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부터 읽은 올해 첫 책이었는데 좋았다.
사실 르 귄의 단편 모음집인 줄 알고 집었다가 에세이라 당황했는데 읽기 잘했음.
서문에서 초판의 he를 they, she, one 등으로 수정했다는 내용부터 눈길을 끌었다. '최종적으로 he가 의미하는 것은 he 외에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 여성의 존재가 남성대명사에 '포섭되는' 일은 없고 '사라져'버리며 글을 쓴 사람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마저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 강하게 와 닿았다.
예술론, 창작론, SF․판타지론, 여성주의 등등 많은 면에서 옮겨 적고 싶은 구절이 많았다.
'지금 시점에서는 리얼리즘이야말로 우리 존재라는 놀라운 현실을 이해하거나 그려내기에 가장 부적합한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였다.
작명할 때 이름을 '들리는 대로 쓴다'는 얘기도 흥미롭고. 일단 창작자가 창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나한테 재미 보증 포인트다. 흥미가 안 갈 수가 없음.
"악성과 자기 자신의 밀접한 관계를 부인하는 사람은 곧 자신의 현실을 부인하는 셈이다. 그런 사람은 만들거나 이룩할 수 없다. 부수거나 해체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말도 계속 곱씹게 된다. 요즘 나는 나 자신의 악성에는 눈감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부수고 해체하는 것뿐이라는 거 기억해야 한다.
읽으면서 새로 읽고 싶은 책도 생겼는데 자먀찐의 <우리들>.
르 귄이 최고의 SF라고 말해서 궁금해졌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번역본 있던데 읽어봐야지. 쏘련 SF 좋음.
좋은 얘기들이 참 많았지만 이 문장이 오래 기억난다.
"내가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진실은, 논리적으로 정의하자면 거짓이다. 심리학적으로 정의하자면 상징이다. 미학적으로 정의하자면 은유다."
자꾸 곱씹게 된다. 진실은, 논리적으로는 거짓, 심리학적으로는 상징, 미학적으로는 은유. 완벽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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