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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은 영국의 수녀이자 미술 사학자인 웬디 베켓이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곳의 미술품에 대해 얘기하는 BBC TV 프로그램 <Sister Wndy's Grand Tour>(1994)를 글로 정리한 책이다.


마드리드,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 파리, 안트베르펜, 암스테르담, 헤이그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는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미술품을 도시마다 4점에서 10점 정도 소개한다.


그 도시의 풍경 스케치 삽화와 도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 각각 한 장 정도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 화가들의 생애에 대한 토막글로 이루어져 있다. 글을 읽으며 볼 수 있게 웬디 수녀가 이야기하는 그림이 수록된 것은 물론이다.


장점이라면 본래 TV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글이 길지 않고 어렵지 않아서 미술에 대해 잘 몰라도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조르조네의 <폭풍우>에 대한 글이 좋았다.



비너스의 탄생은 곳곳에서 보이는 유명한 그림이지만 비너스가 벌거벗고 있다는 점과 오른쪽에 꽃의 신 플로라가 비너스에게 덮어주려고 진홍색의 천을 들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웬디 수녀는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비너스는 알몸으로 온다. 이 부분이 비너스 이야기에서 가장 슬픈 부분인데, 알몸으로 땅을 밟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플로라는 비너스를 감싸 줄 우아한 옷을 준비하고 있다. 플로라가 그렇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강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비너스가 우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플로라가 옷으로 그녀를 가릴 것이고, 우리는 그녀의 눈부신 순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비너스는 미의 신일뿐만 아니라 사랑의 신이기도 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사랑. T.S. 엘리엇은 인간은 어느 정도 이상의 진실은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과 장식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비너스의 탄생을 보는 우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도전을 받는 것을 느낀다. 보티첼리는 우리가 그 도전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저 아름다운 신의 벌거벗은 몸이라고 표면만 보고 넘어갔던 그림이었는데 가장 순수한 사랑과 아름다움이 우리의 세계로 오면서 한 꺼풀 가려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어느 정도 이상의 진실은 감당하지 못한다는 T.S. 엘리엇의 말로 이어지는 것도 참 좋았다. 이 부분을 읽으니 평면의 그림으로만 보였던 <비너스의 탄생>이 갑자기 액자에 가두어진 죽은 그림이 아니라 사랑과 미의 신이 관람자인 내가 있는 땅으로 이제 막 다가오려 하는 생생함으로 깨어났다.



조르조네의 <폭풍우>도 웬디 수녀 덕에 새롭게 다가왔다.


"조르조네의 관심을 끈 것은 벼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벼락이 작품 가운데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벼락이 치기 전 밤이 가지는 짙은 어둠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양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그 어둠.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짙은 밤의 장막이 걷히고 우리는 무언가를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신비에 싸인 남자와 여자이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도 전에 다시 어둠이 내리므로,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 수가 없다. 조르조네는 어둠의 세계에서 짧게 드러나는 그런 '보임'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잠깐 보였다가 금방 사라지는 것, 무엇을 보았는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런 인간의 무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한 번도 그림에 있는 벼락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딘 내 눈에는 긴 지팡이를 든 남자와 풀숲에서 아이를 먹이는 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번개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새롭게 눈이 뜨이는 것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벼락이 내리치며 한 순간 보이는 불가해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고야의 <거인>에서 거인이 그림 아래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치 바깥의 무언가로부터 방어하듯 서 있다는 걸 지적하는 것도 좋았고 반 고흐의 <예술가의 침실>에서 두 개의 의자의 이상하고 고독한 위치를 보게 해주는 것도 좋았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찬>과 야콥 요른단스의 <멜레아그로스와 아탈란테>에 대한 글은 전부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전개시켜 따로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부분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거나 나로서는 공감이 안 되는 해석이라도 타인이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을 읽어낸 결과를 보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러나 1930년에 태어난 옛날 분인데다 TV 프로그램 자체도 20여 년 전의 방송이라 책을 읽다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원문은 모르겠지만 '여성적이다'라는 표현을 케케묵은 구시대의 관점으로 쓰며 자신을 강간한 제퓌로스를 용서하는 '영웅적인 용서 덕분에' 플로라가 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또 글에서 '배우자나 자녀 없이'는 완전한 여성이 될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보다 루벤스의 <안젤리카와 은자>를 얘기하며 다 늙을 때까지 섹스 한 번 못해 본 남자가 잠든 젊은 여자를 강간하려는 걸 '그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했던 노인의 비극을 이해하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동정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며 '루벤스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그려내고 있다고 이런 너그러우며 선한 점이 자신이 루벤스를 '사랑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완벽한 예'라고 쓴 글은 정말 짜증스러웠다.



성관계를 어떤 자신만의 이유나 특별한 신념 때문에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고 싶었는데도 못하고 속절없이 늙어버린 건 분명 안쓰러운 지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섹스가 뭔지 나도 알고 싶다고 잠든 여자의 이불을 벗겨 강간하려는 걸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동정'을 보내야 하나?


아무리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라도 그걸 불쌍하다며 동정적인 시선으로 포장하는 건 정말이지 역겹다.


물론 루벤스가 <안젤리카와 은자>를 단순히 강간 미수 사건으로 그린 건 아닐 것이다. 웬디 수녀도 루벤스가 '가해자의 부러움에 찬 시선을 강조'했다며 '이 불쌍한 영혼이 안젤리카에게서 보고 있는 것은 유혹이 아니라 행복의 비전이다'고 단순한 성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유혹'에 대해서 존경으로 응할 수밖에 없는 고통 받는 인간'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감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안젤리카와 은자>에서 루벤스는 웬디 수녀의 말마따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동정'을 보낸 것도 아닌 것 같다. 루벤스는 안젤리카에게는 동정을 보내지도 않으며 솔직히 그녀의 육체를 즐기며 그리는 것 말고는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웬디 수녀의 해석을 존중해 루벤스가 돌이킬 수 없이 늙어버린 노인의 시선을 동경과 찬사로 해석하고 그를 결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어 고통 받는 가엾은 인간이라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하더라도 화가는 동시에 안젤리카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은자의 시선의 대상, 가질 수 없는 유혹이라는 걸 상징하는 젊고 풍요로운 육체로, 흰 살결과 풍만한 몸매를 가진 욕망의 대상으로 도구화시키고 대상화시킨 게 아닌가?  



그림을 보라. 왼쪽 구석에 자리한 은자는 어둠 속에 반쯤 녹아든 초라한 검은 옷을 입고 꼴사납게 굽은 모습이다. 그의 주름진 얼굴과 흰 이불을 걷어내는 손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서려 있는 것, 간절하고 황홀하게 안젤리카를 바라보는 시선과 표정은 우리가 그를 인간으로 느끼게 만든다. 가지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할 꿈에 고통 받는 우리와 같은 인간.



반면에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거리낌 없이 자기 온 몸을 내놓은 안젤리카에게는 오로지 반짝이는 표면만이 있을 뿐이다. 부풀어 오른 그놈의 '젖가슴'과 살집이 많은 두둑한 엉덩이 같은 것들. 특히 은밀한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포르노적으로 살짝 가린 희고 얇은 베일을 보면 화가가 피해자에게도 동정을 보내고 있다는 걸 결코 믿을 수 없다. 속살이 내비치는, 야릇한 베일의 위치. 저 베일에서 느껴지는 건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시선, 동정이 아니라 화가가 여성의 벌거벗은 육체를 그리며 느꼈던 단순한 즐거움 뿐이다. 동정을 느끼는 사람이 안젤리카를 이런 식으로 그려놓을 수 있나?


루벤스는 안젤리카를 결코 인간으로 그리지 않았다.


자신이 해석하는 은자를 그리기 위해, 은자를 작품 속에서 더욱 더 깊게 표현하기 위해 안젤리카의 빛나는 젊은 육체를 도구처럼 전시해놨을 뿐이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루벤스가 가해자에게 부여한 끊임없이 유혹을 느끼고 고통 받는 인간이라는 영원불멸의 근사한 자리와 동정적인 시선을 곧이곧대로 강조하고 그것을 예술적이라 마냥 우러러보기만 하는 시선보다 그와 동시에 화가가 안젤리카에게 한 짓을 짚고 넘어가는 시선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제 예술의 이름으로 여성을 너무나 쉽게 대상으로 만들고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에 무감한 세상은 아니라고 믿는다.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

지음 : 웬디 베케트

감수 : 이주헌

옮김 : 김현우

출판 : 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