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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책그림책 - 시적인 그림과 묘한 이야기들

 

 

책그림책은 화가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을 출판사가 여러 나라의 작가 46명에게 한 장씩 보내고 작가들이 자신이 받은 그림에 영감을 받아 쓴 글을 모아 낸 책이다.

 

참여한 작가들의 이름이 화려하다. 밀란 쿤데라, 미셸 투르니에, 아모스 오즈, 오르한 파묵, 수잔 손탁, 존 버거, 헤르타 뮐러, 밀로라드 파비치 등등.

 

원래는 다른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하도 집중이 되지 않아 도피성 독서로 책그림책을 펼쳤다. 한 편의 이야기들이 짧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리저리 치이는 일상 속에서 잠시 짬을 내 책그림책을 펼치면 신비로운 그림과 묘한 분위기의 글을 통해 잠시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작가가 어떤 그림을 받고 어떤 글을 썼는지 보는 즐거움도 있으며 마음에 드는 글을 쓴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또 부흐홀츠의 그림을 보면서 나라면 이 그림을 받고 어떤 글을 썼을지 생각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46개의 글 중에서 W. G. 제발트의 오래된 학교의 안뜰, 조지 스타이너와 마르크 퍼티, 알렉산드르 치마의 글, 이다 포스의 마지막 안건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작가는 글에 제목을 붙이고 어떤 작가는 붙이지 않는 것도 흥미로웠다. 모 문학 평론가 교수가 한쪽짜리 짧은 감상문을 쓸 때도 꼭 제목을 지으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글에는 자신의 제목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제발트의 오래된 학교의 안뜰은 제발트로 여겨지는 1인칭 화자가 출판사에서 그림을 받고 거기에 어울리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실제 상황으로 시작한다. 그림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참 뒤 세라핀 아쿠아비바 부인이라는 화자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 당신이 어떻게 이 그림을 갖게 되었냐며 편지와 함께 행방불명된 그림을 보냈다는 전개로 이어진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을 능숙하게 뒤섞는 게 살짝 보르헤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아쿠아비바 부인에 따르면 그림에 그려진 것은 1930년대에 부인이 다니던 포르토 베키오의 오래된 학교의 안뜰이라며 말라리아의 습격을 받아 반쯤 죽은 도시, 염분이 많은 땅과 늪지대와 녹색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그려내는 분위기가 좋았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 년 이래로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쓰러지고 썩어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리에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왜냐하면 주민의 절반은 열병에 시달리며 집안에서 점점 죽어가고 있거나 아니면 누렇고 바싹 마른 얼굴로 계단이나 문 아래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다니던 우리 아이들은-아쿠아비바 부인도 포함하여-아무런 사정도 몰랐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이 도시에서 우리들의 삶이 아무런 가망성도 없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우리는 보다 행복한 지방에 살고 있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셈과 글쓰기 그리고 나폴레옹 황제의 영광과 몰락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배웠다. 우리는 이따금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학교 마당의 담을 넘고 해안호수의 하얀 햇볕을 넘어 저 멀리 에트루리아 해 위에서 흔들거리며 진동하고 있는 눈부신 빛을 바라보았다."

 

 

 

 

조지 스타이너의 글은 오랜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어린 시절의 책들이 깨어나는 장면이 좋았다.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순간 그는 알아차렸다. 거기에 책들이 있었던 것이다.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유년 시절의 그의 책들이. 텅 빈 공간이 생명으로 다시 깨어났다. 삽화가 그려져 있는 그리스 신화 사전, 어린이용 성경, 보물섬. 금박을 입힌 표지에 아리엘의 그림이 있는 찰스와 메어리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유명한 경주용 자동차들의 사진을 모은 앨범. 그는 문을 닫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기억에 떠오르는 것을 잊으려고 절망적인 몸부림을 했다. 하지만 불가능이었다. 지난 시절의 책들의 목소리가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침대로 가기 전에 책을 읽어주던 한 지친 남자의 목소리도 그것들과 함께 들려왔다. 책을 읽어주던 그 자리는 너무도 잘 보호되어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릴 적 읽었던 책들은 마법적인 생명력으로 영원히 마음속에서 숨 쉬는 것 같다. 그 책들이 있는 자리는 이제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는 자리가 아닐지라도 불멸의 자리다.

 

 

 

 

마르크 퍼티의 글은 천상에 닿을 때까지 책을 쌓아가며 읽는 남자와 그 아래 글자가 뒤집힌 천사의 글이 있는 구조가 좋았다. 인간의 글보다는 천사의 글이 좋았다. 작가가 인간의 육신을 벗고 우주적인 진짜 천사의 정신으로 쓴 것 같다.

 

"빛 속에서 언제나 정신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리를 누가 의미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인가? 단어는 저 높은 곳 중력의 세계에서 그 형태를 얻는다고들 말한다. 단어들은 별들처럼 무겁고, 문장들은 산맥처럼 무거우며, 마침표와 콤마는 돈지갑 안의 동전들처럼 책장들을 무겁게 누른다고 한다.

(…중략…)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닌가? 슬퍼하는 대신에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과 모양의 머리를 한 이 사나이가 우리의 고뇌에 대해서, 우리의 희망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알렉산다르 치마의 글은 라디오와 대비시켜 책의 침묵을 말하는 아이디어가 좋았다.

 

"그러나 프리돌린 씨는 라디오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서가 저 높은 곳에 있는 책들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그 책들로부터 어떠한 음향도 어떠한 목소리도 듣지 않고 오직 침묵만을 듣는다. 그러나 이 침묵은 인간들 사이의 상호소통 결핍에 대한 그의 거부에 상응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욕설을 퍼붓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에만 야단법석이며, 상호 이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나 이 책들, 이 커다랗고 두꺼운 이해의 서고는 그 완벽한 침묵에 의해 인간의 거부하는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라고 프리돌린 씨는 느낀다."

 

속세의 번잡한 소음에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리돌린 씨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다 포스의 마지막 안건은 글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좋았다.

이 글은 장로회의 중에 요하네스 욥스라는 자가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러분들 중에 누구라도 천사를 본 적이 있나요?」

동료 장로들은 당혹감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참나무 탁자를 요란하게 두들기며 강제적으로 회의를 끝낸다. 서기와 장로들은 욥스가 미쳤다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쫓아간다. 그때 신비로운 행인이 지나가며 그들 곁에 책을 하나 떨어뜨린다. 책의 제목은 <하늘 소식>이었고 작은 금박 활자로 <천사들이 인간에게 보내는 소식>이라고 씌어져 있다.

욥스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는 중얼거린다.

「고맙습니다, 하느님, 고마워요」

 

 

그림은 제발트, 체스 노테봄이 받은 그림이 좋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조 카마르틴이 쓴 단테, 신곡Ⅲ, 47-48에 나오는 늙은 남자의 이름이 '보르게스'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 나오는 늙은 남자가 눈이 멀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보르게스'는 실명한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Borges)'를 가리키는 것이며 '마리아'라고 나오는 여자도 보르헤스의 비서였으며 마지막 부인이었던 마리아 코다마를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먼 늙은 남자가 달이 환한 밤에 마리아가 읽어주는 시를 듣는 글인데 보르헤스가 '보르게스'라고 적혀 한국어 독자에게 작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

 

뻔히 잘못된 게 보이는 오탈자보다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이런 미묘한 오역(?)이 더 신경 쓰인다. 이런 걸 발견하면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게 된다. 번역된 글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많은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건지도 새삼 느끼게 된다. 또 번역자는 단순히 문자를 번역하는 것을 떠나서 문화며 역사 등등 그 글을 쓴 작가만큼이나 수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어 책그림책을 낸 민음사에 보르게스->보르헤스를 문의했는데 보르헤스가 맞으며 중쇄 때 수정 내용을 반영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런 오류를 발견하면 종종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는데 그때마다 출판사들은 하나 같이 '알려주셔서 감사하며 중쇄 때 반영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책 중쇄 찍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더군다나 책그림책처럼 나온 지 오래된 책은 거의 가망이 없을 텐데. 결국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넘어가게 되는 걸 생각하면 아쉽다.

 

 

 

 

책그림책 (BuchBilderBuch)

밀란 쿤데라‧미셸 투르니에‧체스 노터봄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민음사

책그림책 - 10점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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