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영화 <라스트 씬>을 검색해보면 이런 소개가 나온다.
"부산의 대표적인 예술영화관 국도예술관의 폐관 전 한 달의 기록. 극장을 지켜온 사람들은 담담히 마지막 날을 준비하고, 이 공간을 아끼고 사랑했던 관객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풀어 놓는다. 소중한 공간과의 이별 앞에서 지난 정권의 잘못된 문화정책이 필연처럼 떠오른다.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솔직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설명이었다.
부끄러운 건 알아서 어디 가서 대놓고 말은 안하지만 난 내 현실과 맞닿아 있는 걸 보고 싶지 않다. 그게 책이건 영화건. 나는 역사도 현실도 없이, 발 없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고 싶다. 이게 위험하다는 걸 알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뿐이다. 별다른 실천도 하지 않고 가끔 머릿속으로만 '이렇게 살면 안 될 텐데.' 생각하고 끝.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단순하고 무책임한 소비자일 뿐이며 그냥 예쁜 걸 보고 싶고 아무 생각 없이 뇌를 비우고 살고 싶다. 누구도 그렇게만 살 수는 없으며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라스트 씬은 결코 내가 '즐겁게' '소비'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닐 것 같았지만 어쩌다 보니 봤다.
영화는 어두운 극장 안,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빛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무슨 빛인지 몰랐는데 뭔지 모르면서도 사로잡히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라스트 씬은 소개글에 적힌 대로 국도예술관의 폐관 전 한 달의 기록을 담은 영화다. 국도를 사랑했던 관객들은 카메라 앞에서 '나의 국도'에 대해서, 국도에서의 시간과 국도에서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자리'를 이야기한다.
단순히 객석과 스크린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작은 로비, 영사실, 영화의 스틸컷이 들어간 국도만의 포토 티켓이 흰 벽을 꽉꽉 채운 매표소 안 등등 단순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침 일찍 출근해 영화관 문을 여는 모습, 관객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필름을 일곱 컷 단위로 자르는 모습, 국도의 배지를 만드는 모습, 쓰레기를 분류하고 청소하는 모습, 포토 티켓을 자르고 간식을 준비하는 모습 등등 그냥 가볍게 영화만 쓱 보고 휙 나갈 때는 볼 수 없었던 영화관 '노동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국도만이 아니라 서울, 강릉, 광주 등 다른 지역에 있는 독립영화관도 나온다. 그 중 두 곳은 내가 가본 곳이었는데 스크린에 비친 그 영화관들을 보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뻔하고 낯 뜨겁고 얄팍한 멜랑꼴리함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말로 정확히 설명이 안 되는데 막 분노하고 사람들이 울고 항의하고 답은 안 보이는데 마음은 무겁고 죄책감을 느끼기만 하는(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오로지 그것만 있는) 그런 식의 내가 보지도 않고 불편할까 피했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정말로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냥, 나쁘지 않았다. 이런 영화라면 더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영화들을 보지도 않고 지나치게 거부감만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트 씬에서는 빛이 많이 나온다.
먼지가 둥둥 날아다니는 프로젝터 빛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도 그걸로 끝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수많은 빛이 있다.
국도의 벽에 햇빛이 비쳐 나뭇잎 그림자가 생긴 걸 그냥 넘겨버리지 않고 오래 잡아주고 국도의 프로그래머가 '오늘 빛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프로그래머는 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로 안녕 손을 흔들기도 하고 그 그림자를 사진에 담기도 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광주극장에서도 빛이 나온다. 카메라는 창을 통해 계단에 그려진 빛을 잡아주고 광주극장의 이사장은 목소리로만 등장해 계절마다 들어오는 빛이 다르다며 이 오래된 영화관을 매번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는 말을 한다.
수많은 빛들을 새삼스레 스크린으로 보면서 영화는 결국 빛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 떠올리게 된다.
박배일 감독, 국도의 정진아 프로그래머가 함께 한 GV에서 박배일 감독은 요즘의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관에 빛이 들어오고 빛이 흐르고 빛이 통하는 건 국도와 광주 극장뿐이라고. 전에는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땡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빛이 흐르는 극장과 빛이 흐르지 않는 극장. 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
박배일 감독은 나보다 더 잘 찍을 사람은 있어도 나보다 국도를 사랑하는 감독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라스트 씬>을 찍었다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찾아오지 않는 관객에 대한 원망, "우리가 왜 버텨야 돼, 그냥 존재하면 안 돼?" 하는 가슴을 찌르는 말도 있지만 국도에서 일하는 이 사람들, 국도를 찾아오는 관객들, 국도의 마지막을 찍는 사람까지 영화를 보고 있으면 분노, 슬픔, 원망, 미움 이전에 이 사람들이 정말로 국도를 사랑하는구나, 느끼게 된다. 그 사람들의 존재와 그 사랑 때문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국도가 내게도 소중해져서 이렇게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GV가 끝나고 국도만의 독특한 포토티켓과 배지를 받았다. 국도의 정진아 프로그래머는 배지를 만들면서 사람들이 국도를 계속 기억해주기를, 그렇게 국도가 계속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또 영화 속에 나온 좁은 골목에 있던 그 장소 그 공간의 국도는 이제 없지만 부산의 독립예술영화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정말로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부산독립예술영화관 설립추진위원회
인스타그램 @cinema.community2018
라스트 씬 (2018)
감독/촬영/편집 : 박배일
'감상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SEL 교류 프로그램 <카메라의 눈> 영화 8편 후기 (0) | 2018.12.03 |
---|---|
10월에 본 영화 (0) | 2018.11.09 |
퍼스트맨 (2018) - 감독의 변화일까 각본가의 영향일까 (0) | 2018.10.21 |
너는 여기에 없었다 (2017) 보고 이런저런 잡생각 (0) | 2018.10.15 |
9월에 본 영화 (0) | 2018.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