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를 산 동료였던 슈페어와 리펜슈탈 책을 연달아 읽고 든 생각은 슈페어는 무척이나 영리하고 교활하며 리펜슈탈은 설령 거짓말을 할지라도 감정적으로는 솔직하게 느껴진다는 것.
슈페어는 지식인인 자신이 히틀러와 제3제국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던 것도 죄'라고 한다. 아예 맘에 없는 말 같지는 않지만 100퍼센트 진심이라는 생각도 안 든다. 무엇보다 너무나 정확하게 사람들이 나치의 장관에게서 듣고 싶은 걸 찔러주는 말이라 무서울 지경.
제3제국이 몰락한 뒤 난 몰랐고 그냥 히틀러가 시킨 대로 했으니 죄 없고 웅앵웅 변명하는 나치들 속에서 '몰랐던 것도 죄'라고 외치는 슈페어가 얼마나 기특해 보였을까. 예전 동지들 뉘른베르크에서 줄줄이 사형 선고 받을 때 20년 형으로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부터 보통은 아니다.
슈페어가 깊은 반성 속에서 고백하는(것처럼 보이는) '몰랐던 것도 죄'라는 말이 무서운 이유는 결국은 '죄'에 방점이 찍히기보다는 은근슬쩍 '나는 몰랐다'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리기 때문. 그런데 슈페어가 진짜 몰랐을까.
반면 리펜슈탈은 뻔히 기록에 남아 있는 사실들과 위배되는 증언-거짓말도 늘어놓지만 적어도 자기감정을 속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왜 나치냐고 펄펄 뛰면서 나는 당원도 아니었고 당시 독일인들 다 히틀러가 구원자라고 믿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난 그냥 영화를 찍은 것뿐이라고 울고불고 자신의 이름에 떨어질 수 없게 드리워진 오명을 지우기 위해 전 세계와, 말 그대로 역사와 결사적으로 투쟁하는 모습은 반성도 없고 너무 뻔뻔해서 징그러울 정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인상적이다.
'나치의 핀업 걸', '타락한 영화의 여신'. 뉘른베르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당시 독일의 어떤 히틀러 팬보이보다 리펜슈탈의 이름이 강력하게 '나치'와 결부된 세계에서, 역사가 이미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렸는데 한 개인이 자신의 이름과 유산(예술)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고 끝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한 의지가 너무 놀랍다. 그야말로 '의지의 승리'가 따로 없다. 그게 인간으로서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설킬드가 책을 통해 독자를 조심스럽게 이끄는 방향에 별로 동의는 되지 않았지만 기억-증언과 사료가 서로 충돌하고 한 때 깊게 엮여있었던 사람들이 폭풍이 지나간 후 서로 자기의 버전을 역사의 정사로 만들려고 투쟁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리펜슈탈을 '전 세계의 공모에 의해 역사의 각주로 쫓겨났다'고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리펜슈탈은 자신을 역사의 각주로 밀어내려는 세계 전체와 싸웠고.
알베르트 슈페어와 달리 레니 리펜슈탈은 끝까지 사람들이 그녀에게 듣고 싶어 한 말, '내가 잘못했고 미안하다' 이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더 도덕적으로 낫냐와는 별개로 적어도 내게는 겉으로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슈페어보다 사과하지 않는 리펜슈탈이 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 보인다.
촬영기사협회의 역사 프로젝트 담당자 로이 파울러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리펜슈탈은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누구에 의해서, 무슨 이유로, 어떤 기준으로 희생되었는지는 수수께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리펜슈탈의 이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것은 역사가들이 흔히 부딪히는 문제다. 날짜는 일치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역사에는 아주 많은 버전이 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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