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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어스시 나도 읽어봄 《어스시의 마법사》, 어슐러 르 귄, 최준영‧이지연 역, 황금가지 여태 어스시가 '어스'라는 이름의 도시인 줄 알았다. 보니까 earthsea였네. 글이 생각보다 간결했다. 반제, 나니아 연대기랑 같이 3대 판타지라고 홍보해서 저런 건 줄 알았는데 문체 느낌이 다르다.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간략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읽다 보니 구구절절 늘리고 쓸데없는 묘사 덕지덕지 처바른 게 아니라 딱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더더기가 없다. 손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몰입하고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주인공에 이입해서 내가 모험하는 느낌으로 읽는 책보다는 하나의 신화를 듣듯 보는 책 같았다. 여러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와 마법에 대한 세계관을 만들어낸 게 놀라웠다. 르 귄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
테메레르, 2권까지 읽으니까 더 이상 흥미가 안 가 《테메레르 1, 2.》 나오미 노빅, 공보경 역, 노블마인 1권 왕의 용은 술술 읽혔는데 2권 군주의 자리는 1권보다 재미없었다. 왜 2권은 1권만큼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생각해봤다. 먼저 새로운 배경인 중국이 흥미롭게 구현되지 못했다. 1권에서는 해군 대령 로렌스가 뜻밖의 용의 알을 얻고 원치 않게 용의 비행사가 된다. 해군인 로렌스는 용과 함께 근무하는 영국 공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독자는 로렌스와 함께 모르는 세계에 진입한다. 다른 세계를 다루는 판타지에서는 이런 설정이 몰입하기 좋은 것 같다. 해포에서 머글 세계에서 자란 해리가 마법사 세계에 입성할 때 독자인 나도 같이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 같아 흥미진진했던 것처럼. 2권에서는 로렌스가 중국에 가는데 1권처럼 인물이 자신이 가는 세계에 ..
BBC 드라마 원작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수잔 클라크, 이옥용 역, 문학수첩 영드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원작. 드라마는 안 봤고 도서관에 있기에 책만 읽어봤다. 재미가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다. 초반 장벽과 약간의 노잼 구간을 버티면 1300여 페이지에 걸쳐 옅게 깔린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마법의 힘이 사라지고 마법에 대한 이론 연구만 남은 영국에 다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마법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를 이어 두 번째 마법사가 나타나 첫 번째 마법사의 제자가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법에 대한 견해가 달랐고 스승과 제자는 갈라선다. 여기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이라는 실제 역사가 더해지고 아는 이의 소개가 없으면 교류하기 어려운 당시 영국의 사회상도 그려진다. 몇 백 년 만에 등장한 마법사도 제대..
쇼스타코비치의 신랄한 유머 감각+회고록 《증언》 읽고 솔로몬 볼코프가 엮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을 읽다가 그의 어둡고 신랄한 유머 감각이 드러나는 장면을 모아 봤다. (온다프레스, 김병화 역) (지휘자 므라빈스키에 대해)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하자. 참새에게 대포를 쏘는 게 전혀 쓸모없는 낭비라는 건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므라빈스키 졸지에 참새행... 시원찮은 음악가들의 음악도 많이 듣는다. 수없이 듣는다. 그들도 살 권리가 있는 법이다. 다만 '붉은군대 합창단'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악단만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혹시 내가 갑자기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다면 이런 악단들은 모조리 즉시 해산시켜버릴 작정이다. 그게 내 첫 번째 명령이 될 것이고 나는 당연히 사보타주라는 죄목으로 즉시 체포되겠지. 하지만 일단 흩어진 악단은..
행복한 라짜로 보고 주절주절 볼 때는 재미있었다. 전반부까지 그냥 드라마 보듯이 재미있게 봤고 라짜로의 죽음 이후 후반부는 음악이 성당을 떠나 라짜로 일행을 따라오는 성스러운 장면이 좋았다. 그때 나온 음악이 다윗이 밧세바랑 통간한 뒤 속죄하며 지은 시편 51편을 가지고 바흐가 만든 '오, 주 하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BWV 721)라는데 음악 진짜 좋았다. 라짜로의 죽음 자체보다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멀리서 잡아주는 카메라 앵글이 충격이었다. 절벽의 황량한 높이를 한눈에 보여주면서 흰 옷 입은 라짜로가 그 절벽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떨어지는 모습을 피할 수 없이 목도하게 만든다. 사실 라짜로 죽는 거 자체는 이름이 스포라... 막 보고난 직후에도 괜찮은 영화 봤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볼 때는 별생각 없다가 보고..
수전 손택이 젊은 시절에 사랑한 클래식 손택이 14세에서 30세 사이에 적은 일기에서 음악에 관한 부분만 발췌 (1947~1963) 1948년 (15세) 9월 1일 오후 내내 지드를 읽으며 부슈(Fritz Busch)가 (글리데번 음악제에서) 녹음한 [모차르트의] 를 들었다. 몇몇 아리아들(영혼을 일깨우는 그 달콤함이란!)은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저 배은망덕한 놈이 나를 속이고'와 '저리 가, 잔학한 자여, 저리 가') 이런 노래들을 항상 들을 수 있다면 진정 단호하고 평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12월 25일 지금 이 순간, 나는 이제껏 들어본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 흠뻑 빠져 있다. 레이블에서 발매하고 마리오 살레르노Mario Salerno가 연주한 비발디 B단조 피(아노) 포(르테) 협주곡 말이다. 음악은 모든 예술 ..
앤 카슨, 소크라테스의 편지 친애하는 크리톤, 오늘 오지 마. 네가 오면 난 자는 척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왜 내가 아내를 집으로 보냈는지 설명해야 할 거야. 눈물은 곡하는 사람들의 것이지, 그렇지 않아? 우리 집 꼬마 아가씨는 더 분별력 있어. 그 애는 여기 와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어. 여긴 정말 축축하네요. 아빠는 모자가 필요해요. 그리고 30분 후에 뜨개질한 모자를 가지고 돌아오더군. 네가 지난겨울에 내게 준 것 말이야. 난 현실적인 사람이 좋아. 내 처형은 사흘 뒤로 정해졌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내게 독배를 보내준다면 고맙겠지만 말이야. 나도 그게 무척 비싸다는 건 알아. 거기다 관세도 있고 뇌물도 바쳐야겠지. -왜 그 독초들은 그냥 이 나라에서 자라주지 않는 걸까?- 아무튼, 다른 방식보다는 독배..
김빠진 결혼 생활이 살아나려면 살인 사건이 필요해 - 맨하탄 살인 사건 (1993) 최근 본 영화 중에 제일 웃겼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낄낄거리며 본 영화는 오랜만이었다. 같이 본 M이랑 둘 다 완전 취향 저격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미쳤닼ㅋㅋㅋㅋㅋ' 하며 봤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제대로 만나기 전에 그의 스캔들을 먼저 접했고 어쩌다 몇 편 정도 그의 영화를 보긴 했지만 작품을 부러 찾아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맨하탄 살인 사건을 보고 아, 우디 앨런이 이래서 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부부를 생생하고 예리하게 그리면서 이웃집에 일어난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효과적으로 맞물리고 히치콕이나 흑백 시대 느와르의 그림자도 어른거리게 버무려 놨다. 히치콕 이창 본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봐서 더 겹쳐 보였다. 이웃집을 관찰하며 '어쩌면 저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
누벨바그 감독들이 남긴 파리에 대한 여섯 가지 시선 - 내가 본 파리 (1965) 영화를 통해 프랑스, 파리를 보는 건 재미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겹겹의 환영을 덧입은 파리라는 환상, 파리라는 광채 나는 유령에 매혹되지 않기는 어렵다. 그리고 카메라의 마법 속에서 어쩌면 실제의 파리보다 영화 속의 파리가 더 풍부하고 더 환상적이고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게 꼭 우디 앨런의 처럼 낭만의 극치로서의 파리가 아니라 구질구질하고 사람들이 다투고 배신하고 숨 막히게 우글거리는 모습일지라도. 는 누벨바그의 유명 감독 여섯 명이 각각 파리의 거리를 배경으로 만든 여섯 편의 옴니버스 영화다. 요즘 들어 두 시간이 넘어가는 영화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데 호흡이 길지 않은 단편이며 다 합쳐서 1시간 35분 정도라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60년대 영화인데 다들 옷차림이 지금 봐도 세련되어서 옷..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 - 2017년 수상작 2016년 수상작을 보다가 라브 디아즈 감독을 알게 되었는데 2017년 수상작에는 딱 취향인 작품이 없었다. 2018년 수상작과 국제경쟁섹션 작품들도 궁금했는데 못 봐서 너무 아쉽다. 세컨드 찬스 맨 / 크리스토프 지라데, 독일/프랑스 / 4분 30초 Second Chance Man (Tindersticks), Christoph Girardet 틴더스틱스의 최신 앨범을 여러 감독들이 해석한 의 일부라고 한다. 음악과 영상 조각들이 감각적으로 어우러진다. 볼 때는 음악과 영상에 젖어 재밌게 봤는데 저렇게 음악과 영상을 감각적으로 조합하는 건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나. 유튜브에도 많은데 그런 작업들과 차별화되는 이 작품만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천국의 반대편 / 이반 호세 무르직 카프리오..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 - 2016년 수상작 오버하우젠 월드 투어로 ACC에서 해주는 2016~2018 수상작, 2017, 2018 국제경쟁 섹션 다 챙겨 보고 싶었는데 2016, 2017 수상작 밖에 못 봤다. 본 지 일주일 지나서 기억이 흐릿한데 남은 기억이라도 적어둬야지. 전화 교환기 / 사라 드라스, 독일 / 7분 30초 Telefon Santrali / Sarah Drath, Germany 젊은 여자가 전화 교환대 앞에 앉아 있다. 그녀는 다른 곳과의 연결을 원하는 사람, 병원을 찾는 사람, 터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의 전화도 받는데 잔소리에 교환 콜이 온다는 핑계를 대며 끊는다. 그녀는 식물이 가득 한 창가로 가서 차를 끓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차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
팀 워커 단편 영화 <The Muse> (2014) 팀 워커의 사진이 취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 단편 영화는 취향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색감과 풍경에 꽂혔다. 뮤즈-인어를 연기한 크리스틴 맥메너미의 길고 밝은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때로는 얼굴을 가리기도 하며 해초처럼 떠다니는 것도 좋았고 예술가-인간 남자를 맡은 벤 위쇼의 묘한 눈동자 색깔과 분위기도 좋았다. 한때 번영의 상징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낡아버린 대저택과 바람이 부는 푸른 들판, 달팽이가 기어 다니는 독특한 물빛의 유리 수조도 좋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벤 위쇼가 스크린에 비친 인어를 보는 장면이었다. 일단 이미 그의 곁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 뮤즈를 회상하는 흔적의 매체로 사진보다는 영상을 주요하게 채택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사진도 나오긴 하지만 뮤즈의 환영, 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