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영화 보고 싶은데 영화 보기 싫을 때. 이야기도 인물도 대사도 어쩐지 버겁게만 느껴질 때. 설날에 딱 그런 느낌이라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24 프레임>을 골랐다. 이야기도, 인물도, 대사도 없고 보면서 명상하는 기분이었다. 카메라 움직임도 없어 그저 한 곳에 고정되어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눈이 편했고.
이번 겨울 눈을 못 봤는데 설원, 말, 소, 사슴, 늑대, 새가 나오는 겨울 영화였고 빗소리, 바람소리, 파도 소리, 새가 날아가는 소리, 늑대와 소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ASMR이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새가 날고 눈이 내리고 소와 개가 움직이는 프레임 1로 시작해서 설원에서 서로 희롱하는 두 마리 말을 차창 너머로 보고,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서 잠든 소, 총에 맞아 바다로 떨어지는 새, 눈밭에 모여 있는 흰 양 떼들과 에펠탑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지켜보게 된다.
24개의 단편 중에서 몇몇 편은 자연음이 아니라 올드 재즈, 나비 부인, 아베 마리아, love never dies가 흘러나오는데 영상에 음악이 등장하면 확실히 뭔가 달라서 음악이 영상에 미치는 효과 같은 걸 생각하게 된다. 영상에 음악을 집어넣는다는 건 정말 신중히 택해야 하는 일이다.
좋았던 프레임을 꼽아 보자면 먼저 3번 프레임.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서, 영상 가운데에 소 한 마리가 잠들어 있고 다른 소들이 지나가는 풍경 자체가 좋았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 자체로 뭔가 치유 되는 기분. 마지막에는 소가 깨어나서 해변을 떠난다. 보면서 갑자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인상적이었던 건 9번 프레임이었다.
돌에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으로 초원의 사자 한 쌍이 보이는 장면. 구멍을 통해 서로 다른 차원을 이어놓은 것 같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사자들은 교미를 한다.
13번 프레임에서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바다에서 총소리가 나고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로 뚝 떨어지는 장면. 떨어진 갈매기의 사체가 물에 흔들리고 다른 갈매기가 그 옆을 얼쩡거리던 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15번 프레임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던 에펠탑에 불이 켜지는 순간도 좋았고, 19번 프레임은 물안개 낀 숲의 분위기가 좋았다. 이것도 소가 나오는 프레임이었는데 이 영화에서의 소의 이미지와 분위기가 왠지 마음에 든다. 사슴, 늑대, 까마귀, 갈매기, 오리, 양, 개, 고양이, 사자 등 동물이 많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나는 소가 제일 좋았다.
키아로스타미의 유작인데 love never dies가 흘러나오며 잠든 이의 창문 밖으로 날이 밝는 마지막 24 프레임에 이르면 결국 인간이 최후에 말하는 건 사랑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구원이 있다면 사랑의 불멸성이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사랑은 남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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