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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배반자의 글과 분리되지 못한 글-<아버지의 자리/어떤 여인>, 아니 에르노

옛날 홍상희 번역으로 읽었다. 다른 번역 제목은 <남자의 자리>, <한 여자>.

 

얼핏 봤는데 역자별로 뜻이 아예 다른 문장도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다르다. 작지만 한쪽에는 아예 없는 문장도 있고... 뭐가 더 원문에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홍상희 번역이 굉장히 직역이라는 건 알겠다.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는 서두에 '글을 쓴다는 것은 배반한 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장 주네의 말을 명시해두는데 진짜 똑똑하다. 자기가 쓴 글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자리는 배반자의 글이다. 아비와 그의 자리, 그의 삶을 버리고 상위 계층으로 간 딸이 아비가 죽고 '나는 그를 배신했다'를, 그리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느끼고 쓰는 글. 돌아갈 수 없는 배반자가 내가 버린 것들을 글로 붙잡는 것.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우리는 이런 배반자들의 글을 종종 봤다.

 

어머니의 죽음인 <어떤 여인>도 계층이 다른 부모가 글이 되는 기본 스탠스는 비슷하다.

 

"엄마는 역사가 되어야 했다. 엄마의 소원대로 내가 들어갔던 지배하는 세계, 말과 생각의 세계에서 내가 외로움을, 그리고 어색함을 덜 느끼기 위해서."

 

하지만 나의 떠남-배신을 명료히 자각한 채로 돌아보는 <아버지의 자리>와 달리 <어떤 여인>은 모든 게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글이라는 게 순간순간 드러나서 재미있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감정배설로 전락하지 않으려 팽팽한 긴장을 놓지 않고 문체 자체도 축축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조한 문장 아래 스며나오는 정념은 아버지보다 엄마 얘기가 훨씬 더 강렬하다. 아빠 딸보다는 엄마 딸인 사람들은 더욱 더 이런 차이를 그냥 넘어가지 못할 거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정념. 엄마는 아비보다 더 격렬하게 사랑했고 그만큼 더 격렬하게 증오했기에. 그리고 이 사랑과 증오는 엄마의 육체가 죽었다고 그냥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흥미로웠던 건 <아버지의 자리>의 화자는 끝에 도달해서 아버지를 '비가 오나 해가 쨍할 때나' '이 기슭에서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고 서술한다. 자신은 가지 못한 상위 세계로 딸을 건네준 사공이라는 해석을 통과한 이미지.

 

반면 어떤 여인의 화자가 마지막에 도착해 말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사공처럼 선명한 상이 아니다.

 

"이제 다시 엄마의 이미지는 내가 어린 시절에 엄마에 대해 가졌었다고 상상이 되는 모습, 내 머리 위에 떠도는 넓고 하얀 그림자가 되어가려 하고 있다."

 

더 재미있는 건 저 명료한/해석 불가한 이미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사는 달랐다. 아버지의 육체적 이미지는 크게 감각적으로 그려지지 않지만 어머니는 육체적으로 그려진다. 붉은 색으로 염색한 금발, 향수, 살이 찌고 또 빠지고, 슬립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 등등.

 

읽고 있으면 화자가 육체적으로도 어머니와 더 가까웠다는 게 느껴지는데 이 어머니의 육체가 '나'랑 완벽히 분리되지 않은 육체라는 것도 드러난다. 아버지의 성기는 관찰의 시선에 잠깐 드러났다가 이내 가려지는 것이지만 어머니의 성기는 꿈에서 나의 성기이자 어머니의 성기이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도달하면 육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던 아버지는 하나의 뚜렷한 삽화가 되지만 강렬한 육체성이 드러나던 엄마는 결코 선명한 이미지로 정리되지 않는 게 재밌다.

 

나와 분리된 것은 거리를 두고 '그는 ~이다' 정의를 내리고 표현할 수 있지만 분리되지 못한 것, 나와 너무 가까운 것은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해석하거나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다.

 

부모가 죽고 산 자식이 죽은 부모에 대해 쓰는 같은 구성이고 부모와 자식의 서로 다른 계급 서사로만 보면 두 작품은 그냥 대상이 하나는 아버지고 하나는 어머니라는 차이 뿐이다. 하지만 그 속의 정념이나 태도를 뜯어보면 비슷한 듯 다른 차이가 흥미롭다. 글 쓰는 자세부터 아버지의 자리의 태도가 회고적이라면 어떤 여인은 보다 현재적이기도 하고.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자리>

 

지금 내가 엄마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이제 내가 엄마를 세상에 낳기 위해서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그녀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그녀가 살아있는 어떤 장소들, 어떤 시기를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다.

<어떤 여인>

 

그때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았음, 분리-배반의 자각 때문에 쓰는 글과 그 사람을 세상에 낳기 위해, 다시 한 번 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쓰는 글은 다르다.

 

분리/배반이 있었기에 글쓰기가 촉발된 <아버지의 자리>에서는 화자가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내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세계,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그 문턱에 버렸어야 했던 나의 유산, 그것을 밝히는 작업을 끝마쳤다."

 

배반자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딸은 아버지가 죽은 후의 세계로 건너간다.

 

하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글인 어떤 여인은 있는 힘껏 엄마에 대한 진실에 닿으려던 글에서 가장 마지막에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고백하고 말아버린다. 결국 이 화자에게 엄마의 죽음은 결국 어떤 의미로는 '나'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라는 여인과 과거의 나였던 어린아이를 결합시켜주는 것, 그것은 바로 엄마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들, 두 손, 몸짓들, 그녀 특유의 웃는 방식, 걸음걸이들이다. 내가 나온 세계와의 마지막 끈을 나는 잃었다."

 

 

+

 

픽션이건 논픽션이건 누군가 죽은 뒤 산 자가 죽은 자에 대해 쓴 글에 관심이 간다. 나로서는 더 이상 그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받아들이기 쉬워서다. 그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말을 누구를 위해 한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 기어이 입을 열고 글을 쓰는 자들에게 관심이 가고 그들은 무슨 말을 왜 하는지를 보게 된다. 말하는 이들의 이유와 태도와 목표는 다양한데 보면 어떤 글은 다 읽고 났을 때 말하는 이에게 결국 그 사람의 죽음은 자신이 아닌 타자의 죽음이었다는 게 확실해지는 글이 있고 그 사람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는, 어떤 일부분은 지금 말하는 자의 죽음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 있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자의 말과 그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일정 부분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자들이 뱉어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