사람들한테 둘러싸이니까 내가 기차에 오르려 하면 날 끌어 내릴 거지! 소리 지르며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같이 핑글 도는 것 같다.
마침내 일이 클라라에게 저지른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만 당신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죽어줄 수는 없다며 자살은 거부하는 것도 좋고.
일의 살해 장면도 좋은데 상황 모르는 언론인을 투입해 장면을 비트는 것에 감탄했다. 모든 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죽음을 결의하는 장면이 리포터의 눈에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맹세로 보이고 만장일치의 살해 선고에 신을 부르짖는 일의 탄식은 '기쁨의 탄성'으로 해석되는 장면.
종교인인 신부와 지식인이 흔들리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일의 공포를 모르는 척 하던 신부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인간인 우리는 너무 약하다며 엄청난 부의 유혹을 인정하고 일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도망치라 외치는 대목. 그러나 한 순간일 뿐 신부는 결국 일의 죽음에 침묵하고.
지식인인 교장은 이것이 그저 단순히 일의 개인적인 죄악만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저런 노부인이 올 것이며 우리 모두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해석을 내리기도 하고 "우리의 가난이 영원히 지속되더라도" 언론에 진실을 말하겠다며 한 순간 떨쳐 일어나지만 결국 주저앉고 만다.
시민 사회는 물론이요 종교건 지식이건 무엇 하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세상. 마지막 일의 죽음으로 한껏 부유해진 시민들이 고대 그리스 비극 합창단처럼 자신들의 행복을 장엄하게 노래하고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영화도 있고 독일어 뮤지컬도 있던데 뮤지컬에서 클레어의 노래가 굉장히 호쾌하다. 들으면 속이 다 뻥 뚫린다.
<물리학자들>
물리학자들이 핵무기를 만들어 '죽음이며 세상의 파괴자'가 되고 그 위력을 온 세상이 목도한 후, 치열한 냉전으로 양 진영이 미친듯 핵무기를 뽑아내던 시대의 산물인 작품.
인간의 두뇌로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핵을 만들어낸 물리학자 얘기 좋아하고 뒤렌마트도 좋아하는데 기대가 너무 컸는지 엄청 좋지는 않았다.
정신병원의 환자인 물리학자들은 사실 미치광이가 아니었지만 그들을 치료하던 원장이 진짜 정신병자였다는 아이러니나 자신들의 지식이 지닌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우리를 인류에게 풀어 줘서는' 안 된다고 결의하고 정신병자인 척 뉴턴, 아인슈타인, 솔로몬 흉내를 내자던 물리학자들이 "한 번 생각한 것은 더 이상 취소될 수 없"으며 그들의 희생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진짜 미친 것처럼 돌연 관객을 응시하고 자신들을 뉴턴, 아인슈타인, 솔로몬이라 소개하는 마무리도 강렬하다면 강렬한 장면인데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물리학자 소재 희곡으로는 키파르트가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소재로 쓴 <J. 오펜하이머 사건에서>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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