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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영화

콜드 워 (2018) - 미감이 독특한 영화




스포 있음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영상이 참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4:3 비율의 흑백 영화인데 모든 프레임이 그림이다.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촬영 자체도 아름답고 구도도 예술이고 카메라 움직임도 훌륭하다. 촬영 감독이 루카즈 잘이던데 이름 기억해 둬야겠다. 


음악이 중요한 영화인데 음악도 굉장히 아름답다. 1949년부터 1964년까지 긴 사랑의 세월을 다루는데 시대 흐름이나 공산권이냐 서방세계냐 어떤 세력권의 공간이냐에 따라서 클래식, 전통 민요, 프로파간다 찬가, 샹송, 재즈, 영화음악, 기타 등등이 나온다. 구구절절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고 음악만으로도 당시 시대상과 인물이 지향하는 이상, 성격, 시대배경과 공간을 선명하게 그려준다. 인물들 사이에 중요한 음악이 여러 장르로 변해가며 계속 나오는데 그 노래의 변모 과정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서사 자체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파벨 감독이 40여년에 걸쳐 헤어졌다 붙었다 한 자기 부모님 연애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는데 그냥 그렇다. 당시 공산권 예술가들이 자유를 찾아 서방으로 망명한 것도 그렇고 이미 너무 많이 얘기된 남녀의 러브 스토리 자체라 보다 보면 아 어떻게 되고 저렇게 되겠구나 싶고 다 그냥 예상대로 그렇게 된다. 



콜드 워는 신박한 스토리를 위한 영화라기보다는 줄라와 빅토르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영화다. 탁탁 점을 찍듯이 15년에 걸쳐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만났던 이들의 모습을 선택해서 보여준다. 장면 장면 사이에는 스크린에 구현되지 않고 검은 화면으로 처리되는 시간의 갭이 있다. 관객들은 이 순간순간들을 짜맞춰가며 이들의 어떤 기나긴 전쟁 같은, 냉전의 사랑 역사를 지켜보게 된다. 영상과 연출이 관람 포인트가 되고 중심이 되는 영화였다. 



줄라와 빅토르의 사랑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랑은 아니다. 심지어 '너무 사랑해서 동반 자살한 연인'이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자살 성공 여부는 갈리지만 함께 독약을 나누어 먹는 건 분명하게 나온다.) 동반 자살한 연인은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고 가장 뜨거운 소재 중 하나다. 이렇게 소재 자체가 너무나 강렬한 미친 사랑, 세기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영화는 그걸 뜨겁게 그리지는 않는다. 


콜드 워를 볼 때 우리는 보통의 로맨스 영화처럼 '내'가 줄라가 되거나 혹은 빅토르가 된 것처럼 인물에 이입해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줄라와 빅토르를 지켜보는 것처럼 보게 되는 영화다. 관객이 영화의 세계 안에 들어간 것처럼 물 흐르듯 쭉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검은 화면을 집어넣고 편집된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진행이다. 

 

참 공들여 만들어졌다는 티가 나는 흑백의 아름다운 영상도 이상하게 서늘하고 담백해서 미친 것처럼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과 모든 걸 건 사랑 이야기인데도 영화를 보고 난 뒤 막연하게 뇌리에 남는 분위기는 뭔가 얼음이나 흰 눈이 서늘하게 빛이 나는 느낌이랑 비슷하다. 


제목인 콜드 워는 작중 시대 배경인 공산권과 자유진영 사이의 냉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이 두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도 막 불에 댈 것처럼 격렬하게 뜨겁기 보다는 어딘가 서늘한 느낌이 나서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표현 방식 때문에 줄라와 빅토르의 사랑 자체도 일종의 콜드 워처럼 보인다. 



장면 장면들이 모두 아름다웠는데 몇 가지 장면들이 보고 난 뒤에도 기억난다. 


두 사람이 파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줄라는 빅토르에게 짧게 입 맞추고 돌아선다. 그러나 떠나던 그녀는 다시 남자 쪽으로 돌아서고 그에게 다가온다. 그때 가까이 올 때까지 잠시간 줄라의 얼굴 표정은 카메라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둠에 묻혀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은 줄라가 빅토르에게 가까이 오고 빛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질 때에야 드러난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 잠깐의 긴장 상태, 미지로 남겨진 그 표정의 순간이 기억난다. 


줄라가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해서 폴란드를 나오고 둘이 함께 파리에 있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밤에 보트를 타고 강물을 따라 흐르며 파리를 보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밤의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연인, 성당의 아름다운 장미창이 인물들의 시점으로 나오는데 그때 그 화면, 그들의 눈에 보이는 파리가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다. 


또 초반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폐허가 된 교회는 존재 자체만으로 독특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폐허는 언제나 이상한 끌림을 느끼게 만든다. 특히 사랑 영화에서의 폐허는 더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 같다. 일단 지금 생각나는 건 화양연화에서 앙코르와트. 폐허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고 과거의 영광이 분명 있었으나 지금은 황폐해졌다는 함의가 있어서 기나긴 사랑, 동화처럼 '그래서 그들은 영원해 행복해졌답니다~' 하는 일반적인 해피엔딩을 얻지 못한 사랑을 보여줄 때 근사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도 인상 깊었는데 황폐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약을 나누어 먹은 두 연인은 다음 장면에 벤치에 나란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카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여주다가 앞모습으로 전환한다. 그때 줄라는 말한다. 


"다른 쪽으로 가자. 저기 경치가 더 좋아."


그리고 빅토르는 그녀의 말에 따르고 두 사람은 프레임 밖으로 떠나 버린다. 




영화 내내 두 사람은 폴란드의 시골, 바르샤바, 베를린, 파리, 유고슬라비아, 등으로 항상 이동하고 떠돌아다녔다. 그 두 사람은 이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렇게 이동한다. 


그리고 스크린에는 그들이 떠나고 남은 빈 벤치와 바람이 이는 풍경 모습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잠시 이 모습이 비춰지다가 영화는 끝난다. 그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저게 뭘까 궁금해졌다. 왜 이런 장면이 나와야만 했는지. 왜 감독은 기어이 관객들에게 인물들이 떠난 빈자리를 보여주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영화 내내 십오 년 가까이의 두 사람의 만남과 이동을 줄기차게 따라다녔다. 폴란드의 시골에서 수도로, 동베를린으로, 파리로, 유고슬라비아로, 다시 파리에서 폴란드의 수용소까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그들을 따라 '더 경치가 더 좋은 쪽'을 따라가지 못한다.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 그 남자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수용소에서 빅토르를 꺼낸 줄라는 빅토르가 다시 돌아온 순간 아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빅토르의 품으로 쓰러진다. 


줄라는 말한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

빅토르는 대답한다. 

"그러려고 왔어." 

그러나 여자는 덧붙인다. 

"영원히 말이야."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우리의 시선, 관객의 시선 속에서도 벗어나 둘만의 세계로 영원히 떠나버린다. 영화 내내 그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관객도 더 이상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떠난 뒷자리만 보게 될 만큼. 


교회는 영화 초반부터 나오는데 먼저 훼손되어 눈만 남은 벽화를 보여주고 뻥 뚫려서 하늘이 보이는 천장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고 약을 나눠 먹을 때도 다시 카메라는 이 교회의 눈만 남은 벽화, 하늘이 보이는 천장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줄라와 빅토르가 관객의 눈, 시선을 떠나 하늘이 보이는 그 구멍으로 탈출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낯선 얼굴의 배우들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특히 여자 주인공 줄라를 연기한 배우 요안나 쿨릭은 살짝 레아 세이두 생각도 나고 되게 매력 있었다. 존재감이 강하다 해야 하나 그냥 등장만으로도 스크린 속 공간의 분위기를 바꿔버리는 힘이 있고 묘한 아우라가 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빅토르는 졸라를 처음 봤을 때부터 끌림을 느끼는데 그게 바로 이해된다. 줄라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관객인 나도 같이 홀려 버리니까. 


너무 좋아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상과 음악의 아름다움 때문에 기왕 볼 거면 영화관에서 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특히 멀티플렉스를 점령해서 영화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영화들과는 다른 미감이 좋았다.




콜드 워 (2018)

감독 :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촬영 : 루카즈 잘

출연 : 요안나 쿨릭, 토마즈 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