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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 음악과 함께 흘러간 세월

 

 

 

 

Ray Charles - Come Rain or Come Shine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정말 딱 맞다. 말 그대로 음악과 더 이상 젊지 않은, 어느 순간 '내 인생이 겨우 이런 것인가?'라는 자기 내부에서 떠오르는 물음과 마주치는 시기, 자기 앞에 이제 기나긴 삶의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 황혼기의 인물들이 나온다.

 

 

그렇다고 《녹턴》의 인물들이 그저 체념한 채 다가오는 밤을 멍하니 바라보는 건 아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인생을 다시 한 번 붙잡아 보려 한다. 그로 인한 행동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건 '실패자형 추남'인 외모 때문이라며 아내의 남자친구가 준 돈으로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하는 색소포니스트 스티브처럼 한심하다고 혀를 차기 쉬운 인물도 있다.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쉽게 단죄하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인 양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듯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일반적인 삶의 루트에서 살짝 벗어난 인물들,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운 인물들이 나오지만 읽기 버거울 정도로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다. 동화처럼 희망차고 긍정적인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인물들을 존중한다. 그는 '녹턴'의 삶을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섬세한 필치로 어루만져 준다.

 

 

다섯 편의 작품 모두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 책을 읽으며 글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듯 언급되는 음악을 찾아 듣는 즐거움도 있다. 글렌 캠벨의 <By the time I get to Phoenix>,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 사라 본의 <April in Paris> 등 다섯 편을 다 읽으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취향이 묻어나는 풍성한 플레이리스트도 얻을 수 있다.

 

 

다섯 편의 이야기 중 내 마음을 가장 정서적으로 건드렸던 건 <비가 오나 해가 뜨나>였다. 일단 너무 웃기다.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친구 부부의 전화를 번갈아 받으며 그들의 빈 집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레이'를 보고 있으면 꼭 코믹한 시트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을 때는 이 단편이 견딜 수 없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작품 초반에 "우리가 특히 좋아한 것은, 노랫말 자체는 행복하지만 그 해석은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녹음, 즉 레이 찰스의 <컴 레인 오어 컴 샤인>같은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레이 찰스의 노래를 설명하는 이 문장이 노래와 같은 제목을 가진 이 작품 <비가 오나 해가 뜨나>와 어딘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이야기인 <녹턴>에서는 첫 번째 작품 <크루너>에 등장한 린디가 다시 나와 즐거웠다. 린디 가드너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녹턴>은 무엇 때문이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상하게 영화 같다는 인상이 드는 작품이었다. 특히 호텔에서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미완성된 방이 나올 때 묘하게 영화적인 터치가 느껴졌다. 린디와 스티브의 한밤의 모험에 잠시 엮이는 무대에서 통화하는 남자는 영화에서 카메오 출연한 배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다섯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감탄했던 건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빼어난 솜씨였다. 첫 번째 단편인 <크루너>를 보면 화자인 얀이 광장에서 크루너 가수 토니 가드너를 알아보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떠돌이 기타리스트 얀의 상황, 그들이 있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특징을 매끄럽게 서술한다. 이렇게 인물과 공간을 솜씨 좋게 구축한 뒤에는 공산주의 시절 폴란드를 배경으로 얀의 어머니 얘기가 나오고 이로 인해 토니 가드너가 얀에게 정말 특별한 음악가라는 걸 독자들이 이해하게 한다. 그 뒤로는 토니와 얀이 대화를 나누고 잠시 후 토니의 아름다운 부인 린디가 미끄러지듯 이야기에 합류한다. 짧게 이어지는 부부의 대화는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린디가 떠나가고 토니는 얀에게 부인에게 노래 이벤트를 해주고 싶은데 기타를 쳐 줄 수 있냐고 제의한다. 존경하는 뮤지션인 토니의 부탁을 얀은 승낙한다. 그날 저녁 어두운 강물 위를 흘러가는 곤돌라에서 토니는 공연을 잘 하려면 청중에 대해 알아야 한다며 얀에게 부인 린디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시작되는 공연과 이 공연에 얽힌 뒷이야기까지 우아한 다리 아래 흐르는 베네치아의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매끄러운 연결에 읽을 때는 작가의 손길을 인지하기 어렵지만 작가의 입장이라 가정하고 글을 보면 작위적이라는 느낌 하나 없는 연결고리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장인의 솜씨 같은 세공이다. 이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인데 어쩌면 이리도 효과적이고 흐름이 좋을까? 글의 흐름을 유려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밑줄 

 

 

"젊은 시절에는 눈앞에 끝없는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 하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어떤… 어떤 전망이 있어야 해. 에밀리가 그것을 참을 수 없어 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 줄곧 떠올랐던 게 바로 그거야. 전망, 에밀리에게는 전망이 필요해."

 

 

부모님의 옛 친구들이 오면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말하라고 다그치는 바람에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때까지 허세를 곁들여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했다. 그 사람들은 대개 이런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음, 적어도 넌 바쁘게는 살고 있구나."

 

 

 

 

 

 

하지만 이제 나는 가장 깊숙한 내 꿈속에서만 재즈 연주자이다. 지금처럼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지 않을 때면, 실생활에서는 어떤 밴드에서 정식 단원이 그만두었거나 스튜디오 작업이 필요할 때 동원되는 임시직 테너 색소폰 연주자일 뿐이다. 사람들이 팝 음악을 원하면 나는 팝을 연주한다. R&B라면? 그것도 좋다. 자동차 광고, 토크쇼를 위한 싱글 테마 연주도 한다. 요즘 내가 재즈 연주자일 때는 내 골방에서 연주할 때뿐이다.

 

녹턴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민음사

 

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가즈오 이시구로

번역 : 김남주

출판 :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