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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생활 (1991) - 나와 연결된, 나 아닌 나에 대한 감각 영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위아래가 뒤집어진 저녁 풍경이 보이고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기, 저 별이 나왔으니까 이제 크리스마스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안개가 보이지?" 카메라가 옆으로 흐르며 밤하늘이 더 넓게 보인다. 여자가 말한다. "저건 안개가 아니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함께 있어서 안개처럼 보이는 거야." 그리고 화면은 바뀌어서 이제 어머니의 품에 안겨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맨 처음 나온 뒤집어진 세상은 이 아이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던 셈이다. 잠시 화면이 암전 되었다가 돋보기에 비친 커다란 갈색 눈과 초록색 잎사귀가 나온다. 새소리가 쉼 없이 들리고 여자가 말한다."첫 잎사귀가 나왔네. 이제 봄이니, 나무들은 모두 이런 잎사귀로 덮일 거야." 아..
[번역 비교] 체호프 단편선 펭귄북스/열린책들 펭귄북스에서 낸 체호프 단편선 《사랑에 관하여》(안지영 역)와 열린책들에서 낸 체호프 단편선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오종우 역)은 단편 두 편이 겹친다. 와 이 겹치는데 펭귄북스, 열린책들 순으로 몇 문장 뽑아 비교해 봤다. 그는 울며 떨고 있는 이 소녀의 신경이 반은 병들고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신경줄에, 마치 철이 자석에게 이끌리듯 응답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결코 건강하고 체격 좋고 뺨이 붉은 여인을 사랑할 수 없겠지만, 창백하고 약하고 불행한 타냐는 그의 맘에 들었다. - 펭귄북스, 안지영 번역 그는 이 훌쩍이며 떨고 있는 처녀의 신경이 자석의 철심처럼 자신의 신경을 매우 아프게 자극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건강하고 강인하며 뺨이 붉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창백하고 가냘프며 행복하지 ..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 '너 자신을 알라'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미셸 투르니에에게는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계절 따라 변하는 정원의 모습, 친구들과의 일화 등을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외면일기》는 그의 이런 토막글을 모아 1월부터 12월까지 열두 달로 나눠놓은 책이다. 만약 모바일 화면으로 본다면 한 화면 안에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담길 만큼 짧은 글들이 대부분이다. 덕지덕지 물감 칠이 된 유화보다는 간소한 스케치에 가깝다. 연결되지 않는 파편들이 쭉 나열되어 있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기도 한 미셸 투르니에의 유머 감각이 곳곳에서 반짝이고 그의 다른 작품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창작의 씨앗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읽다가 미소를 짓게 되기도 하고 와, 이런 구절이! 감탄하며 밑줄을 그을 때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러나..
매혹당한 사람들 (2017) -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안녕! 스포 있음 예쁜 화면이 보고 싶어서 보러 간 영화였는데 그 점은 만족스러웠다. 촬영 감독은 필리페 르 소어드(Philippe Le Sourd).남부 특유의 스페인 이끼가 늘어진 울창한 나무.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해가 질 때의 붉은빛과 나무의 검은 실루엣, 장미 정원, 이오니아식 흰 기둥이 늘어선 대저택에 아름다운 여자들의 파스텔 톤 드레스와 진주 귀걸이, 섬세한 장신구, 레이스 커튼,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긴 금발 머리카락이 더해져 눈이 흡족했다. 가끔 화면이 너무 어둡지 않나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른거리는 촛불처럼 부드럽고 꿈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상이었다. 역시 예쁜 게 최고야. 유머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보는 내내 입 밖으로 웃음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꽤 있었다...
내가 엄마에 대해 아는 것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바다를 보는 엄마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장을 보러 가면 아이스크림을 꼭 사야 한다. 안 사오면 엄마가 아쉬워한다. 엄마는 꿀꽈배기를 좋아한다. 엄마는 검은 쌀을 너무 많이 넣어서 밥 색깔이 새까맣게 되는 걸 싫어한다. 엄마는 샌드위치에 햄 같은 가공육을 넣는 걸 싫어한다. 엄마는 도시락을 동물 모양, 캐릭터 모양 등 생명체가 있는 모양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먹을 때 너무 잔인하잖아." 엄마가 말한다. 엄마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열심히 돈을 모아야 한다) 엄마는 식물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다육이는 취향이 아니라고 했다. 너무 볼품없다고. 보다 더 풍성한 식물들이 좋다고 한다. 엄마는 과일을 마..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 음악과 함께 흘러간 세월 Ray Charles - Come Rain or Come Shine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정말 딱 맞다. 말 그대로 음악과 더 이상 젊지 않은, 어느 순간 '내 인생이 겨우 이런 것인가?'라는 자기 내부에서 떠오르는 물음과 마주치는 시기, 자기 앞에 이제 기나긴 삶의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 황혼기의 인물들이 나온다. 그렇다고 《녹턴》의 인물들이 그저 체념한 채 다가오는 밤을 멍하니 바라보는 건 아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인생을 다시 한 번 붙잡아 보려 한다. 그로 인한 행동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건 '실패자형 추남'인 외모 때문이라며 아내의 남자친구가 준 돈으로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타르코프스키의 Martyrolog - 위대한 영화 감독의 내밀한 일기 국내 번역판 제목은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남긴 방대한 양의 일기에서 유족들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과 영화 작업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얘기 등을 제외하고 추린 일기 모음집이다. 1970년 4월 30일 도스토옙스키를 영화화하려는 단상에서부터 시작해서 1986년 12월 15일 폐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영화화하고 싶었던 햄릿을 읊조리며 끝난다. 1970년에서 1986년까지의 일기이기 때문에 이 사이 그가 만든 솔라리스(1972), 거울(1975), 스토커(1979), 노스탤지아(1983), 희생(1986)의 작업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헤르만 헤세나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토마스 만 등 작가들에 대한 생각과 독후감도 있으며 잉마르 베리만, 로베르 브레송, 미켈란젤로 안토니오..
리틀 포레스트 (2018) - 김태리의 농촌 생활 브이로그? 스포 있음 리틀 포레스트는 엄청난 야망을 품고 있거나 다루고 있는 소재가 거대해서 보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특별한 각오를 하고 보러 가야 하는 영화는 아니다. 제목 그대로 '작은 숲'처럼 편안하게 관객의 마음을 감싸주고 다정하게 맞아주는 영화였다. 관객의 멱살을 잡아채며 눈 크게 뜨고 보라고 고함을 지르는 영화가 아니라 보기 편했다. 소박하고 잔잔하지만 그렇다고 메시지가 없는 건 아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세상에 치이고, 허기지고, 탈진해서 쓰러진 청춘들에게 정갈하고 맛깔나는 밥상과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선사하며 다감하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영화의 주인공 혜원은 임용고시에 낙방하고 편의점 밥으로는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도시 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금방 올라갈 것이고 며칠..