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나면 가끔 다른 사람들 감상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는데 그러다 플라톤의 이 책을 방탄소년단의 RM이 읽었다는 글을 봤다. 무슨 방송에서 대기하면서? 읽고 있었다고.
사진 속의 저 붉은 책.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와 <메논>을 천병희가 번역해 도서출판 숲에서 낸 책인데 내가 읽은 거랑 같은 판본이라 뭔가 반가웠다. 겉에 종이 표지 벗기면 저렇게 된다.
<파이드로스>는 생각보다 좋았다. 맑고 화창한 여름날 강가에서 소크라테스가 젊고 아름다운 파이드로스와 사랑과 수사학에 대해 얘기한다는 설정 자체가 좋았고, 아득한 시간을 넘어 거의 2천4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대화를 본다는 것도 좋았다.
소크라테스는 일리소스 강변에서 아름다운 연동 파이드로스를 만나는데 파이드로스의 구애자 뤼시아스가 소년에게 사랑에 대한 연설을 했다는 걸 알게 된다. 연설을 좋아하는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게 뤼시아스가 한 말을 알려 달라 부탁하고 두 사람은 우거진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대화를 나눈다.
이성 간의 사랑보다는 성숙한 남성과 지도를 받아야 할 젊은 소년 간의 동성애를 찬미한 고대 그리스인답게 이들이 말하는 사랑은 나이 든 남성과 젊은 남자의 사랑이다. 하지만 읽으면 그냥 남녀노소 성별 연령 불명 각양각색의 사랑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뤼시아스는 파이드로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연동은 연인보다는 연인이 아닌 자, 즉 파이드로스의 경우 그의 연인이 아닌 뤼시아스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뤼시아스는 연인의 독점욕, 질투, 사랑의 광기, 이성적인 판단이 뒤따르지 않는 아첨 등등으로 연인이 연동에게 해를 끼친다고 설파한다. 반면 연인이 아닌 자는 사랑의 광기에 오염되지 않아 이성적으로 판단해 연동의 앞날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 주고 연동의 청춘이 지나 아름다움이 시든 후에도 그런 우정은 오래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동은 연인보다는 연인이 아닌 사람을 선호해야 한다는 것.
파이드로스는 뤼시아스의 이 연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뤼시아스의 연설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지적하고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한다. 사랑은 일종의 욕구이며 그 비이성적인 욕구가 아름다움의 쾌락 쪽으로 이끌려 다른 모든 것을 정복하고 강한 힘을 가진 게 에로스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뤼시아스처럼 연인이 아닌 자가 연인보다 연동에게 좋은 이유를 얘기한다. 연인은 필연적으로 질투하며 연동이 무력하고 주변의 가까운 사람도 없고 재산도 없어서 오직 자신에게만 기대길 바라기 때문에 연동에게 해롭다는 것이다. 또 연인은 사랑이 식으면 그 전에 늘어놓았던 온갖 듣기 좋은 약속을 모른 척한다 말한다.
그러나 <파이드로스>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을 철회한다. 그는 '에로스가 신이나 신적인 존재라면 결코 사악할 수' 없다며 뤼시아스나 자신의 어리석은 말은 에로스, 사랑을 사악한 것으로만 말하는 죄를 지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두 연인이 방금 자기들의 말을 들었다면 자신들을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야만인들로 여겼을 거라 말하고 파이드로스도 이에 동의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연인의 사랑의 광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신들의 뜻을 아는 신탁과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도 이런 광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그러면서 그는 더 높은 차원, 인간의 혼에 대해 말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신들과 수호신들의 무리가 날개달린 혼들과 함께 하늘의 회전운동에 따라 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지상에 붙박인 시선을 천상으로 돌려 날개 달린 불멸의 혼이 신들과 함께 하늘을 나는 광경을 읊는 게 아름답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인간의 추락한 혼에 다시 신적인 날개가 자라나게 해주는 것이라 말한다.
"날개는 본래 무거운 것을 신들의 종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높이 들어 올리는 힘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몸에 속하는 것들 중에서 신적인 것에 가장 많이 관여한다네."
"인간들은 그분을 날개 달린 에로스라 부르지만, 신들은 그분을 날개 신이라고 부른다네. 그분은 날개가 자라나게 하니까."
그리고 사랑에 빠진 자의 상황과 마음을 연인의 아름다움이 눈으로 흘러 들어와 오랫동안 굳어져 닫혀 있던 날개의 뿌리들이 녹고 혼 전체에서 깃대에 날개가 부풀어 오르는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이 묘사가 참 아름답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리스 시를 읽고 싶어 졌다.
이어서는 자신들이 한 연설을 가지고 수사학에 대해 논하는데 수사학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흥미가 떨어졌다.
<메논>은 소크라테스가 메논과 미덕에 대해 논하는 대화인데 전형적인 소크라테스 문답법으로 전개된다. 미덕이 배울 수 있는 거냐고? 먼저 미덕이 뭔데? 넌 미덕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게 미덕이라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생각하니?
관심 분야도 아니고 <파이드로스>처럼 시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는 것도 아니라 흥미가 덜했는데 대화 상대인 메논이 약간 톡 쏘는 성질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눈 가린 사람도 네가 대화하는 거 들으면 네가 미남이라는 거 알 거야. 왜냐면 넌 토론할 때 명령만 하니까. 얼굴값 하는 애들이 그렇지. 넌 내가 미남에게 약하다는 사실도 아는 것 같고. 이러니까 메논이 태연하게 "당연히 내 청을 들어주셔야죠." 하는 게 웃겼다.
소크라테스 대화 방식 때문에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르게 된 메논이 소크라테스 보고 님은 "외모나 그 밖의 다른 면에서" 전기가오리라고 쫑알거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사람을 마비시킨다면서. 소크라테스 전기가오리설ㅋㅋㅋㅋㅋ
거기다 대고 소크라테스는 난 네가 왜 날 전기가오리로 비교했는지 알아. 잘생긴 애들은 자신들이 어떤 것과 비교되는 걸 좋아하거든. 미인은 아름다운 것과 비교되기 마련이니까 자기들이 유리한 걸 아는 거지. 이러면서 미인들 심리 해부하는 게 소소하게 재미있었다.
천병희 번역에 대한 얘기는 곧잘 들었지만 직접 읽은 건 처음이었는데 참 좋았다. 가끔 어떤 철학책들은 원어도, 한국어도, 한자어도 다 잘 모르는 사람이 셋을 엉망으로 뒤섞어서 이걸 읽으라고 내놓은 건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었는데 천병희의 번역은 진짜 읽으라고 내놓았다는 게 확 느껴졌다. 앞으로 이 분 번역을 쭉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파이드로스>가 좋아서 이참에 사랑에 대한 철학책을 더 읽어보려 찾아봤다.
플라톤이 쓴 걸로는 <향연>, <뤼시스>, <필레보스>, <파이돈>이 있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버트런드 러셀의 <결혼과 도덕>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씩 읽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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