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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SEL 교류 프로그램 <카메라의 눈> 영화 8편 후기



18. 11. 14. 수 - 18. 11. 18. 일



하버드대 산하 감각민족지연구소(Sensory Ethnography Lab, 약칭 SEL)는 인류학과 영상학의 학제간 연구를 위해 2006년 설립되었다고 한다. ACC 시네마테크가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와 협력하여 진행한 프로그램 <카메라의 눈>(KINO-EYE)은 SEL에 영향을 준 작품과 SEL에서 나온 대표 작품을 함께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상영작은 총 8편이다.


사촌 줄스 (Cousin Jules), 1972, 도미니크 베니체티

축복의 숲 (Forest of Bliss), 1986, 로버트 가드너

런치 브레이크 (Lunch Break), 2008, 샤론 로크하르트

리바이어던 (Leviathan), 2012, 샤론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베레나 파라벨

마나카마나 (MANAKAMANA), 2013, 스테파니 스프레이, 파코 벨레즈

철의 나라 (The Iron Ministy), 2014, J.P. 스니아덱키

싱글 스트림 (Single Stream), 2014, 파웰 워이타식, 토비 킴 리, 에른스트 카렐

검은 태양 (Sol negro), 2016, 라우라 우에르타스 밀란



<카메라의 눈>이 열리기 전 10월에 이번 프로그램에 협조한 하버드대 필름 아카이브 디렉터 헤이든 게스트가 SEL을 소개하는 짤막한 강연을 했다. 그때 강연에서 언급된 작품은 리바이어던, 축복의 숲, 죽은 새들, 사촌 줄스, 마나카마나였다. 로버트 가드너의 죽은 새들을 보고 싶었는데 본 프로그램에서는 없어서 아쉬웠다.


여덟 편의 작품 중 좋았던 건 <사촌 줄스>와 <축복의 숲>이었다.

SEL 소개 강연에서부터 저 두 작품은 내가 좋아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대를 했는데 실제로도 좋았다.





사촌 줄스


도미니크 베니체티

1972

France

90분


<사촌 줄스>는 닭소리와 함께 시작하는데 시골 대장장이의 공방과 작업 도구를 쭉 비춰준다. 아침에 일어난 줄스 할아버지는 나막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이웃과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공방에 들어가 가장 먼저 불을 피운다.


영화를 통해 프랑스 농가의 구체적인 삶을 볼 수 있다. 나이 든 대장장이는 불에 달군 쇠를 두들기고 자르고 구부리며 그의 부인인 할머니는 감자 껍질을 깎고 우물에서 물을 뜬다. 그러다 노동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끓이기도 한다. 나이 지긋한 두 부부는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신다. 닭에게 모이를 주고 땔감용 나무를 모으고 유리병에 직접 담근 포도주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삶은 감자와 빵, 포도주로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영화는 줄스 할아버지를 주로 보여주는데 그가 낡은 방식인 면도칼로 수염을 깎는 모습을 담고 말아서 피는 담배를 피우는 순간도 함께 한다. 할아버지는 침구를 정리하고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 모은 먼지는 바깥에 날린다. 그리고 줄스 할아버지는 양배추, 파, 빵을 냄비에 잘라 넣어 끓이고 혼자 식사를 한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혼자서 식사하는 이 장면에서 확실해진다. 영화가 흐르는 사이 할머니는 돌아가셨던 것이다. 초반에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고 짧은 대화를 나누던 장면과 달리 할아버지가 이제 혼자 음식을 먹는 것으로 끝난다.


<사촌 줄스>는 도미니크 베니체티가 자신의 나이든 친척을 1968년에서 1973년까지 찍은 작품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담았는데 영화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그렇게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일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 안에서 시간은 가끔 실제 세계가 그러는 것처럼 현기증 날만큼 빠르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다.





축복의 숲


로버트 가드너

1986

USA

90분


<축복의 숲>은 갠지스 강변에 있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영어식으로는 베나레스)의 모습을 담았다. 가장 먼저 모래밭을 걷는 개와 강을 지나가는 배가 나온다. 그리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우파니샤드를 번역한 문장이 나온다.


Everything in the world is eater or eaten, the seed is food and the fire is eater.


영화는 바라나시의 일출부터 다음날의 일출까지를 담았다.


개는 다른 개들에게 물어뜯기며 비명을 지르고 나이 든 사람은 힘들게 계단을 내려가 성스러운 강에서 수영을 한다. 강에서 떠온 물을 둥근 돌과 여러 신의 신상에 끼얹고 주황색 꽃을 돌 위에 올려놓는다. 사람들은 붉고 노란 꽃을 똑똑 따고 하나로 끼워 긴 목걸이를 만든다. 개와 염소가 그 꽃목걸이를 씹는다.


바싹 마른 사람들은 거대한 나무토막을 어깨에 메고 나르며 노동을 하고 물을 뿌리며 돌바닥을 청소한다. 사제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노래하고 기도한다. 대나무를 이용해 사다리 같은 걸 만드는 모습도 나오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나중에 그게 시체를 나르는 도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떤 이는 슬피 울고 어떤 이는 의식의 일종으로 물을 담은 그릇을 뒤로 던져 깨뜨린다. 죽은 이는 분홍색 천으로 감싸이고 붉고 노란 꽃으로 장식된다. 시체는 강물 속으로 던져진다.


아이들은 연을 날리고 거리에서는 흰 소가 똥을 싼다. 사람들은 죽은 동물들을 계단에 쿵쿵 박으며 질질 끌고 간다.


밤이 오자 사람들은 사원에서 불을 피우고 기도를 한다.


밤이 지나면 다시 해가 떠오르고 영화는 물안개 속에서 노 젓는 배를 보여준다. 그리고 카메라는 점점 이동해서 배를 떠나 물안개를 비춰준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검은 화면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노 젓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여운을 남긴다.


<축복의 숲>을 보면서 성스러움과 세속, 불과 물, 어둠과 빛, 노동과 놀이, 삶과 죽음 같은 테마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큰 관점에서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적이면서도 영적인 영화였다. 이번 상영작 여덟 편 중에 몇 편은 보다 졸기도 했는데 축복의 숲은 더 보고 싶어서 한 번 더 봤다. 사촌 줄스랑 축복의 숲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보고 싶다.




여기까지가 2006년 SEL 설립 전에 만들어진 SEL에 영향을 준 영화들이었고 이후는 SEL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솔직히 SEL의 작품들은 막 그렇게 좋아 죽을 정도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런치 브레이크


샤론 로크하르트

2008

USA

83분


샤론 로크하르트의 2008년작 <런치 브레이크>는 조선소의 점심시간을 쭉 보여준다. 길게 뻗은 복도에서 사람들은 혼자 밥을 먹거나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 음악을 트는 사람들도 있다. 카메라는 느린 화면으로 아무런 앵글 변화나 편집 없이 긴 복도를 계속 지나간다.


실험 영화 입문 강의에서 미니멀리즘 영화를 어느 하나에 집중하는 영화, 현란한 카메라 이동이나 화려한 앵글 변화 보다는 어느 한 부분을 오랫동안 장시간 지켜봐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느끼게 하는 영화라고 배웠는데 그런 점에서 런치 브레이크는 미니멀리즘 영화에 속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조선소라는 배경, 모르는 사람들의 점심시간을 카메라 앵글 변화나 편집 없이 83분 동안 느린 화면으로 보면서 환경이 굉장히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삶 속에서 이 장면을 봤다면 별 생각 없이 무심히 넘어갔을 텐데 카메라에 이런 식으로 담기면 보지 않던 걸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일단 작업장과 식사 장소가 그렇게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작업장 안 복도에서 사람들은 점심을 먹는다. 식탁도 없고 뭐 하나 푹신한 것도 없다. 백열등과 공장 호스들이 쭉 나열되어 있고 쓰레기통과 사물함이 늘어져 있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의자와 천장에 그대로 노출된 수많은 파이프들. 창문 하나 없이 햇빛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도 눈에 보였다. 점심시간인데 흰 백열등 아래서는 저녁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작업복을 입고 작업모를 쓴 채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한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나중에는 내 점심시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뭐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한 끼 대충 때우고 음악을 듣고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찾아보고. 런치 브레이크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런치 브레이크는 솔직히 재미있지는 않았는데 새삼 카메라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 만약 저 장소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복도를 지나쳤을 거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내 눈에는 진정한 의미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테고 생각도 없었을 거다. 런치 브레이크의 느리고 집요하면서도 성실한 카메라는 우리를 '보게' 만든다.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진 복도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상에 별 생각 없는 장식을 더해주는 막연한 효과나 게으른 관습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태도다. 그리고 영화의 카메라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이 한 걸 따라하거나 대충 이러면 좋을 것 같은데 하면서 뭉개는 게 아니라 칼날 같은 세상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카메라로 그 태도를 드러내는 것. 그게 영화 아닌가.






리바이어던


샤론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베레나 파라벨

2012

France, UK, USA

87분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 연안에서 촬영한 현대 어업을 보여주는 영화다. 생생하게 담는 카메라와 음향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배의 움직임에 따라 해수면 아래에서 보는 하늘을 뒤덮은 새 떼들과 해수면 위로 나와 보는 새들의 모습이 담긴 장면이 굉장히 감각적이고 이전에 보지 못한 영상이라 신선했다. 인간의 시점을 벗어난 카메라였다.







마나카마나


스테파니 스프레이, 파코 벨레즈

2013

Nepal, USA

118분


SEL 작품 중에는 이게 제일 취향이었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여신이 있다는 사원 마나카마나에 경배를 드리기 위해 오가는 순례자들, 그들의 오고감을 보여준다는 소재 자체가 내가 끌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신이 있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 그 두 세계 사이의 오고감이라는 거 너무 내 취향이다.


사실 마나카마나가 본격적으로 그런 것에 집중한 영화는 아닌 것 같지만 그냥 서로 분리되어 있어 다른 세계를 알지 못하는 갇힌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의 존재를 느낄 때, 감지할 때, 서로 다른 세계와 세계가 어느 한 구석에 겹쳐 있을 때의 그 사이의 오고감이 내가 끊임없이 매력을 느끼는 테마 중 하나다. 이런 걸 제대로 밀고 나가는 작품을 보고 싶다.


아무튼 마나카마나에서 카메라는 산등성이에 위치한 케이블카 안에 고정되어 있다. 케이블카 맞은편에 앉은 것처럼 관객들은 케이블카에 앉은 사람들, 바깥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가끔은 사람 대신 염소 같은 짐승들이 실리기도 한다. 염소들은 케이블카가 흔들릴 때마다 운다. 사람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과거의 얘기를 하기도 한다. 이 케이블카가 생기기 전 얼마나 긴 시간을 걸어서 사원을 찾아야 했는지. 또 가족 얘기를 하기도 한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전통 악기인 사랑기를 조율하기도 하고 어색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 어떤 이는 카메라에 대고 이곳에서 산 기념품이라며 설명하기도 한다. 프레임 밖에 있어서 그녀가 산 기념품을 볼 수 없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원을 오가는 사람들은 볼 수 있어도 정작 여신이 있다는 사원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케이블카 안의 사람들은 여신에 대해서, 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끝까지 사원을 비춰주는 장면은 없다. 그저 케이블카를 따라 끊임없이 길을 오갈 뿐이다. 상황이 뭔가 시시포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다보면 사람들이 바깥의 옥수수, 강, 오솔길에 대해서 계속 얘기하는데 그것도 볼 수 없다. 카메라 앵글 밖에 있으니까.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프레임 밖의 세상은 볼 수 없다.







철의 나라


J.P. 스니아덱키

2014

China, USA

83분


2011년에서 2013년 사이의 중국인, 성장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사람들로 가득 찬 기차 안의 정경으로 보여준다. 기차는 근대를 상징하는 그 자체로 강력한 테마 중 하나고 더군다나 영화사에서 기차는 더더욱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기차를 이 시기의 중국과 접목시킨 건 근사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 자체에 딱히 매력은 느끼지 못했다. 그 아이디어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하는데 처음 생각한 아이디어에 충실할 뿐 찍으면서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찍기 전에 알고 있던 것과 찍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찍으면서 새롭게 접하게 된 세상이 없는 것 같았다.

착상 자체는 훌륭하고 보여주는 것도 그럴 듯한데 뭔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머리로는 그래, 그렇지, 하면서 보는데 시적인 게 없다. 영화의 영혼, 카메라가 느껴지지 않았다.






싱글 스트림


파웰 워이타식, 토비 킴 리, 에른스트 카렐

2014

USA

23분


첫 장면을 보면 무슨 연말 콘서트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꽃가루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날아다니는 것들이 다 종이 쓰레기다. 다음 장면에서는 더 확실해진다. 화려하게 날아다니던 것들이 바닥에 쌓인 쓰레기의 산으로 보인다. 포크레인이 그것을 판다.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종이 쓰레기를 분류한다. 수많은 남작해진 음료수 캔이 공장의 시스템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볼 수 있다. 영화 싱글 스트림은 그렇게 미국에서 가장 큰 재활용 시설 중 하나를 보여준다.






검은 태양


라우라 우에르타스 밀란

2016

France


내 취향 아니었다. 감독이 오페라 가수인 자기 이모 안토니오를 보여주면서 우울증이 가족 관계에 미친 영향, 예술에 미치는 영향 뭐 이런 걸 보여준다.


솔직히 우울증을 가계에 내려오는 굉장히 특별한 무언가, 이런 식으로 그려내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낭만적인' 우울증, '예술적인' 우울증……. 이런 접근은 잘못하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깊이가 없고 까딱하면 나르시시즘적으로 빠지지 않나. 영화 검은 태양에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깊이가 있는지 다소 의심이 든다.


영화의 마지막에 안토니오는 거대한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무대는 텅 비고 공허하고 아무런 소품 하나 없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안토니오를 무대에 덩그러니 있는 것처럼, 무대는 굉장히 크고 안토니오는 굉장히 작은 것처럼 잡는다. 그리고 그런 안토니오에게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귀를 잡아채고 한순간 숨을 멈추게 하는 음악. 이렇게 끝나버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좀 한숨이 나오려 했다.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우울증이 아름답게 소비되는 것 같으면 좀 더 표현 방식과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울증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이나 신화의 재생산이 이 시대에서도 전통적인 관습대로 계속 되어야 할까.


나 자신에게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시선에 대해서 더욱 경계하게 된다. 우울을 낭만화하고 위대한 예에술의 원동력 뭐 이딴 식으로 생각하는 거 일부 진짜 대단하신 예술가에게는 사실이겠지만 그냥 흔한 장삼이사들에게는 끝없는 늪으로 좋다고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 거랑 똑같지 않나. 정말로 건강해야 한다. 몸도 정신도. 두 가지 다 너무나 중요하다는 걸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