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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2019년에 본 '개봉' 영화들

2019년에 나는 무슨 영화를 어떻게 보았나.

2019년에 개봉했지만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는 뺌 (ex 타이페이 스토리)

내가 19년에 본 옛날 영화도 뺌

최근에 만들어지고 2019년에 관객에게 찾아온 영화 중 내가 본 영화 목록, 감상 기록

 

 

로마 / 알폰소 쿠아론

음향 층이 세밀했다. 매번 가던 극장에서 봤는데도 겹겹의 소리 층이 이렇게 체감된 영화는 처음이었다.

 

 

콜드워 /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영상미랑 음악, 배우 요아나 쿨릭이 좋았다. 모든 장면이 사진 같았다.

 

 

더 페이버릿 / 요르고스 란티모스

란티모스 전작들이 더 좋았다.

 

 

캡틴마블 / 애너 보든, 라이언 플렉

 

공짜표 쓰러 보러 감. 인피니티 워, 가오갤 1은 한순간의 쾌락이지만 볼 때의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건 재미도 없었다. 마블이 블랙 팬서 만들 때 블랙 프라이드 신경 쓴 것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캡마의 여성 관객을 신경 썼다면 좀 더 다른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기존 마블 영화보다 여성을 신경 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기존 마블 영화 여성관이 기준이면 그것만큼 허탈하고 힘 빠지는 기준도 없다고 생각함.

 

하지만 영화 보면서 울긴 울었다. 봤을 때 메모해둔 게 없어진데다 본 지 오래되어서 기억이 흐릿한데 캐롤의 비행사 친구가 어린 딸 걱정 때문에 우주로 가는 걸 꺼리던 장면이었다. 그때 딸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 가장 멋진 비행을 나랑 같이 소파에 앉아 tv나 보려고 포기한다고? 엄마는 딸에게 어떤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은 거야?

 

저 장면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더 어렸을 때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저런 거였다. 한 번도 제대로 표현은 못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벌써 침실을 함께 쓰지 않았고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가 싸우던 모습을 여러 번 봤다. 부모님이 가깝지 않고 서로에게 애정은커녕 악감정뿐이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진지하게 이혼하려 하셨는데 난 그때 당연하게(?) 나는 아빠와 함께 살고 엄마가 혼자 집을 나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내게 엄마는 너무나 위대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대단한 사람을 붙잡고 있는 짐이었으니까. 항상 그랬다. 선녀와 나무꾼 얘기에서 선녀를 붙잡아두는 어린 자식에게서 나는 나를 발견했다. 엄마가 자유롭게 떠나는 게 내가 엄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며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제대로 표현 못해서 내 행동을 이해 못한 주변 어른들한테 '저 년 나쁜 년' 소리 들었지만.

 

내게 멋진 표현력이 있었다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가 있었다면 바로 저 스크린 속 소녀가 자기 엄마한테 하는 말을 엄마에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못했고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멋진 모험을 위해 우주로 날아가지 못하고 나랑 같이 소파에 앉아 tv나 봤다.

 

내가 엄마를 날아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짐 덩어리라는 오래된 죄의식, 이 어쩔 수 없는 원죄의식이 건드려지면서 캄캄한 극장에 앉아 영화상이 일렁일 정도로 눈물 줄줄 흘렸다.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

 

사라져가는 언어, 그 언어의 단 둘만 남은 사용자. 이 키워드에 팔랑팔랑 낚여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날아가서 봤는데 내가 관심 있던 '언어'는 작품의 주요 테마가 아니라 도구였고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다 늙은 꼬부랑 할배들의 불같은 치정 싸움에 벙쪘다.

 

거동도 힘들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옛 남친의 오래전 죽은 부인을 질투해서 죽은 할머니의 남은 사진을 불태우고 거기에 분노한 옛 남친은 늙은 남친을 가둔 채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와...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이 영화를 보고 창작자에게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내게 '가까운' 얘기를 하는 게 무조건 작품을 훌륭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만드는 여러 겹 중에 무엇이 옥석인지 가리고 어디까지 다루고 어떻게 표현할 건지 좀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음. 때로는 작품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 바로 그걸 얘기하려고 시작한 작품이라도 작품의 완성도에 방해가 된다면 죽일 줄도 알아야 된다는 것. 그게 '사랑'뿐인 아마추어를 넘어 프로가 되는 길의 초입이 아닐까.

 

할아버지가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굴에 가서 죽은 남친과 대화하는 마지막 장면. 그때 두 사람은 이제는 사라진 언어를 사용해 대화를 나누는데 감독은 너무나 친절하게도 그 비밀의 언어, 둘만의 언어를 해석해서 자막으로 화면에 쾅쾅 박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저 장면에서 자막이 없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번역하지 않던 시크릴어를 그 순간 거기서 커다랗게 스페인어로 하얗게 쾅쾅 박으면서 번역으로 둘의 대화를 모두에게 보여준 게 영화적으로 예술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거기서 다른 언어로 구부러뜨려 기입하지 않았어도 거기까지 영화를 따라 간 관객들은 충분히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늘 어딜 가든 자신이 앉을 의자를 들고 다니던 할아버지가 대화 후 오랫동안 끌고 다니던 의자를 내려놓고 죽은 연인,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동굴 속으로 떠나는 그 장면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아사코 / 하마구치 류스케

 

기대 하나 안했는데 정말 좋았다. 보지도 않고 현대 일본 영화에 대한 편견이 잔뜩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지금 이 시대 일본에서도 놀라운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름을 머릿속에 담아둠.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내가 사는 세상 / 최창환

젊은 사람들이 어딜 가면 다 돈 드니까 그냥 동네 공원에서 캔맥주 까는 거 너무 하이퍼 리얼리즘...

작은 불꽃놀이를 사서 하는 장면이 좋았다. 밤의 벤치에서 한순간 빛나는 작은 불꽃.

 

 

강변 호텔 /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를 먼저 만났지만 내게 마음으로 다가온 첫 번째 한국 영화감독은 홍상수였다.

아직은 개봉날 극장에서 홍상수 영화 보는 걸 끊을 수 없다.

 

 

러브리스 /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러닝 타임 내내 사랑 없는 세계가 펼쳐지는데 영화 보고 나서 문득 "어떤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 무언가를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쇼스타코비치의 말이 생각났다. 사랑 없음을 얘기하는 자는 누구보다 사랑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지 않을까.

 

 

스탈린이 죽었다 / 아만도 이아누치

깔끔하다. 엔딩 크레딧 배경에 사진이 나오는데 숙청된 자들은 얼굴이 삭제되고 존재가 지워진다. 과거의 역사를 조작하고 새로 만드는 1984가 생각났다.

 

엔딩은 첫 장면처럼 마리아 유디나에서 따온 인물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연주하고 공연장에는 초반의 스탈린을 대신해 걸린 흐루시초프의 사진이 보인다. 카메라는 위로 올라가고 가장 앞줄에 앉은 흐루시초프가 보인다. 그리고 한 줄 뒤에 앉아 흐루시초프를 바라보는 자는 훗날 그를 숙청하고 그 자리를 차지할 브레즈네프. 카메라가 올라가는 짧은 장면을 통해 권력의 변화와 무상함을 훑는다.

 

 

김군 / 강상우

 

80년 광주가 무엇이었는지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그때 그 사람들'이 북한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슷한 턱선을 가졌네, 눈매가 겹치네 어쩌네 하면서 사진에 조잡한 선을 그리고 각도를 말하고 그게 엄청난 진리를 드러내는 '분석'이라 주장한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영화는 그들이 말하는 광수 1호로 지명된 사람을 추적한다. 과연 그는 정말 북한군일까? 우리는 그의 이름도 정체(?)도 알지 못하고 오늘날 남은 건 한 장의 사진뿐이다. 무장을 하고 강렬한 눈빛으로 시간을 건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저 자는 북한에서 내려온 광수 1호다. 태극기 부대 앞에서 그는 확성기를 들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친다.

 

35년 동안 내가 저 사람이다 라고 나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진짜 북한군이 아니면 왜 내가 저 사람이라고 나오지 않느냐!

 

그의 목소리는 크고 사방에서 메아리친다.

 

그런 고함 속에서 영화의 추적은 계속된다. 사진을 찍은 당시 기자의 오래된 창고를 살피고 당시의 사람들을 추적해서 인터뷰를 딴다. 누군가는 잊고 싶은데 왜 말해야 하냐 하고 오래된 기억 속에서 누군가는 어 이거 나인 것 같은데, 말하지만 그 주장을 믿기는 어렵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지만 내가 들었다고, 그 자는 북한군이라는 우렁차고 확신에 가득 찬 주장에 비해 그때 그곳에 있었고 역사에 참여했던 당시 사람들의 증언은 쉬이 나오지 않거나 확실하지 않다. 오래되고 희미해지고 때로는 변질되고, 잊고 싶은 기억과 창고에 있던 사진 속을 헤매던 추적은 마침내 한 가닥 실을 잡는다.

 

"어, 저거 김군 아니야?"

 

사진 속의 남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고 그 가느다란 실은 뜻밖에도 그때 광주에 살던 넝마주이로 연결된다. 집도 절도 없이 가족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던 사람들. 사람들이 피 흘리는 것에 분노했으며 우리 같은 사람들도 애국 좀 해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던 사람들.

 

그 실은 생존자 최진수 씨와 연결이 되고 그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80년 그때 민가에서 사살된 넝마주이 김군이라고 증언한다. 정확한 이름마저 알 수 없는 넝마주이,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사람. 그는 민가를 둘러싼 진압군의 부름에 가장 먼저 나갔다. 모두들 제일 먼저 나가는 사람이 죽을 거라 직감한 그 순간에 '김군'은 앞장서서 나간 사람이었고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북한군이 아니면 왜 내가 저 사람이다,라고 나오지 못하냐고 지르던 고함은 오래전에 일어난 이름도 무덤도 시체도 없는 죽음 앞에서 부서진다. 

 

게다가 최진수 씨는 이미 오래 전 광주 청문회에서 그에 대해 증언한 적이 있었다. 영화는 그 후 오랫동안 최진수 씨가 차마 유공자로 등록도 하지 않고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4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는 그때의 일을 말하기 힘들어한다. 눈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죽은 일에 대해. 우렁차게 그 자는 북한군이다, 내가 들었다고 확성기에 소리 지르는 사람과 달리. 그 시절 광주에는 그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도 남겨지지 못한 그 사람들.

 

 

논픽션 / 올리비에 아사야스

아사야스의 여름의 조각들 때도 느꼈는데 1세계 사람만이 찍을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는 너무 멀리 있는 느낌.

 

 

기생충 / 봉준호

볼 때는 정말 재밌었다. 가족들이 한 명씩 부잣집에 들어가는 것도 스피디한 전개가 좋았고 중반 이후 쫓겨난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비 오는 밤에 찾아오고 지하실의 존재가 드러날 때 와, 이게 저렇게 가네, 하면서 더욱 확장된, 파고든 영화 속 세계에 흥미진진하게 봤는데...

 

분명 재밌게 봤는데 보고 나서 곱씹을수록 너무 잔인한 것 같음. 가난한 집 가족들이 자기들 입으로 스스로를 불 키면 스스슥 숨는 바퀴벌레로 비유하는데 너무 잔인하다. 피 튀기고 그래서 잔인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방면의 잔인함.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이 영화 보고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 영화가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닌데 뭔가 좀 그래. 자꾸 '너무 잔인하다'는 말이 계속 맴돈다.

 

 

행복한 라짜로 / 앨리체 로르와커

배우의 영화 밖 모습에서 영화 속 인물을 보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이 영화 보고 나면 배우 사진을 봐도 그냥 라짜로 같음.

 

 

돈 워리 / 구스 반 산트

 

너무 싫었다. 빻은 백인 예술가남 포장하는 영화 좀 그만 만들었으면...

 

레즈 경찰 만평 보고 여자가 불쾌해하는 걸 술 마시던 다른 남자 손님이 어허, 이 작품은 그런 게 아니야! 여성을 두려워하는 남자들! 이 작품이 사실 진짜로 겨냥하는 건 여자들이 아니라 이 멍청한 남자들이야! 이 만화는 오히려 여자에게 힘을 주었단 마링야ㅑㅑㅑ! 불꽃 맨스 플레인 시전하고 백인 예술가남이 우왕 나의 예쑬을 알아주는 사람! 하면서 지들끼리 술잔 돌리고 교감 나누는 장면에서는 짜증이 치밀었다.

 

남자 환자들끼리 '섹시한 간호사' 두고 하는 품평질에 성희롱을 '무해한 섹드립', '성인들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19금 대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것도 개짜증. 영화 속에서는 여자가 직장에서 근무 중에 기꺼이 치마 걷어 올리며 응하고 커닐링구스 받는데 이 영화 보면 걍 애초에 구애와 성희롱의 차이를 1도 고민 안 하고 찍은 영화 같음.

 

과거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 그랬더라도 현재에 와서 그걸 극화하는 건 또 다른 얘기지 않나. 아니 애초에 이 사람을 이 시대에 왜 영화화씩이나 해야 했는지 의문.

 

루니 마라는 정말 너무 아깝고 또 아깝고... 와킨 영화에 루니 마라 끼워 넣는 게 루니 마라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건지 잘 모를... 훌륭한 여성 배우들이 이런 부속품, 남자 주인공 보조 1 역할 맡아서 소비되는 거 너무 속상함.

 

 

지구 최후의 밤 / 비간

예술가남 특유의 후까시 잡는 게 없지는 않다. 대사도 좀 그렇고 카메라에 얼굴 가득 담아 사과 와그작 씨까지 씹어 먹는 장면은 보면서 앗;;; 넹;;;; 스러웠음. 왠지 옛날 왕가위도 생각남. 특히 장국영 나오는 영화...

 

영화에 짙게 흐르는 예술가남 감성이 지금 이 시대에 이런...? 하는 느낌도 들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적 체험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느꼈다. 달밤에 날아오르고 허공에서의 시선으로 땅을 보고, 한 순간인 불꽃이 영원에 가까워지고... 밤에 혼자 보고 싶은 영화였다.

 

 

데드 돈 다이 / 짐 자무쉬

 

이 영화를 두고 거장이 농담처럼 가볍게 만든 영화라는 말을 많이 하던데 그런 수식은 이 영화에 대한 어떤 해석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함.

 

내게는 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의 방향성이 눈에 띄었다.

등을 맞대고 수평에서 다가오는 좀비들을 마지막까지 죽이다 최후를 맞는 콤비, 쌍안경을 들고 멀리 떨어진 수평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은둔자 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역시 그 필드에 속한 자이고... 위로, 수직으로 휙 날아가 버리는 외계인 젤다.

 

그리고 "내가 안전한 곳을 알아." 하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사라지는 아이들. 그들은 영화를 떠나 그 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안전한 곳을 찾아 간 아이들은 빠져나갔고 그 세계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벌새 / 김보라

박지후 배우 너무 예쁨.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받는 것도 좋지만 나의 더 근원적인 갈증과 애탐은 '사랑하고 싶다'였던 것 같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할 만한 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주변에는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들었고 벌새의 은희를 보면서 어릴 적의 감정을 새삼 돌아보았다. 시간이 지나고 건너온 뒤에야 비로소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은희랑 영지 선생님이 서로 만나서 참 다행이야. 사람의 삶에서는 사라지더라도 만남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고 그런 만남의 영향은 끝나고도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니까. 은희는 적어도 아주 힘들 때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잊지 않겠지.

 

 

조커 / 토드 필립스

 

아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싫었다. 이 영화를 평론가들이 무려 찬반 논쟁씩이나 했다는 거 자체가 블랙 코미디 같다. 이게 그렇게 토론의 대상이 될 만한 영화인가?? 진심으로?????? 세상이 지금 나 빼고 몰래카메라 찍는 중임??

 

괜히 이유 없이 와킨 피닉스 호감이었고 조커 보기 전에 와킨이 토크쇼 나온 것도 봤다. 거기서 호스트가 조커 찍으면서 체중 조절하는데 힘들었겠다, 친구들이랑 저녁 먹을 때도 불편하잖아 이런 식으로 말하니까 와킨이 난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야 대충 이렇게 말하는 대답에 꽂혔는데... 조커를 보고 영화가 너무 싫어서 이런 좆같은 영화에 출연해서 이걸 진지하게 연기한 배우에 대한 호감까지 깡그리 날아갔다. 정 털린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실감할 정도.

 

존나 후까시 잡고 영화 밖에서 스아실,,, 이 장면의,,, 이거슨,,, 이런 심오한,,, 뜻이,,, 있었습니다,,,! 하는 거 알맹이 없으면 존나 xx 같고 창작자 자위질이라 생각하는데 조커가 내게 그런 영화였다. 아 진짜 싫어... 너무 싫다. 알맹이 없이 겉멋만 들어서 예술가연 하면 ㄹㅇ 답이 없는데 토드 필립스가 글케 보임.

 

이 영화 두고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많이 얘기하던데 난 사실 택시 드라이버도 좋아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싫어하지만 그래도 거기엔 어떤 영화적인 분위기와 에너지, 공기가 있다. 조커에서는 그런 걸 볼 수 없었다. 겉멋만 잔뜩 든 예술가남들이 옛날 영화 카피하면서 크으으으 이거시 진정한 영화지여 요즘 영화들은 넘나 연함 어휴 하면서 뭉쳐 만든 영화 같음. 이런 애들이 다른 작품에 '보x냄새 나는 작품' 운운하는 그런 전형적인 예술가남 같음.

 

2019년에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박수받고 상 받는 세상이라니. 영화 보고 나니 지구 탈주하고 싶어 졌음.

 

 

아이리시맨 / 마틴 스콜세지

 

난 마틴 스콜세지랑 잘 안 맞는 듯. 무간도 리메이크한 디파티드는 와 양놈들은 이걸 이렇게 만드네, 하면서 유명 감독과 네임드 배우들이 뭉쳐 만든 믿을 수 없는 똥망작에 기함했고 사일런스도 취향 아니었고 셔터 아일랜드는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 안 나고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필사의 연기쇼가 기억에 남는다. 약 빨고 온 몸으로 몸부림치던 장면이었는데 흡사 차력을 보는 느낌이었어. 택시 드라이버는 강렬한데 좋아할 수 없는 작품이었고.

 

암튼 아이리시맨은 강렬한 비애를 덜어낸 갱스터물의 마지막 장이라는 느낌이었다. 자신들의 시대를 뜨겁게 불태웠고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강을 건너 늙은 감독과 늙은 배우들이 만들 수 있는 영화. 보면서 스콜세지의 다른 영화보다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가 떠올랐는데 그 거대한 시리즈에 대한 이 시대의 냉정한 응답이자 마무리 같았다. 특히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대부 3에서는 예쁘고 잘나고 내보석 내꿈 내별 내희망 온갖 우쭈쭈쭈하는 대부의 딸이 웅장한 계단 위에서 아버지 잘못 때문에 대신 총에 맞고 거기에 알 파치노의 얼굴이 가득 클로즈업되면서 엄청난, 그러나 소리 없는 비명이 가득 잡히고 비통함과 비애의 강렬함이 넘실거린다. 그 파토스로 똘똘 뭉치고 딸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도구이고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버지'의 비극인 장면, '아버지(대부)'의 얼굴에 초점이 맞춰진 대부보다는 아이리시맨의 차갑고 냉정한 부녀 관계가 그런 인생을 산 남자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받는, 피할 수 없는 합당하고 건조한 대가인 것 같았다.

 

한 때 피로 집을 물들였던 왕년의 페인트공은 쫄딱 늙어서 양팔에 목발 하나씩 끼고 은행원인 딸 보려고 은행 줄 서 있다가 겨우 딸 부르면서 다가가는데 딸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 한 마디도 안 나누고 그냥 휙 떠나버리는 거.

 

대부가 싸나이의 심금을 울리는 갱스터 판타지라면 아이리시맨은 판타지를 덜어내고 보다 성숙한/노년의 관점으로 늙음과 그런 삶이 다다른 최후를 응시하는 느낌. 작품 속 인물들 하나하나를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차고에서 총 몇 발 맞고 죽음, 차에서 총 몇 방 맞고 죽음, 감옥에서 죽음, 등등으로 자막으로 굳이 굳이 표기하는 방식도 그렇고.

 

근데 난 아이리시맨보다 대부가 더 좋다. 아이리시맨은 참 깔끔한데 감동은 못 느끼겠다.

 

 

윤희에게 / 임대형

 

내 취향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감흥은 없었다. 겨울, 고양이, 눈, 달, 보내지 않은/못한, 오랜 시간이 흘러 비로소 도착한 편지, 기차, 필름 카메라, 예쁜 인테리어, 포근한 담요와 체크무늬 이불, 잠옷과 카디건 등등 내가 좋아하는 거 다 있는데 내면이 울리지 않았다.

 

장면 장면,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 윤희가 뒤를 돌아보며 과거를 마주하는 장면, 눈 쌓인 밤의 골목에서 하늘을 보며 만월을 얘기하는 남자의 '뒷모습', 장면 장면들을 아름답고 좋은데 왜 내겐 전체적인 무언가로, 손 쓸 수 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다가오지 못할까. 편지로 열고 그에 대한 답장으로 닫는데 여러 모로 잘 짜인 영화 같았다.

 


 

2019년 개봉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영화

 

아사코 / 하마구치 류스케

행복한 라짜로 / 앨리체 로르와커

지구 최후의 밤 / 비간

 

세 영화 다 내가 본 감독의 첫 영화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어 지는 영화였다.

 

+ 감상을 써서 남기고 싶은 영화는 데드 돈 다이

 


 

2019년에도 게을러서 못 본 영화들이 많다.

매년 후회하는데 게으름을 떨쳐내는 게 너무 어렵다.

게으름 속에서 사는 게 너무 익숙하다.

 

지금 생각나는 2019년에 못 본/안 본 영화는 레토.

취향일 것 같은데 제때 극장에 못 갔다.

결혼 이야기도 봐야 하는데 계속 미루고만 있고.

 

2020년 새해에는 좀 더 부지런히 새로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러 가야지.

매년 좋은 영화들은 나오는데 내가 귀찮고 게을러서 놓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볼 수 있는데도.

 

그리고 보고 나서 바로 감상 쓰는 것도 습관 들여야겠다. 바로 안 쓰면 까먹음.

폰으로 메모는 해두는데 따로 감상 안 쓰면 기억에 남지 않는다.

매번 똑같은 다짐 하는데 실천에 옮기기가 어렵다.

 

2020년 1월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랑 <사마에게> 보려고 한다.

둘 다 놓치지 말고 제 때 영화관 가자. 감상도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