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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12월에 본 영화



해바라기 (1970)


감독 : 비토리오 데 시카

출연 : 소피아 로렌,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류드밀라 사벨레바


소피아 로렌이 전쟁에 나가 생사도 모르는 남편을 젊은 시절 내내 기다리다가 혼자 이탈리아에서 러시아까지 건너가 직접 남편을 찾는다. 모두들 남편을 찾을 수 없을 거라 하지만 여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낯선 외국 땅에서 간신히 찾은 남편은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살고 있었다. 남편의 새로운 아내와 그 딸을 먼저 본 뒤 남편과 다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소피아 로렌은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고 움직이는 기차에 올라타 그대로 남편을 떠나 버린다. 그리고 기차 안의 낯선 러시아 사람들 속에서 주저앉으며 오열한다.


이 장면이 되게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찾던 남자를 만났는데 단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출발한 기차에 올라타 떠나버리는 거. 그리고 남자의 앞을 떠난 뒤에야 무너지듯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


사실 남편은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동료에게도 버림받아 설원에서 죽을 뻔 했는데 그 때 현재의 아내인 러시아 여자가 구해줬고 처음에는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속사정이 있다. 소피아 로렌을 본 후 남자는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러시아에서 만난 부인과 딸을 두고 이탈리아로 오는데 이때 소피아 로렌에게 전쟁터로 떠나기 전 약속했던 러시아 모피를 사오는 것도 흥미로웠다. 젊은 날 짧았던 신혼 기간에 했던 약속이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어딘가 망가진 채로 이루어지는 게 관객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간신히 다시 만났을 때 하필이면 정전이 되어 서로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다는 상황도 인상적이었고 남자가 우린 서로 아직도 사랑하지 않느냐며 같이 떠나자고 애원하지만 불이 켜지고 소피아가 새로 만난 남자 사이에서 낳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며 두 사람이 현실로 돌아오는 마무리까지 깔끔했다.


영화를 보면서 멜로의 맛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로맨틱 코미디는 나와도 멜로 영화는 잘 안 나오는 것 같은데 멜로의 감성이 통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다. 당장 나만 해도 50년 전의 옛날 영화니까 별 소리 없이 봤지 해바라기가 요즘 나온 영화였다면 뭐래;; 이게 도대체 언제 적 감수성;;;; 하며 당황했을 것 같다. 짧은 신혼 기간만 보내고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생사도 모르는데 십여 년 가까이 시어머니 모셔가며 기다리는 설정 자체가 아무리 2차 세계대전이라는 과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라 해도 요즘 영화였다면 관객들을 설득하기 어렵지 않을까.


멜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서로 사랑하지만 어떤 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는 것이 중점인 것 같은데 이걸 요즘 감성과 세태에 맞게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운 것 같다.


진한 멜로 말고도 인상 깊었던 것은 해바라기에서 2차 세계대전은 남녀 주인공들을 갈라놓은 비극의 원흉이라는 단순한 장치로만 쓰이는 게 아니라 감독인 비토리오 데 시카가 꽤 공들여 전쟁으로 파괴되는 인간성이나 전쟁이란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그 비극성을 영화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려 노력하는 것이었다.







보카치오 70 (1962)


연출 : 마리오 모니첼리, 페데리코 펠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비토리오 데 시카

출연 : 마리사 솔리나스, 제르마노 질리올리 / 아니타 에크베르그, 페피노 데 필리포 / 로미 슈나이더, 토마스 밀리안 / 소피아 로렌, 루이기 지울리아니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 네 명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70년대식으로 풀어낸 옴니버스 영화다.


마리오 모니첼리의 렌조와 루치아나,

페데리코 펠리니의 안토니오 박사의 유혹

루키노 비스콘티의 직업,

비토리오 데 시카의 복권 순으로 나온다.


보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건 루키노 비스콘티였는데 막상 그의 작품 직업은 막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가장 나랑 안 맞았던 건 페데리코 펠리니의 안토니오 박사의 유혹.



마리오 모니첼리의 렌조와 루치아나는 여자는 결혼을 하면 공장에서 잘려서 렌조와 루치아나라는 젊은 연인이 몰래 결혼을 하고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서 시작되는 얘기다. 공장의 높은 남자가 루치아나를 꼬시려 하고 결혼을 비밀로 한 두 젊은 부부는 임기응변으로 곤란한 상황을 넘기려 노력한다. 또 두 사람은 독립을 하지 못해 루치아나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데 집은 좁고 가족들은 많고 심지어 창문 바로 밖에 번쩍이는 간판까지 붙어 있어서 신혼인데도 맘 놓고 분위기를 잡을 수가 없다.


이차저차 무사히 결혼 사실을 들키지 않고 지나가나 했는데 공장에서 둘이 붙어있는 모습을 하필이면 루치아나에게 호감을 보이던 상사에게 들킨다. 해고되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루치아나는 둘의 관계를 부정하고 렌조는 상사가 관심 있던 여자를 집적거린 죄로 잘리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루치아나는 둘이 같이 퇴직금을 받으면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하고 껄떡거리던 남자에게 당당하게 두 사람이 결혼을 한 부부라는 걸 밝히고 남편과 함께 공장을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두 사람이 퇴직금으로 방을 구해 이제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함께 있게 되었는데 렌조는 야간 경비고 루치아나는 아침에 출근하는 직업이라 렌조가 퇴근하면 루치아나는 바쁘게 씻고 출근하게 된다. 마지막에 렌조는 햇빛이 들어오는 침대에 혼자 눕는데 텅 빈 침대에서 베개를 끌어안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밤에도 불빛이 반짝이고 수시로 다른 가족들이 방에 들어오던 루치아나 가족 집에 얹혀살던 때에서 그렇게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소품이었고 무엇보다 루치아나 역의 마리사 솔리나스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예뻐서 등장하는 첫 순간부터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냥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데 요정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예뻐... 홀린듯이 보게 된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안토니오 박사의 유혹은 나랑은 정말 안 맞았다. 보면서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깐깐한 도덕군자 안토니오 박사가 어느 날 자기 아파트 밖에 거대한 우유 홍보 간판이 걸리는 걸 본다. 금발의 '뇌쇄적인' 여인이 우유 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박사는 이 간판이 너무 음탕하다며 길길이 날뛰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간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사의 모습은 시종 희화적으로 그려지고 그러다 간판이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여자가 되어 박사에게 말을 걸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나한텐 그냥 그랬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직업은 남편이 빠진 매춘부를 만나 밤일의 비법을 전수 받는 아내라는 데카메론의 이야기로 만든 영화였는데 이 케케묵은 이야기를 남편이나 매춘부 쪽에 무게를 두는 게 아니라 아내 쪽에 좀 더 힘을 실어 다룬다.


백작의 성매매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백작은 변호사와 조언을 줄만한 나이 있는 남자들로 구성된 위기관리 팀과 함께 서재에 모여 일을 어떻게 해결할 지 고민한다. 이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려면 스위스 대자본가의 딸인 아내의 돈이 필요하고 변호사는 백작에게 부인을 잘 달래보라고 한다.




로미 슈나이더가 연기한 백작의 부인은 샤넬을 걸치고 화려한 방에 나른하게 누워서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들을 어루만지며 남편의 부정에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대체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냐고 생각한다. 남편의 매춘부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해 본 백작 부인은 남편에게 내가 그 사창가에 있었다면 당신은 나를 골랐을 거냐 묻고 남편은 그랬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부인은 앞으로 잠자리를 함께 할 때마다 남편이 매춘부에게 준 만큼의 돈을 받아낼 거라 하며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눕는다.


백작 부인은 시종일관 이 모든 것이 가벼운 농담인 것처럼 구는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행동이 심정 그대로인 건 아니다. 마지막에 로미 슈나이더의 눈은 보이지 않고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입술이 클로즈업 되는데 그 입은 웃는 듯 마는 듯 알 수 없다.


명문 귀족가의 후손인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귀족이나 오래된 가문을 다룰 때가 흥미롭다. 특히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이 나올 때는 단순히 어설프게 흉내 낸 얄팍한 겉 표면만 있는 게 아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진짜 귀족 취향을 보는 것 같아서 재밌다. 그런 걸 커다란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서 보카치오 70도 영화관에서 본 건데 장편이 아니라 단편이라 그런지 눈뽕만으로 즐기기에는 약했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복권은 보카치오 70의 네 편 중 스토리의 진행 속도가 빨라 흥미진진했다. 여기서는 임신한 여동생 부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복권을 파는 여자가 나온다. 복권의 당첨품은 다름 아닌 여자와의 하룻밤.


소피아 로렌이 연기한 여자는 매력을 넘어선 어마어마한 마력의 소유자라 마을 남자들은 서로 앞다투어 복권을 산다. 그러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소심한 남자가 당첨되고 남자들은 경쟁적으로 엄청난 액수를 부르며 당첨된 남자에게 그 복권을 자기에게 팔라고 한다. 그러나 한 번도 여자를 접해 본 적 없는 이 소심한 남자는 절대로 복권을 팔지 않는다.


이 때 여자는 젊고 잘생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남자까지 끼어들어 이래저래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지만 결국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복권에 당첨된 남자는 여자에게 돈을 돌려받고 하룻밤은 없었던 일로 되지만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음대로 얘기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볼에 여자의 키스를 받고 돌아온 소심한 남자는 마을 남자들에게 영웅 취급을 받으며 헹가래를 받는다.


진지하게 도덕적으로 보면 절대 웃을 수 없는 불편한 내용인 한데 소피아 로렌의 매력이 영화 전체를 강렬하게 지배한다. 강한 노출이 나오고 그러는 건 아닌데 강렬한 성격의 연기와 함께 그냥 존재만으로 스크린에 불이 번쩍이는 것 같다. 보면서 스타라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절로 감탄하게 되었다.







12월에는 영화를 별로 못 봤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를 해 넘어가기 전에 보려고 했는데 결국 못 보고 새해 첫 영화로 보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