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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 읽고 잡생각

 

《그리스 로마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세네카, 키케로, 플루타르코스의 글들이 묶인 책으로 읽었다. 좀 두껍긴 한데 여러 권 손댈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제일 재미있었던 건 플루타르코스의 <소크라테스의 수호신>.

 

거사 전날의 갈등과 대화, 비장한 순간, 새로 등장한 사람들과 사건들, 예상치 못한 반전의 반전까지.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이 살아 숨 쉬었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의 <결혼에 관한 조언>은 요즘 세상에 굳이 이런 글까지 번역해서 일반인 대상 책으로 나와야 하나 싶었다. 학술적 의미나 역사적 의미는 있겠지. 그런데 이걸 굳이 2020년의 독자들이 봐야 하나?

 

시대 감안해서 옛날 글들 빻은 거 잘 보는 편인데도 이건 정말 너무 역해서 이런 얘기라고 뭐 하나 예시로 옮기기도 싫을 정도다. 읽는 내내 요즘 세상의 어지간한 개저 틀딱들도 이 책에 나오는 얘기를 사람 면전에서 대놓고 하지는 못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가 궁금해서 구한 책이었는데 이것도 나랑 맞지는 않았다.

 

단테가 베아트리체 죽었을 때 키케로의 이 글을 읽으면서 위로 받았다던데 왜 위로가 되었는지는 알 것 같다.

 

라일리우스는 친구 스키피오가 훌륭한 삶을 살았기에 하늘의 신들에게로 갔을 거라고 한다. 설령 사후가 없더라도 죽음이 그냥 끝이면 나쁜 것도 없으니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라가 있는 한 스키피오는 존경받을 거라고 믿는다. 로마의 이 건실한 정신은 그렇게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텍스트화 한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이 부분이었다.

 

"나는 스키피오가 불상사를 당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일세.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나에게 일어난 것이겠지. 하지만 자신의 불행 때문에 지나치게 괴로워한다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이라네."

 

너무 맞는 말이라서 속이 쓰릴 정도였다.

사실이다. 그의 죽음은 그의 고통이 아니라 나의 고통이고 내가 껴안고 구르는 건 죽은 이가 아니라 나의 병이고.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분명하고 확실한 세계, 건강한 정신에는 어쩐지 마음이 가지 않는다. 똑 떨어지는 반듯한 생각과 쾌적한 정신은 논리정연한 언어를 내놓는다. 그리고 내가 관심이 가는 건 그 반듯한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의 죽음을 명쾌하게 텍스트화할 수 없는 이들이 온갖 방법으로 쥐어짜 내는 무언가 쪽이다.

 

매끄러운 말일수록 믿지 못하는 병, 어딘가 저 너머에 '찐'이 있을 거라는 병, 텍스트에 진짜를 요구하는 병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정에 관하여>를 읽으며 신, 사후 세계, 영혼의 불멸성, 공동체의 역사 등 어떤 초월적인 이상을 믿는 자와 믿을 수 있는 게 없는 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믿는 자와 믿음 없는 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산다. 믿는 자의 반석 위에 선 말이 아니라 믿음 없는 세상의 고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가 궁금하다.

 

이상을 믿는 부류에는 예술을 믿는 자들도 들어갈 텐데 요즘 들어 마치 신을 믿는 것처럼 예술을 믿는 자들의 작업은 점점 더 취향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죽은 이를 나의 작품에서 나의 예술로 한 순간 되살린다는 야망이 흐르는 글들.

 

전에는 저런 순간에 감동받았는데 이제는 당신의 예술이 대체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들며 조금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마치 내가 신처럼, 라자로에게 일어나라 하는 예수처럼, 나의 예술을 통해 죽은 자를 작품 속에 일으켜 세웠노라 하는 자들. 죽은 이가 되살아나는 순간은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 기꺼이 마음을 내놓기가 조금 어렵다. 예술의 초월적 광채를 휘두르는 거 말고, 신 흉내를 내는 거 말고, 예술이 죽은 이를 대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