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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생각의 거울, 미셸 투르니에 - 개념들을 산책하는 즐거움


미셸 투르니에의 《생각의 거울》은 서로 상대적인 쌍을 이루는 개념 둘을 짝지어 생각을 전개해나가는 철학 에세이다. 작가가 쓴 서문에 따르면 고립된 개념은 사색에 매끈한 표면을 제공하기 때문에 손을 댈 수 없지만 반대 개념을 그 개념에 대치시키면 그 개념은 파열되어 버리거나 투명해져서 내적 구조를 보여 준다고 한다. 황소의 목은 말의 엉덩이에 의해서만 분명해지고 스푼은 포크 덕택에 본질을 보여주고 달은 환한 대낮에만 진정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둘씩 짝 지어진 114개의 개념들은 '남자와 여자'부터 시작해서 '존재와 무'에까지 도달하는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특수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가장 보편적인 것에 이르는 순서를 택했다고 한다.


보통 한 장 반, 길어야 두 장 정도인 57편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단 짧아서 좋았다. 특별한 일 없어도 수시로 핸드폰이나 패드를 들여다보느라 집중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는데 한 편 한 편이 길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장편 소설 같은 경우는 따로 시간을 내어서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데 《생각의 거울》은 아침에 일어나서 한두 편, 짬이 날 때 한두 편, 밤에 자기 전 몇 편 읽는 식의 독서를 할 수 있는 책이었다.


물론 한 편 당 분량이 짧고 틈틈이 읽기가 가능했다고 해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그저 가볍기만 한 심심풀이 스낵 같은 책은 아니다. 거울처럼 마주 보는 개념 두 개를 가지고 펼쳐나가는 미셸 투르니에의 사색은 짧은 글 안에서 세상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내공이 있다.


<고양이와 개>에서 "고양이는 명예를 걸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라는 문장에 우리 집 털뭉치를 생각하며 킥킥거리게 되고 "아름다움 안에는 균형과 안전성이 있으며", "숭고함은 우리를 쾌락과 공포가 기이하게 뒤섞여 있는 현기증 나는 불균형한 상태에 데려다 놓는다"라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에는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된다.


《생각의 거울》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글들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주장하고 싶은 틀을 정해 놓고 생각을 그 틀에 억지로 짜 맞추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 두 개를 가지고 씨실과 날실을 엮듯 자연스럽게 엮어나가는 능숙한 솜씨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정치적으로 샤워는 좌파 쪽에, 목욕은 우파 쪽에 위치해 있다"라고 하면 "뭔 소리야?"라는 반응부터 나왔을 터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는 목욕과 샤워라는 개념을 가지고 베헤모트와 가네사를 무리 없이 글 속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섬세한 문장의 사슬을 엮어 샤워와 목욕을 가지고 좌파성과 우파성을 3쪽짜리 짧은 글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렇게 물 흐르듯 이어지는 유려함 때문에 때때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나와도 일단 그 생각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곱씹어 보게 되고 서로 마주 보는 개념들의 쌍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기호와 이미지> 편에서 "사진・영화・잡지・텔레비전은 다른 그 무엇이기에 앞서 우선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그 이미지에 동반되는 기호인 코멘트와 말이 없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도 없고 재미도 없다." 두 번째 문장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불쾌한 느낌이 들기보다는 그렇다면 나는 기호와 이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호와 이미지가 내 안에서는 어떻게 상대적인 쌍을 이루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미셸 투르니에 역시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독자들에게 책의 절반만을 제공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독자들이 머릿속에 나머지 절반을 쓰도록 배려하는 것이지요. 문학책이나 철학 책은 독자와의 만남에 의해 비로소 태어납니다. 그것은 작가와 독자의 공동 창작물입니다."


《생각의 거울》은 미셸 투르니에의 생각을 사전적 정의로 받아들여 암기하듯 그대로 주워 삼키기보다는 작가의 생각 속을 산책하며 나의 생각을 뻗어나가게 하는 책에 가깝다. 질문을 던지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 그래서인지 읽고 나면 싱그러운 숲 속을 산책한 것처럼 산뜻하고 덕지덕지 달라붙어 시야를 가리는 무언가가 한 꺼풀 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밑줄


고뇌는 분명한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적대적인 현존이라면, 고뇌하게 만드는 것은 부재이다. 가장 유년기적인 고뇌의 형태는 어둠에 의해 촉발된다. 캄캄함은 그 속에 숨어 있는 괴물들 때문이 아니라, 캄캄한 그 자체 때문에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다.


문명이 인간을 안심시켜 주는 누에고치 역할을 하는 데 반해서, 문화는 무한을 향해 열린, 고뇌하게 하는 창문이다.

산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산문을 지배하는 생각들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에서 솟아나는 영감에 휩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거울 (Le Miroir Des Idees)

미셸 투르니에

번역 : 김정란

출판 : 북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