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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번역 비교] 어둠의 심연(을유)/암흑의 핵심(민음사)

 

한국에는 조지프 콘래드의 《Heart of darkness》가 '어둠의 심연' 또는 '암흑의 핵심'으로 번역되어 있다. 어둠의 심연과 암흑의 핵심이라니.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제목부터 이렇게 다른 걸 보면 본문의 번역도 느낌이 꽤 다를 것 같았다. 을유문화사 이석구 번역의 《어둠의 심연》과 민음사 이상옥 번역의 《암흑의 핵심》을 원서와 비교하며 읽었다. 확실히 달랐다.

 

 

번역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부분을 몇 부분 뽑아 을유문화사 어둠의 심연, 민음사 암흑의 핵심,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낸 원서 순으로 적어 보았다.

 


 

 

 

그는 어떠한 일도 창의적으로 시작하지 못했고, 단지 판에 박은 일과만 해낼 수 있었네—그뿐이야. 하지만 대단했네. 비록 사소한 것이지만, 도대체 무엇이 그와 같은 부류를 지배할 수 있는지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다는 점에서 그는 대단한 존재였네. 그는 그 비밀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지. 어쩌면 그의 내부는 텅 비어 있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한순간 들었는데, 왜냐하면 그곳에는 외부의 견제가 없으니까 말일세. 한때 온갖 열대의 질병이 교역소의 모든 '직원'들을 쓰러뜨렸을 때, 그가 이처럼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네. '이곳으로 나오는 사내놈들은 속이 비어 있어야 한다.' 마치 이 말이 그가 지키고 있는 어둠의 심연으로 통하는 문이라도 되는 양, 그는 예의 그 미소로써 얼른 이 발언을 봉인해 버렸다고 하네. 당신은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그 문은 닫혀 봉인된 것이지.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이석구 옮김

 

 

 

그는 어떤 일도 창의적으로 시작하지는 못했고 일상 업무만 진행시키고 있었을 뿐이야. 그게 모두였어. 그러나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지. 그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이 그런 사람을 제약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할 수가 없다고 하는 바로 그 미미한 사실뿐이야. 그는 그 비결을 한번도 밝힌 적이 없었어. 아마도 그의 뱃속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질 않았을 거야. 이런 의심이 들면 망설이지 않을 수 없지.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무런 외면적 잣대가 없었으니까. 언젠가 한번은 여러 종류의 열대 지방 열병이 그 주재소에 근무하던 직원들을 거의 모두 몸져눕게 한 적이 있었지. 그때 그는 <이곳에 나오는 사람들은 뱃속에 창자가 들어 있어선 안 되지>라고 말하더군. 그는 그 특유의 미소로 그 말을 봉인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관리하고 있던 암흑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닫아 버리는 것 같았어. 우리가 그 세계의 면모들을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 세계는 봉인되고 만 거야.

 

 

-《암흑의 핵심》, 민음사, 이상옥 옮김

 

 

 

He originated nothing, he could keep the routine going—that's all. But he was great. He was great by this little thing that it was impossible to tell what could control such a man. He never gave that secret away. Perhaps there was nothing within him. Such a suspicion made one pause—for out there there were no external checks. Once when various tropical disease had laid low almost every 'agent' in the station, he was heard to say, 'Men who come out here should have no entrails.' He sealed the utterance with that smile of his, as though it had been a door opening into a darkness he had in his keeping. You fancied you had seen things—but the seal was on.

 

 

 

 

현지에서 임시 고용한 '식인종' 우두머리와의 대화

 

'놈들을 잡여.'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이를 히뜩 보이며, 그가 매섭게 되받더군. '놈들을 잡여. 우리께 줘여.' '너희들에게, 응?' 하고 내가 물었네. '그놈들을 가지고 뭣 하려고?'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네. '먹져!' 그러고는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태도로 당당하게 안개 속을 노려보았네.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이석구 옮김

 

 

 

<저 녀석들을 붙잡으세요.> 그 녀석은 핏발이 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예리한 이빨을 번뜩이면서 말하더군. <붙잡으세요. 붙잡아서 우리에게 주세요.> <너희들에게?> 내가 물었지. <그들을 어떻게 하려구 그래?> <먹으려구요!>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나서 난간에 팔꿈치를 기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위엄 있는 태도로 안개 속을 바라보고 있었어.

 

 

- 《암흑의 핵심》, 민음사, 이상옥 옮김

 

 

 

'Catch'im,' he snapped, with a bloodshot widening of his eyes and a flash of sharp teeth-'catch'im. Give'im to us.' 'To you? eh?' I asked; 'what would you do with them?' 'Eat'im!' he said, curtly, and, leaning his elbow on the rail, looked out into the fog in a dignified and profoundly pensive attitude.

 

 

 

 

 

 

그의 표정에 나타난 변화를 닮은 그 어떠한 것도 나는 이전에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라네. 아, 나는 감동받지는 않았지.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눈앞을 가리던 베일이 찢어진 것 같았지. 나는 그의 상앗빛 얼굴에서 음울한 자부심과 냉혹한 권력, 심약한 두려움을, 극심하고 절망적인 좌절을 보았네.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지고의 순간에 그는 자신의 삶을, 욕망과 유혹과 굴복의 모든 사건들을 다시 경험하고 있었던가. 어떤 환영을 향해, 어떤 환상을 향해 그가 속삭이듯 외쳤네—두 번 외쳤는데, 그것은 숨결같이 약하디약한 외침이었지.

'끔찍하다! 끔찍해!'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이석구 옮김

 

 

 

 

그때 그의 표정에 나타난 변화와 비슷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야. 오, 내가 그 변화에 감동했다고는 할 수 없고, 오직 매혹되었을 뿐이지. 마치 베일이 찢어지면서 어떤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 그 상앗빛 얼굴에서 나는 음침한 오만, 무자비한 권세, 겁먹은 공포, 그리고 치열하고 기약 없는 절망의 표정이 감도는 것을 보았거든. 완벽한 앎이 이루어지는 그 지고한 순간에 그는 욕망, 유혹 및 굴종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세세하게 되살아보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는 어떤 이미지, 어떤 비전을 향해 속삭이듯 외치고 있었어. 겨우 숨결에 불과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두 번 외치고 있었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 《암흑의 핵심》, 민음사, 이상옥 옮김

 

 

 

 

Anything approaching the change that came over his features I have never seen before, and hope never to see again. Oh, I wasn't touched. I was fascinated. It was as though a veil had been rent. I saw on that ivory face the expression of sombre pride, of ruthless power, of craven terror—of an intense and hopeless despair. Did he live his life again in every detail of desire, temptation, and surrender during that supreme moment of complet knowledge? He cried in a whisper at some image, at some vision,—he cried out twice, a cry that was no more than a breath—

"'The horror! The horror!'

 

 

 

 

 

나는 머리를 들었다. 검은 구름의 둑이 앞바다를 막고 있었고, 지구의 끝까지 뻗은 고요한 수로가 어두운 하늘 아래 음산하게 흐르다가, 거대한 어둠의 깊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이석구 옮김

 

 

 

내가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앞바다는 강둑 같은 시커먼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곳까지 나 있는 그 고요한 물길은 찌푸린 하늘 아래서 음침하게 흐르면서 어떤 엄청난 암흑의 핵심 속으로 통하고 있는 듯 했다.

 

 

- 《암흑의 핵심》, 민음사, 이상옥 옮김

 

 

 

 

I raised my head. The offing was barred by a black bank of clouds, and the tranquil waterway leading to the uttermost ends of the earth flowed sombre under an overcast sky—seemed to lead into the heart of an immense darkness.

 


 

 

을유문화사는 캔버스, 에센스 같은 영어 단어를 그대로 옮기는 경우가 조금 있었고 민음사는 한자어 사용이 상당히 많았다. 소모사(梳毛絲)나 고사(枯私-말라 죽은 나무를 묘사하는 말이니까 枯'死'가 맞을 텐데 왜 한자를 저렇게 표기했는지 모르겠다-), 행동인(行動人) 같은 단어들이 곧잘 튀어나왔다.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내 취향에는 을유문화사의 《어둠의 심연》 쪽이 더 좋았다. 원문의 분위기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우리말 단어를 고르는 감각이 을유문화사 쪽이 더 섬세했다.

 

사실 제목부터 암흑의 핵심보다는 어둠의 심연이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Heart of Darkness》를 더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어둠'과 '암흑'의 차이는 그렇다고 쳐도 '심연'과 '핵심'의 차이는 거의 아득할 정도다. 

 

어둠의 '심연'이라고 하면 한정 없는 깊이를 생각하게 된다. '심연'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인간 이상의 것이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나 '핵심'은 핵심 자체를 곱씹게 되기보다는 반사적으로 핵심이 아닌 것들, 암흑의 겉절이(?) 같은 것들까지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또 핵심이란 단어는 응축되어 있어서 물성이 느껴진다. 물성이 강한 단어는 물성을 벗어난 단어보다 인간에 더 가깝지 않나? 심연이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면 핵심은 꼭 손에 단단히 쥘 수 있을 것 같다.

 

콘래드는 문학이 '정신적이고도 감정적인 시공간의 분위기를 창조'하고 '마법적 암시성'에 도달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어둠의 심연이 나를 감싸며 무한한 깊이로 끌어들인다면 암흑의 핵심은 거리를 둔 채 멀뚱멀뚱 빤히 쳐다보게 된다.

 

'암흑의 핵심'이라 읊조릴수록 마법적인 암시는 멀어지고 왠지 모르게 수학의 정석이 떠오른다. 확실하고 단단하며 커다랗고 검은 글자를 또박또박 읽을 때 옹골찬 주먹이 쾅쾅 박히는 것 같은 느낌. 번지고 퍼지며 틀을 뛰어넘는 무정형의 단어보다는 건실한 사각형 같은 단어.

 

그 유명한 커츠의 마지막 외침 "The horror! The horror!"도 '무서워라'보다는 '끔찍하다'가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커츠가 최후의 순간 자신의 모든 삶을 되돌아보며 '끔찍하다'고 외칠 때는 전율하게 되지만 '무서워라'는 어쩐지 'The horror! The horror!'의 압도적인 무게에 비해 김이 빠진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이 일차적으로 감각에 호소하는데, 만약 화답하는 감정을 낳는 비밀스러운 원천에 도달하기를 진정으로 소망한다면, 예술적인 목표는 글로써 스스로를 표현할 때도 감각을 통해 호소해야 합니다. 그것은 조소의 가소성과 그림의 색채와—예술 중의 예술인—음악의 마법적 암시성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가소성과 색채에 다가가는 것은 형태와 내용을 완벽하게 혼합하려는 완전하고도 확고한 헌신적 노력을 통해서만, 문장의 형태와 울림을 추구하며 결코 낙담하지 않는 중단 없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또한 그런 노력을 통해서만, 마법적 암시의 빛이 평범한 말—수 세기를 아무렇게나 쓰다 보니 흉하게 변하고 너덜너덜해진 오랜, 오래된, 오랜 말들—의 표면 위에서 덧없는 순간이나마 뛰놀도록 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 조지프 콘래드, 《나르시서스호의 검둥이》 서문 中

 

어둠의 심연 - 10점
조셉 콘라드 지음, 이석구 옮김/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