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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2017), 김소영 1950년대,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 다니던 북한 유학생들이 김일성의 1인 독재를 비판한다. 이념의 이상을 믿고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불탔던 청춘들은 이후 무국적자가 되어 유라시아 대륙을 떠돈다. 생존자들의 인터뷰와 낡은 사진, 그들이 남긴 영화, 소설, 편지 등이 나오는 다큐다. 북한의 최고 엘리트로 성공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신념과 우정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기숙사에서 쫓겨나자 숲에 천막을 치고 토론을 하고, 붉은 광장에서 분신자살까지 각오하며 '참된 사람이 되자'는 결의로 다 같이 이름을 '진'으로 바꾸는 게 2020년의 사람에게는 너무 뜨거운 청춘이라 놀라웠다. 당시 소련은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연설도 했던 터라 이들의 망명을 받아주지만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 동지..
영화 보고 싶은데 영화 보기 싫을 때 보는 영화 - <24 프레임>(2017),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럴 때가 있다. 영화 보고 싶은데 영화 보기 싫을 때. 이야기도 인물도 대사도 어쩐지 버겁게만 느껴질 때. 설날에 딱 그런 느낌이라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을 골랐다. 이야기도, 인물도, 대사도 없고 보면서 명상하는 기분이었다. 카메라 움직임도 없어 그저 한 곳에 고정되어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눈이 편했고. 이번 겨울 눈을 못 봤는데 설원, 말, 소, 사슴, 늑대, 새가 나오는 겨울 영화였고 빗소리, 바람소리, 파도 소리, 새가 날아가는 소리, 늑대와 소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ASMR이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터 브뤼겔의 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새가 날고 눈이 내리고 소와 개가 움직이는 프레임 1로 시작해서 설원에서 서로 희롱하는 두 마리 말을 차창 너머로 보고,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서 잠든 소..
나치 전범의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알베르트 슈페어 회고록이 좋다. '회고록'이라는 말 자체부터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게 소련이나 제3제국 얘기기까지 하면 그 책은 나의 취향이 아닐 수가 없고... 제3제국의 중심에 있던 자, 히틀러의 건축가, 나치의 군수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도 읽기 전부터 재밌겠다 싶었는데 서문의 '나의 시대는 재앙 속에서 절정을 구가했고' 여기서부터 이미 취향저격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는, 만일 히틀러에게 친구가 있다면 내가 바로 그 친구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열정과 청춘의 영광을 빚지고 있다. 이제는 사라진 공포와 죄악들도...." 이 책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긴 변명'이라고 하던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니, 변명이 아닐 수 있나?'였다. 애초에 뭔가 변명하고 싶은 게 있는 자가 회고록을 쓰는 거 아..
올해 첫 영화 -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1961), 알랭 레네 2020년 올해 본 첫 영화였다. 옛날 영화 말고도 영화관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사마에게 등등 봐야 하는데 영화관 갈 짬이 안 난다. 기왕 볼 거 최애 극장에서 보고 싶은데 최애 극장은 내 활동반경에서 너무 멀어서... 는 영상의 공간과 시간은 뒤섞이는데 (음성)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인물의 옷차림이 바뀌며 과거와 현재(?) 혹은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고 전경에 앉아있던 인물이 돌연 후경에서 옆문을 가로질러 나타나고 공간의 연속성을 부숴서 바로 다음 컷에서 사람은 그대로인데 공간은 다른 곳이고 그런다. 그런 와중에도 인물이 하던 말은 시간, 공간이 바뀌어도 계속 이어져서 꼭 음성이 미궁 속 아리아드네의 실 같다. 가끔 자막에 구애 받지 않고 영화 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영화가 유..
BTS 리더가 읽은 사랑에 대한 철학책,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메논> 책 읽고 나면 가끔 다른 사람들 감상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는데 그러다 플라톤의 이 책을 방탄소년단의 RM이 읽었다는 글을 봤다. 무슨 방송에서 대기하면서? 읽고 있었다고. 사진 속의 저 붉은 책. 플라톤의 와 을 천병희가 번역해 도서출판 숲에서 낸 책인데 내가 읽은 거랑 같은 판본이라 뭔가 반가웠다. 겉에 종이 표지 벗기면 저렇게 된다. 는 생각보다 좋았다. 맑고 화창한 여름날 강가에서 소크라테스가 젊고 아름다운 파이드로스와 사랑과 수사학에 대해 얘기한다는 설정 자체가 좋았고, 아득한 시간을 넘어 거의 2천4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대화를 본다는 것도 좋았다. 소크라테스는 일리소스 강변에서 아름다운 연동 파이드로스를 만나는데 파이드로스의 구애자 뤼시아스가 소년에게 사랑에 대한 연설을 했다는 걸 알게..
뒤렌마트 희곡선 - 노부인의 방문 / 물리학자들 은 처음 읽었을 때 진짜 강렬했던 희곡이었다. 미친듯한 전개에 빨려 들어 와씨; 천재네ㄷㄷ 하며 읽었던 게 기억나는데 다시 봐도 좋았다. 엄청나게 부유한 노부인이 파산 직전의 옛 고향에 찾아와 과거 자신과 뱃속의 아이를 버린 옛 연인 일을 죽인다면 시에 수천억, 시민들에게 수천억을 주겠다며 정의를 돈으로 사겠다는 설정부터 시쳇말로 '쩐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냐며 거부하지만 점점 대책 없이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는 걸 지켜보며 일이 느끼는 공포의 묘사도 근사하다. 다들 노란 새 구두를 신고 있다고 발작하고 도망치려 역에 갔다가 사람들한테 둘러싸이니까 내가 기차에 오르려 하면 날 끌어 내릴 거지! 소리 지르며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같이 핑글 도는 ..
어슐러 르 귄의 에세이집, <밤의 언어> 작년 연말부터 읽은 올해 첫 책이었는데 좋았다. 사실 르 귄의 단편 모음집인 줄 알고 집었다가 에세이라 당황했는데 읽기 잘했음. 서문에서 초판의 he를 they, she, one 등으로 수정했다는 내용부터 눈길을 끌었다. '최종적으로 he가 의미하는 것은 he 외에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 여성의 존재가 남성대명사에 '포섭되는' 일은 없고 '사라져'버리며 글을 쓴 사람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마저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 강하게 와 닿았다. 예술론, 창작론, SF․판타지론, 여성주의 등등 많은 면에서 옮겨 적고 싶은 구절이 많았다. '지금 시점에서는 리얼리즘이야말로 우리 존재라는 놀라운 현실을 이해하거나 그려내기에 가장 부적합한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였다. 작명할 때 ..
2019년에 본 '개봉' 영화들 2019년에 나는 무슨 영화를 어떻게 보았나. 2019년에 개봉했지만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는 뺌 (ex 타이페이 스토리) 내가 19년에 본 옛날 영화도 뺌 최근에 만들어지고 2019년에 관객에게 찾아온 영화 중 내가 본 영화 목록, 감상 기록 로마 / 알폰소 쿠아론 음향 층이 세밀했다. 매번 가던 극장에서 봤는데도 겹겹의 소리 층이 이렇게 체감된 영화는 처음이었다. 콜드워 /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영상미랑 음악, 배우 요아나 쿨릭이 좋았다. 모든 장면이 사진 같았다. 더 페이버릿 / 요르고스 란티모스 란티모스 전작들이 더 좋았다. 캡틴마블 / 애너 보든, 라이언 플렉 공짜표 쓰러 보러 감. 인피니티 워, 가오갤 1은 한순간의 쾌락이지만 볼 때의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건 재미도 없었다. 마블이 블랙 팬서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