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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 읽고 잡생각 《그리스 로마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세네카, 키케로, 플루타르코스의 글들이 묶인 책으로 읽었다. 좀 두껍긴 한데 여러 권 손댈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제일 재미있었던 건 플루타르코스의 . 거사 전날의 갈등과 대화, 비장한 순간, 새로 등장한 사람들과 사건들, 예상치 못한 반전의 반전까지.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이 살아 숨 쉬었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의 은 요즘 세상에 굳이 이런 글까지 번역해서 일반인 대상 책으로 나와야 하나 싶었다. 학술적 의미나 역사적 의미는 있겠지. 그런데 이걸 굳이 2020년의 독자들이 봐야 하나? 시대 감안해서 옛날 글들 빻은 거 잘 보는 편인데도 이건 정말 너무 역해서 이런 얘기라고 뭐 하나 예시로 옮기기도 싫을 정도다. 읽는 내내 요즘 세상의 어지간한 개저..
배반자의 글과 분리되지 못한 글-<아버지의 자리/어떤 여인>, 아니 에르노 옛날 홍상희 번역으로 읽었다. 다른 번역 제목은 , . 얼핏 봤는데 역자별로 뜻이 아예 다른 문장도 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다르다. 작지만 한쪽에는 아예 없는 문장도 있고... 뭐가 더 원문에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홍상희 번역이 굉장히 직역이라는 건 알겠다.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는 서두에 '글을 쓴다는 것은 배반한 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장 주네의 말을 명시해두는데 진짜 똑똑하다. 자기가 쓴 글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자리는 배반자의 글이다. 아비와 그의 자리, 그의 삶을 버리고 상위 계층으로 간 딸이 아비가 죽고 '나는 그를 배신했다'를, 그리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느끼고 쓰는 글. 돌아갈 수 없는 배반자가 내가 버린 것들을 글로 붙잡는 ..
사과하지 않는 '타락한 영화의 신'-<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같은 시대를 산 동료였던 슈페어와 리펜슈탈 책을 연달아 읽고 든 생각은 슈페어는 무척이나 영리하고 교활하며 리펜슈탈은 설령 거짓말을 할지라도 감정적으로는 솔직하게 느껴진다는 것. 슈페어는 지식인인 자신이 히틀러와 제3제국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던 것도 죄'라고 한다. 아예 맘에 없는 말 같지는 않지만 100퍼센트 진심이라는 생각도 안 든다. 무엇보다 너무나 정확하게 사람들이 나치의 장관에게서 듣고 싶은 걸 찔러주는 말이라 무서울 지경. 제3제국이 몰락한 뒤 난 몰랐고 그냥 히틀러가 시킨 대로 했으니 죄 없고 웅앵웅 변명하는 나치들 속에서 '몰랐던 것도 죄'라고 외치는 슈페어가 얼마나 기특해 보였을까. 예전 동지들 뉘른베르크에서 줄줄이 사형 선고 받을 때 20년 형으로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부터 보통은 아..
나치 전범의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알베르트 슈페어 회고록이 좋다. '회고록'이라는 말 자체부터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게 소련이나 제3제국 얘기기까지 하면 그 책은 나의 취향이 아닐 수가 없고... 제3제국의 중심에 있던 자, 히틀러의 건축가, 나치의 군수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도 읽기 전부터 재밌겠다 싶었는데 서문의 '나의 시대는 재앙 속에서 절정을 구가했고' 여기서부터 이미 취향저격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는, 만일 히틀러에게 친구가 있다면 내가 바로 그 친구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열정과 청춘의 영광을 빚지고 있다. 이제는 사라진 공포와 죄악들도...." 이 책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긴 변명'이라고 하던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니, 변명이 아닐 수 있나?'였다. 애초에 뭔가 변명하고 싶은 게 있는 자가 회고록을 쓰는 거 아..
BTS 리더가 읽은 사랑에 대한 철학책,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메논> 책 읽고 나면 가끔 다른 사람들 감상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는데 그러다 플라톤의 이 책을 방탄소년단의 RM이 읽었다는 글을 봤다. 무슨 방송에서 대기하면서? 읽고 있었다고. 사진 속의 저 붉은 책. 플라톤의 와 을 천병희가 번역해 도서출판 숲에서 낸 책인데 내가 읽은 거랑 같은 판본이라 뭔가 반가웠다. 겉에 종이 표지 벗기면 저렇게 된다. 는 생각보다 좋았다. 맑고 화창한 여름날 강가에서 소크라테스가 젊고 아름다운 파이드로스와 사랑과 수사학에 대해 얘기한다는 설정 자체가 좋았고, 아득한 시간을 넘어 거의 2천4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대화를 본다는 것도 좋았다. 소크라테스는 일리소스 강변에서 아름다운 연동 파이드로스를 만나는데 파이드로스의 구애자 뤼시아스가 소년에게 사랑에 대한 연설을 했다는 걸 알게..
뒤렌마트 희곡선 - 노부인의 방문 / 물리학자들 은 처음 읽었을 때 진짜 강렬했던 희곡이었다. 미친듯한 전개에 빨려 들어 와씨; 천재네ㄷㄷ 하며 읽었던 게 기억나는데 다시 봐도 좋았다. 엄청나게 부유한 노부인이 파산 직전의 옛 고향에 찾아와 과거 자신과 뱃속의 아이를 버린 옛 연인 일을 죽인다면 시에 수천억, 시민들에게 수천억을 주겠다며 정의를 돈으로 사겠다는 설정부터 시쳇말로 '쩐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냐며 거부하지만 점점 대책 없이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는 걸 지켜보며 일이 느끼는 공포의 묘사도 근사하다. 다들 노란 새 구두를 신고 있다고 발작하고 도망치려 역에 갔다가 사람들한테 둘러싸이니까 내가 기차에 오르려 하면 날 끌어 내릴 거지! 소리 지르며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같이 핑글 도는 ..
어슐러 르 귄의 에세이집, <밤의 언어> 작년 연말부터 읽은 올해 첫 책이었는데 좋았다. 사실 르 귄의 단편 모음집인 줄 알고 집었다가 에세이라 당황했는데 읽기 잘했음. 서문에서 초판의 he를 they, she, one 등으로 수정했다는 내용부터 눈길을 끌었다. '최종적으로 he가 의미하는 것은 he 외에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 여성의 존재가 남성대명사에 '포섭되는' 일은 없고 '사라져'버리며 글을 쓴 사람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마저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 강하게 와 닿았다. 예술론, 창작론, SF․판타지론, 여성주의 등등 많은 면에서 옮겨 적고 싶은 구절이 많았다. '지금 시점에서는 리얼리즘이야말로 우리 존재라는 놀라운 현실을 이해하거나 그려내기에 가장 부적합한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였다. 작명할 때 ..
말로만 듣던 어스시 나도 읽어봄 《어스시의 마법사》, 어슐러 르 귄, 최준영‧이지연 역, 황금가지 여태 어스시가 '어스'라는 이름의 도시인 줄 알았다. 보니까 earthsea였네. 글이 생각보다 간결했다. 반제, 나니아 연대기랑 같이 3대 판타지라고 홍보해서 저런 건 줄 알았는데 문체 느낌이 다르다.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간략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읽다 보니 구구절절 늘리고 쓸데없는 묘사 덕지덕지 처바른 게 아니라 딱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더더기가 없다. 손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몰입하고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주인공에 이입해서 내가 모험하는 느낌으로 읽는 책보다는 하나의 신화를 듣듯 보는 책 같았다. 여러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와 마법에 대한 세계관을 만들어낸 게 놀라웠다. 르 귄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