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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퍼스트맨 (2018) - 감독의 변화일까 각본가의 영향일까



스포 있음



위플래쉬(2014), 라라랜드(2016), 그리고 2018년의 퍼스트맨.

데이미언 셔젤의 영화가 꿈을 좇는 자와 그에 따르는 다양한 명암을 다루고 있다는 건 이제 비밀이 아니다. 드럼 연주자가 악명 높은 선생과 함께 치킨 게임이라도 벌이는 것 같았던 미친 듯한 폭주의 위플래쉬와 배우의 꿈을 꾸는 여자와 '진짜' 재즈를 좇는 남자의 라라랜드에 이어 인류 최초로 달에 갔던 사람을 다룬 퍼스트맨까지 셔젤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꿈을 향해 움직인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들은 꿈을 이루더라도 '모든 걸' 거머쥐지는 못한다.


위플래쉬의 소년 앤드류는 좋아했던 소녀 니콜을 잃고 영화의 종반에 가면 가족인 아버지와도 더 이상 예전 같을 수 없을 거라는 인상을 준다. 라라랜드의 미아와 셉은 각자의 꿈, 배우와 자신의 재즈 바를 얻어내지만 꿈을 꾸던 시절 곁에 있었던 상대와는 멀어진 뒤다. 이는 퍼스트맨에서도 비슷하다. 널리 알려진 역사대로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가는데 성공하지만 퍼스트맨의 그는 어쩐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위플래쉬-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 영화의 주인공들이 서로를 말없이 응시한다는 데이미언 셔젤식 엔딩에 충실하게 지구로 귀환한 닐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부인과 마주보며 끝난다. 각자의 해석 나름이겠지만 이 엔딩은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함께 행복했답니다~'라고 확실히 못 박아주는 해피엔딩은 아니다. 왠지 모르게 그들의 미래가 마냥 밝을 것만 같지는 않다. (닐 암스트롱이 첫 번째 부인인 자넷과 이혼했다는 영화 바깥의 전기적 사실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닐이 어린 나이에 죽은 딸 캐런의 작은 팔찌를 달에 두고 옴으로써 긴 애도를 마무리 지은 뒤임에도 그렇다. 이 영화의 닐은 꿈을 이루더라도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는 셔젤식 인생관에 충실한 인물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공통점들만 보고 퍼스트맨을 단순히 셔젤의 전작인 위플래쉬, 라라랜드와 일맥상통하는 영화라고 쉽게 넘기기는 어렵다. 퍼스트맨은 셔젤의 전작과는 다른 결이 있다. 이 영화에는 '세계'가 있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서 셔젤의 주인공들은 개인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있다.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플레처 선생과의 관계가 있고 마음에 드는 이성 니콜과의 관계도 생기며 가족과의 관계도 있고 음악 학교와 무대 같은 공간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철저히 '앤드류의' 것이다. 앤드류의 드럼 선생, 앤드류가 호감을 느끼는 상대, 앤드류의 가족, 앤드류의 음악 학교, 앤드류의 무대……. 위플래쉬의 카메라는 앤드류의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이 영화의 세계는 철저히 앤드류를 중심으로 돈다. 바깥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인물에게 집중해 단단히 응축되면서 폭주하는 것 같은 영화의 힘을 더욱 더 강력하게 만든다.


영화 라라랜드에서는 '꿈의 나라' LA의 별명이 영화 제목일 정도로 도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도시는 결국 주인공인 미아와 셉을 더욱 더 생기 넘치고 오색찬란하게 만들어주는 배경이다. 영화는 인물들의 꿈과 그들이 얻은 것,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한다. 여기서도 세계는 희미하다. 카메라는 미아와 셉 외부의 거대한 세계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저 그리니치 천문관의 근사한 풍경, 마법처럼 아름다운 해질녘, 고전적인 극장과 재즈 카페 등이 인물들을 위해 연극 무대의 배경마냥 펼쳐질 뿐 LA의 심층적인 사회문화적 모습에 굳이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나 퍼스트맨에서는 뭔가 다르다. 여기서는 갑자기 세계가 존재한다. 달에 간다는 닐 암스트롱 개인의 꿈만을 초지일관 강력하게 쫓는 게 아니라 카메라는 갑자기 닐을 내버려 두고 동료 조종사들의 죽음을 묵직하게 담는다. 퍼스트맨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조종사들의 죽음은 그 죽음이 그저 주인공 닐의 서사에 뭔가 하나 더 얹어주는, 그러니까 영화 주인공이라면 으레 겪어야 할 전형적인 고난이나 시련만으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죽은 동료 비행사의 남겨진 아내가 차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걸 재닛이 보고 다가가는 장면은 이 영화가 더 이상 주인공 닐 하나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좀 더 넓은 것, 닐의 외부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닐이 달에 가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바깥에서는 흑인들이 '내 여동생은 어젯밤에 쥐에 물렸지, 그런데 흰둥이들은 달에 간다네, 내 동생 얼굴은 퉁퉁 붓기 시작하는데 흰둥이들은 달에 간다네, 난 치료비를 지불할 수도 없는데 흰둥이들은 달에 간다네'라며 우주 계획에 투자되는 천문학적인 세금을 비꼬는 노래를 부른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노래, 질 스콧 헤론의 'Whitey on the moon'을 끌어오고 커트 보니것의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 인터뷰를 삽입하는 등등 퍼스트맨에서는 더 이상 세계가 희미하지 않다. 세계는 확실하게 존재한다. 닐 암스트롱이라는 개인 하나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영화가 결코 무시할 수 없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등장하면서 개인의 꿈에 뒤따라오는 빛과 어둠의 무게도 달라졌다. 위플래쉬에서는 앤드류가 여자 친구를 잃고, 앤드류가 아버지와 멀어지고, 그저 앤드류의 인생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격정적인 연주 이후에 앤드류가 플레처의 다른 제자처럼 자살을 하건 마약 중독이 되건 그냥 앤드류 개인의 인생이다.


라라랜드의 미아와 셉도 그들이 꿈을 이루고 그들이 연인과 헤어졌고 그들 개인의 인생일 뿐이다. 앤드류, 미아, 셉 바깥의 세계는 희미했고 영화는 주인공들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운명은 세계와 크게 연결되는 것 없이 그저 오롯한 개인만의 운명이며 인생이었다. 


그러나 퍼스트맨의 닐은 그들과 다르다. 이제 더 이상 나만의 꿈과 그에 따른 결과를 내가 알아서 감당하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최소한의 기본 복지도 안 되는 세상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우주에 날리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 꿈을 좇는데 으레 따르는 희생이라며 쉽게 넘길 수 없는 '사람'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고통 받는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 꿈을 좇는 자 때문에 가족들이 받는 상처 같은 것들이 퍼스트맨에서는 닐의 꿈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아니, 정확히는 닐의 꿈이 중요한 만큼 그것들이 큰 비중을 가지고 그려진다. 왜 갑자기 달라진 걸까? 


물론 위플래쉬의 앤드류와 라라랜드의 미아와 셉은 감독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고 퍼스트맨의 닐은 실제 역사 속에서 살았던 진짜 인물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빚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닐 암스트롱을 그리면서 당시 세계를 희미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앤드류, 미아, 셉의 꿈과 닐의 꿈의 차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위플래쉬에서 플레처가 강조하는 건 음악인 동료들과의 교감이나 호흡이 아니라 정확한 비트였다. '내'가 정확히 잘 치면 되는 것이었다. 영화의 절정에서 앤드류는 동료들과 함께 연주하는 합주자로서의 모습보다는 플레처와 일대일 맞대결을 펼치는 것처럼 강렬한 드럼 독주를 펼친다. 아무리 밴드 음악이라 해도 다른 악기들은 그를 뒤따라갈 뿐이며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기본적으로는 독주자인 셈이다.


라라랜드와 미아와 셉도 비슷하다. 셉이 밴드에 들어가는 건 영화 안에서 아예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처럼 그려지며 결국 그는 자신만의 재즈 바를 차리고 다시 만난 미아 앞에서 언어로 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피아노 '독주'를 통해서다. 미아가 한 연극은 그녀 혼자 연출하고 혼자 대본을 쓰고 혼자 연기한 완전한 모노드라마다. 여기에 동료는 없다. 이 1인극으로 캐스팅 기회를 잡은 영화도 '여주인공 하나를 중심에 두고 만들어가는 영화'라 언급된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서 데이미언 셔젤이 그린 인물들의 꿈은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꿈이었다. 퍼스트맨 이전까지 셔젤은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보다는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닐 암스트롱은 다르다. 그의 꿈, '달에 간다는 것'은 결코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꿈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달에 가는 우주선에도 반드시 다른 동료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물론 영화는 닐 암스트롱을 가장 비중있게 다루지만 달에 가는 그는 결코 위플래쉬나 라라랜드의 독주자들은 아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닐에게는 이제 딸린 가족들이 있다. 앤드류와 아버지나 미아와 부모님, 셉과 누나의 관계와 내 자식들이 딸린 가족 관계는 확실히 다르다. 앤드류, 미아, 셉은 가족 내에서 독주자가 될 수도 있지만 배우자, 자식들이 있는 가족을 꾸린 사람은 독주자가 되기는 어렵다. 퍼스트맨에서 닐과 자넷의 관계, 닐과 자식들의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앤드류와 아버지의 관계나 미아나 셉의 가족 관계와 달리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꿈을 꾸는 닐은 우주 프로그램의 상사와 동료들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도 합주를 생각해야 한다.


데이미언 셔젤은 위플래쉬, 라라랜드, 퍼스트맨의 주인공들이 '꿈을 좇는 인물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독주자로서 존재하는 앤드류, 미아, 셉과 닐의 꿈은 결이 다르다는 걸 알았을까?


거대한 세계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인물의 꿈이 영화 속에서 그저 독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합주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 같은 변화가 감독인 데이미언 셔젤의 변화인지 아니면 스포트라이트, 더 포스트, 드라마 웨스트 윙을 쓴 각본가 조쉬 싱어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전작들에서 셔젤은 자기가 직접 각본을 썼다. 퍼스트맨은 셔젤이 처음으로 자기 각본이 아닌 남의 각본으로 연출한 영화다. 그리고 조쉬 싱어의 작품은 큰 세계를 그린다. 앤드류와 플레쳐, 미아와 셉처럼 한 두 개의 강력한 관계에 집중하기 보다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수많은 관계를 잘 묘사하는 작가다. 


나에게는 전작과 다른 변화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데 퍼스트맨에서는 데이미언 셔젤의 매력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퍼스트맨의 연출은 평이하며 저스틴 허위츠라는 단짝과 또다시 합을 맞췄지만 음악사용도 전작들과 비교하면 그렇게 영상과 기가 막힌 시너지를 낸다고 보기 어렵다. 영화는 정말로 이렇게 긴 러닝타임이 필요했을까 의심이 들만큼 지루하게 늘어지고 감독만의 개성이나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데이미언 셔젤이 아니라 다른 감독이 찍었어도 됐을 것 같은 작품. 헐리우드에서 이른 나이에 눈부신 성공을 거둔 빛나는 젊은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갑자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자기만의 색깔을 잃은 것 같다.


영화의 막바지에 닐이 어린 딸의 팔찌를 달에 남길 때 꼭 슈퍼 8mm로 찍은 것 같은 아날로그 필름 질감의 영상들이 차르륵 지나가며 꼭 딸이 살아있을 때 '가족들의 단란한 추억' 같은 장면들이 나올 때는 '아, 기어이…….'하는 한숨마저 나오려 했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주제인 만큼 감정적으로 짠해지기는 하지만 그건 주제의 힘이지 연출 자체는 너무 게으르다. 그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게 라라랜드에서 마지막 '만약 그랬다면' 씬이 단숨에 선형적인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뮤지컬 무대 같은 환상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찬란한 연출을 했던 사람의 연출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 진부해진 거야.


퍼스트맨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데이미언 셔젤은 남의 각본을 가지고 연출하는 것보다는 그냥 자기 각본을 연출하는 게 더 잘 맞는 게 아닐까. 자신이 만들어냈던 인물들, 앤드류, 미아, 셉처럼 그는 기본적으로 독주자로서의 면모가 빛나는 창작자는 아닐까.


각본가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세계관이나 예술관이 변해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해도 좀 걱정된다. 지금까지 데이미언 셔젤의 영화가 빛났던 건 그가 거대한 세계에 관심을 두고 그걸 비판적으로 담으려 하거나 다양한 사람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심도 깊게 잘 다루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퍼스트맨에서 그 당시 세계를 비판적으로 담아내려 시도한 건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훌륭한 영화는 되지 못했다. 그런 걸 잘하는 감독들은 따로 있지 않은가. 또 닐 암스트롱과 그의 상관, 동료들과의 관계, 아내와의 관계, 자식들과의 관계 역시 한 순간 빛나는 파편 같은 장면은 있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잘 구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클레어 포이의 연기가 좋고 그 밖의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해도 영화 자체가 뭔가 어색하고 삐걱거릴 때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한 작품에서 배우의 연기가 훌륭한 것과 그 영화가 영화로서 훌륭한 건 다르니까.


위플래쉬와 라라랜드 같은 셔젤의 작품은 유리로 된 스노우 볼 같았다. 한 두 개 정도의 오브젝트가 중심이 되어 그것에 확실히 집중하고 그것을 둘러싼 작은 풍경을 다룰 때 셔젤은 편해 보이고 작품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창의적이다.


원래 퍼스트맨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하려던 작품이었다는데 확실히 이 영화와 이 주제는 데이미언 셔젤보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추세를 보면 퍼스트맨의 글로벌 흥행은 그렇게 성공적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셔젤이 다음 영화에서는 어떤 선택을 할지 더 궁금해진다. 다시 잘하는 것, 개인들의 눈부신 독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품은 채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를 할 것인가.



퍼스트맨 (2018)

감독 : 데이미언 셔젤

각본 : 조시 싱어

출연 : 라이언 고슬링, 클레어 포이

음악 : 저스틴 허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